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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 말을 듣는 것이 좋습니까? (행 4: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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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 말을 듣는 것이 좋습니까? 
사도행전 4:13-21                   
2004년 4월 18일

인간 역사에 가장 큰 사건은 예수님이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신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처형되신 것입니다. 그가 사흘 만에 다시 사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만 놀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 사람들이 더 놀랐습니다. 간장이 서늘했습니다. 설마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나사렛 촌놈 하나 정도 죽여 없앤다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야단스럽던 나라가 잠잠해 질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판이었습니다. 죽은 예수가 살아나서 이곳, 저곳에 나타납니다. 그도 수 백명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겁쟁이 졸장부로만 알았던 제자들이 달라졌습니다. 겁쟁이가 아니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주라고 조리 있게 설교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고합니다. 내가 그 분을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우리뿐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나보셨지요 합니다. 그 세도 대단한 바리새인, 학자, 서기관들, 잡으려는 로마 군인들에게 설교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이 5천명이 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왜 자꾸 예수의 부활을 전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책회의로 모였습니다. 장로들, 율법학자들, 대제사장 그리고 대제사장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 다 모였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심문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했느냐?”(행 4:7)

베드로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 장로들이여 내 말을 들어보세요. 오늘 앉은뱅이가 나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 여기 서 있지 않습니까? 보시고도 모르십니까? 천하에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예수님 뿐 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제대로 배우지 못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그렇지만 예수님에게 병 고침 받은 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면 그때는 걷 잡을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회당 밖으로 내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인간의 구주라는 것을 우리 빼고는 다 믿는 것 같소. 그런데 우리가 이들을 가두고 벌주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설 것이 불을 본 듯 뻔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더 이상 예수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하라. 앞으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 절대 말하지 말라’ 고 경고했습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들의 말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누구 말을 듣는 것이 좋겠습니까?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죄 없는 두 삶을 처벌할 방법이 없어서 놓아 주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말씀의 줄거리 입니다. 저도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좋습니까?”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는 변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했습니다. 인터넷 못하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멀티플레이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무서운 변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좋은 쪽으로 변해야 합니다. 껍질을 벗어야 합니다.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올챙이가 변하면 개구리가 됩니다. 굼벵이가 변하면 나비가 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옛날의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꼭꼭 마음의 문을 닫으려고만 합니다. 바리새인, 장로, 율법학자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기적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5천명이 예수 믿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기회는 있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영접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부활을 전한다고 잡아 가두었습니다. 그들이 어디 거짓말 했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자들만 보았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교회는 이 부활을 믿고 전하는 곳입니다. 저는 이 예수님의 사람으로 부름 받은 것을 매일 감사합니다. 이 세상의 별의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시골 장터와 같습니다. 사람이 북적댑니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습니다. 늙은이, 젊은이, 기라지 않고 장보러 왔습니다. 다 사고 팔기위해 옵니다. 정보도 주고, 받습니다. 친구도 만납니다. 장터는 왁자지껄 시끄럽습니다. 장터는 신바람 나는 곳 입니다. 잡탕입니다. 어떤 이는 인생은 비빔밥이라 합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장터에 사람이 엄청 모였습니다. 예수가 살아 나셨다고 베드로, 요한 강사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단했습니다. 남녀노소 대단히 많았습니다. 잡으려는 로마 군인도 있습니다. 힘 있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장로들도 모였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이 예수 복음장터에 장 보러온 사람 중 잘난 사람들이 그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습니다. 사사건건 불평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 압니다. 구제 잘 합니다. 귀족입니다. 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왜 예수님을 싫어합니까? 죽이고 난 다음에도 이 예수님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가르치거나 소문내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속으로 쩔쩔 매고 있습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세계도 그렇습니다. 모하멧교는 622년을 원년으로 삼습니다. 모하메드가 고향 메카를 떠나 북쪽 사막의 오아시스 메디나로 옮겨갑니다. 그 때가 622년 입니다. 이 사건을 헤지라라 합니다. “출발”이라는 뜻입니다. 새 출발의 선언을 “메니아 헌장”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공동체 내 세력들 사이에서 원만한 합의를 보지 못하면 모하메드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메디나에 형성된 공동체의 종교지도자인 동시에 정치, 군사적 전권을 그들이 맡습니다. 그는 마흔네살이 되던 해에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계시를 받고 코란(이슬람 경전)을 암송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이단으로 규정 됐습니다. 메디나는 당시 유대인과 아랍인 부족들이 뒤섞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끊어지지 않자 제 3의 중개자를 모하메트가 초빙되었습니다. 그가 메니나 헌장을 만듭니다. 아랍 사람들은 모두 무슬림이 됐습니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들이 떠났습니다. 메니나는 이슬람 공동체가 됐습니다. 이렇게 세계는 복잡합니다.

