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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방황이 아닌 정착을 (눅 2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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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방황이 아닌 정착을(눅 24:25-35)
2004.04.18.


간혹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경찰만 보면 잘못한 것이 없어도 움찔 하고 놀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서운 경찰관도 무서운 사람이 있는데 바로 소방관입니다. 왜냐하면 소방관은 물불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소방관도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눈먼 시각 장애인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눈먼 시각 장애인도 무서운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노인입니다. 왜냐하면 노인은 다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처럼 저마다 막 살면 안 됩니다. 물, 불 안 가리는 행동, 인생을 다 산 사람처럼 행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믿음 생활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믿지도 못하면서 그렇다고 믿음을 포기할 수도 없는 사람들, 믿고 싶지만 믿지 못하며 애절한 영혼의 절규를 하는 수많은 지성인, 사상가, 철학도 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한 것은 지성은 갖추지 못했어도 예수가 구주로 믿어지는 것이 축복이요, 그가 부활했음이 믿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부활의 소식은 들었으나 믿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부터 10Km 떨어진 엠마오라는 촌으로 걸어가던 두 사람에게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셔서 회의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던 그들에게 확신과 소망을 주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부활의 증인』으로 변화되어 가는 가를 섬세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와 같이 부활의 소식은 듣고 알고는 있으나 확신이 없어서 싸늘하게 식어진 자신의 무력감 앞에 갈등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말씀을 듣고 회의에서 확신으로  방황에서 정착으로 변화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마지막에 죽는 것은 희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흡이 끊어져서 죽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끊어져서 죽는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숨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이라는 것을 가슴에 꼭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 법입니다. 교수형을 선고받은 사형수들도 마지막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까지 누군가 와서 자신을 구원해 주리라는 희망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사라진 인생처럼 삭막하고 비극적인 인생은 더 없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찾아드는 것이 있습니다. 절망과 실의와 슬픔입니다.


절망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한참을 동행하고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본다고 해서 다 보는 것 아닙니다. 본다고 해서 사물을 다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있다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다 식별해 내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눈은 때로 어떤 힘에 의해서 가려질 때가 있습니다. 갑자기 안보일 때가 있습니다. 닫혀질 때가 있습니다. 어두워질 때가 있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봐도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때 그런 현상을 경험하게 됩니까?

슬픈 눈동자

인간이 절망감에 깊이 빠져 있을 때입니다. 이런 때에 사람들은 제대로 보는 눈을 상실하게 됩니다. 절망하고 사는 사람들의 눈, 소망이 사라진 사람들의 눈동자, 이제 다 끝났다고 자포자기하고 있는 실의에 빠진 사람들의 눈동자를 가까이서 드려다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있고 눈동자의 초점은 흐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절망 외에는 다른 것을 결코 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절망에 너무 낙담해 있다가는 결코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동행하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들은 주님이 부활하셔서 그들과 대화하시고 동행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큰 슬픔에 매여 있어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보아서는 안 될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지면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고 만 것입니다.  눈이 절망으로 어두워진 상태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보일 리 만무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주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주님의 영광을 내 영광으로, 주님의 부활을 내 부활로 여기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세상의 절망적인 면만을 바라보면서 낙담하고 실망하고 슬퍼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낙심과 두려움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이 감겨있다면 설령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우리 코앞을 지나가신다 해도 결코 부활의 주님으로 맞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주님이면 충분하다"고 하는 고백 안에 모든 축복이 숨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주님은 어쩌면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일을 하신고 계시는 중이기에 내 생각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고 체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천국을 예비하고 계시며,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좋은 것을 가지고, 그분의 시간에 오실 것입니다.

의심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이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망권세를 깨치시고 승리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곁을 지나가고 계시는데 그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죽음의 세력을 완전히 꺾고 승리하신 주님이 우리 앞을 지나가시는데도 왜 우리가 환호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님을 의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눈이 불신앙으로 어두워 있을 때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이들은 바로 눈앞에 부활하신 주님을 두고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이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리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를 많이 가져다 놓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한번 부인하려고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아무리 많은 진실을 제시해도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불신앙의 죄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엠마오란 "알지 못하는 길"이란 뜻이고 엠마오로 가는 길은 불확실한 길, 방황의 길입니다. 이 시간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낙심의 길, 절망의 길을 의미합니다. 지금 뚜렷한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거나 방황하고 계십니까?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나면 끝이 나고 인생의 방황은 예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얼마나 교회를 다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을 젣로 만나야만 신앙의 방황이 끝이 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마시고 방황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방황이 끝나려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한다

복음적 기독교잡지로 유명한 크리스천 투데이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하바드 의대의 정신과 교수로 있는 로버트 콜리스라는 분의 연구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는 사회에서 불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있었지만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한 비결에 대한 연구입니다.

콜리스 교수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내적인 힘이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내적인 강한 힘의 원천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는데 그들의 내적인 강한 힘은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불행한 상태에 있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을 통해 더욱 강한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따라서 실망과 낙심,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 죽음의 인생길을 걷고 계신 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절망으로 마치는 종교가 아니고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니고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신앙이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죄와 함께 내가 죽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안보이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만나면 무미건조하던 삶이 풍요로운 삶이 됩니다. 죽을 맛 나는 인생이 살 맛 나는 인생이 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이 변하여 빛나는 희망이 됩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야 한다

보스턴의 한 정신병원에 불쌍한 소녀가 수용되어 있었습니다. 소녀는 사람들을 갑자기 공격하는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습니다. 의사는 소녀에게 회복 불가능이란 판결을 내렸습니다. 작은 애니로 불린 이 소녀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모와 연락도 완전히 단절되어 고독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병원에 나이 많은 간호사가 있었습니다. 이 간호사는 매일 성경을 들고 애니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습니다. "애니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나도 너를 정말 사랑한다."

간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소녀를 위해 6개월 동안 한결 같이 사랑을 쏟았고 그 때부터 애니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며 밝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으며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녀는 신문기사를 읽고 중대한 결심을 하였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 켈러라는 어린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기사였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 어린아이의 평생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간호사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헬렌 켈러에게 쏟았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바로 앤 설리번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감동을 받고 뜨거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회의가 생기고, 열심이 식어갈 때 어떻게 그 문제를 해결합니까? 그냥 참아 넘기나요? 누구하고 상의를 하시나요? 가장 좋은 해결책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불이 붙습니다. 불신이 믿음으로 바뀝니다.

요한 웨슬레에게도 이런 고백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그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올더스게이트에 있는 어느 교회에 들어갔다가 마침 어떤 사람이 일어나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는 순간 그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 경험이 웨슬리를 변화시켰습니다. 이 경험에서 웨슬리는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생명 있는 설교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충만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을 때는 매사가 억지가 되고 억지로 하는 모든 일로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으며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오히려 기쁘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 오면 기뻐서 날을 것 같고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을 먹어도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막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가 그들의 전도를 중단시키지 못했으며, 로마의 총칼도 그들이 외치는 부활의 행진을 결코 가로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지심으로 인생의 방황을 끝내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한다

캘리포니아에 썬 쎗(Sun Set)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로 해가 떨어지면 황홀한 황혼의 신비한 모습이 대단합니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지는 햇빛보다 강렬한 것은 떠오르는 동녘 햇살의 찬란한 힘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해가 지는 석양의 엠마오에서 희망이 기다리는 동쪽 예루살렘을 향해서 되돌아 올라갔습니다. 실망과 낭패의 절망 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잃어버린 신앙의 원위치로 돌아왔다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허물 된 행동을 회개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로 되돌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셨기에 하나님께로 되돌아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되돌아갈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때로 절망과 어둠과 낙심이 있어도 떠나서는 안 되는 곳은 영적 예루살렘입니다. 물질과 번영으로 출세해도, 인생의 행복한 길을 달리는 그 때도 예루살렘은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엠마오의 인생  길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찬란한 생명의 빛 되신 그리스도가 계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도 사랑의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고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품을 향해 돌아가야 합니다. 영적 예루살렘으로 가야 합니다. 그곳에 위로와 영원한 생명이 있음으로 당신의 방황을 끝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뜨거움을 잃어버리고, 고아처럼 하나님 없이 자기 혼자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사는 분이 계십니까? 엠마오로 내려가는 삶의 방황에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내려가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삶이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은 내가 주님을 만나 은혜 받은 자리, 내가 충성해야할 자리, 내가 사명 받던 그 자리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함께 주를 섬기며, 함께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나눔이 있는 곳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이제 방황은 끝나야 합니다. 더 이상의 방황이 아닌 정착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은혜의 정착, 충성의 정착입니다. 삶의 방황은 이제 끝나고 신앙의 방황도 이제 끝내야 합니다.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두 제자의 뜨거워진 마음처럼 영적 예루살렘을 향하여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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