우리도 이제 눈을 뜨고 바로 봐야 합니다. 요즈음은 웰빙(Well being)바람이 붑니다. 이는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더 쉬운 말로 바꾸어 봅시다.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럼 행복이 무엇입니까? 자기 뜻을 이루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그 누구도 행복은 저 멀리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제 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 보았습니다. 꿈을 이룬 사람은 Well being한 사람입니까? 낙선한 사람치고 정말 승리한 사람도 있을 것 입니다. 여기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있습니다. 당장 죽여도 대항할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힘이 넘쳤습니다. 내가 목숨이 아까워 너희들에게 살려달라고 구걸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치사하게 사느니 예수부활전하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부유한 삶이 웰빙이 아닙니다. 정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웰빙이란 단어는 발전, 민권운동을 하는 여피족들의 삶의 모습에서 나왔습니다.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차타고, 골프치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정말 불행의 씨앗인 죄를 토해 내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고쳐야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우리 목회자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가 가난할 때 기복신앙을 불어 넣었습니다. 십자가 지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주일성수, 경건한 생활, 회개 전도, 십일조 이런 것을 게을리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 모습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야단났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 대단한 신앙의 영웅이 있습니다. 그는 군인도 아닙니다. 귀족도 아닙니다. 재벌도 아니었습니다. 학자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제자 되기 전에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나이도 많았습니다. 한 때는 그도 흔들린 적이 있었습니다. 돈을 벌고 출세하기 위해 제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인기 높은 예수님 제자로 유명인사가 되고자 하는 꿈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에 제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군인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바리세인과 율법학자를 오히려 비웃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으나 참 자유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죽을 각오도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이 베드로는 죽이지 않겠습니까? 로마의 군인들이 베드로 하나쯤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듯이 처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기고만장합니다. 너희들이 뭐래도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런데 내 이 한 몸 살겠다고 치사하게 예수님을 부인 못해요, 날 죽여 보세요. 이 늙은 몸 아깝지 않습니다. 이젠 누구의 말도 듣기 싫어요. 난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살겠다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못합니다. 이전에 세 번이나 부인 한 것도 천추에 한이 되는데.... 또 다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르쳐야해요. 내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파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들을 수 없습니다. 나 죽여 보세요. 죽여주세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여기 베드로의 신앙 대단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뭐 대단합니까? 잘났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너무 과소평가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비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기도, 말들은 너무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 일을 당하면 망설입니다. 주일성수, 성경읽기, 기도, 전도, 봉사, 헌금도 마음대로 안 되지 않습니까? 이것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요. 이제는 우리가 그 무엇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문제에 대해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싸울 것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합니다.

맺는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체포되었습니다. 재판관 앞에서 죄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겁내는 사람은 바리새인, 장로, 대제사장,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5천명이 베드로의 설교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감히 베드로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베드로와 요한에게 대책회의 결과를 말합니다. 이 다음부터는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 그리고 예수에 대해 가르치지 말라고 합니다. 때에 베드로는 “내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좋겠느냐,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 것이 좋겠느냐?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느냐?”라고 합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벌벌 떨 것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 정도야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이라면, 목숨까지 다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 합시다.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주 안에서 승리합시다.. _충웅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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