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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절망을 이기는 사람 (고후 4:16~18 (왕하 4:38~4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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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절망을 이기는 사람" 
  본문 : 고린도후서 4:16~18 (열왕기하 4:38~41 참조) 
  일자 : 2004년04월18일 설교 

 
  지난 14일에 젊은이 세 사람이 또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경기도 안산경찰서에 의하면 20대 초반의 남자 1명과 여자 2명이 모텔에서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들의 주소가 서로 다른 것을 볼 때 아마도 인테넷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함께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절망의 깊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경제적인 어려움,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문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 등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은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절망이라는 병은 사실 굉장히 무서운 마음의 병이요, 영혼을 갉아먹는 독약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절망이라는 어두운 병이 마음속에 찾아왔을 때 가능한 빨리 떨어버려야 합니다. 절망이 사람 마음속에 오래 자리잡고 있으면 대단히 해롭습니다. 절망은 사람의 마음과 몸을 갉아먹습니다. 아주 심하게 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 심하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절망이라는 바이러스가 우리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도록 속히 제거하고 다른 마음, 희망의 마음, 믿음의 마음, 건강한 마음을 뿌리내리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절망은 의미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절망은 좋은 관계가 깨어질 때 일어납니다. 절망은 미래를 보지 못할 때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모두 절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희생당하시고 죽음으로 떨어졌을 때, 제자들은 낙심하다 못해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의 모습을 보십시오. 두 제자에게 희망의 밝은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의 어깨는 축 쳐져 있었고, 그들의 눈동자는 힘을 잃어버렸고, 그들의 마음에는 혼란과 의심과 두려움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절망이 마음속에 빼곡이 차 있었기에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예루살렘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절망이 무서운 것은 이처럼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도 하기 싫고 사람도 만나기 싫고, 아무 것도 하기 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절망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업체에 부도를 만난 사업가는 절망합니다. 사업체에 미래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절망합니다. 미래에 함께 할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희망과 소망보다는 절망이 훨씬 더 많은 듯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에덴동산을 쫓겨났을 때 그들이 당면한 현실은 처절한 절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은 극심한 절망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의 빛이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절망의 검은 그림자가 수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절망의 어둔 그림자는 사탄의 권세와 같습니다. 사람들을 좌절의 긴 수렁에 빠지게 합니다.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절망의 그림자는 죽음의 세력과도 같습니다. 절망이 마음속에 자리잡게 되면 의미 상실과 희망의 실종으로 인하여 사람이 사람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에는 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눈동자에 기쁨이 사라집니다. 인간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모두 끊어질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 4장 말씀에 선지자 엘리사가 제자들과 함께 길갈에 들어섰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흉년이면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고통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 들에서 들호박을 따서 국을 끓였는데, 솥에 독이 우러났습니다. 이제 잠시 후면 배고픔의 허기를 면해보겠다고 기다리던 제자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배고픔을 오랫동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의 절망이 얼마나 큰지 잘 모릅니다. 이들이 당한 현실, 이들이 겪는 절망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습니까? 엘리사가 가루를 솥에 던져서 독을 제거하게 만들었습니다. 엘리사의 행동은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게 하는 행동입니다. 마술사가 마술을 부린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죽음의 독, 절망의 독을 제거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희망을 만들었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절망한 두 제자에게 절망을 이길 수 있게 해 준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의 삶의 자리, 나의 마음속에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내 안에 임하면, 절망은 사라지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에 자꾸만 절망이 쌓이는 것은 주님께서 내 안에서 역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과 문제들만 내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4:18 말씀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한다는 말씀은 원어로 “스코페인”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대상에 눈동자를 고정시킨 채 유심히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날에 항해하는 선원들은 야간에 바닷길에 암초가 있는지 혹은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할 때, 주변에 모든 불을 다 껐다고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손으로 눈을 가려 별빛까지 차단하고 유심히 어둠 속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답니다. 그래야만 앞에 무엇이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뚫어지게 보아야 할 것은 잠시 반짝 반짝 하다가 사라질 현실의 현란한 현상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잠간 보이다가 없어질 것을 열심히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크게 뜨고 영원한 것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바꾸어야 진정으로 참된 것이 보입니다. 참되고 영원한 것이 내 눈과 내 마음에 보여야 진정으로 절망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발 밑에 먹을 것이 많아 열심히 땅만 뒤적거렸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날아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날개는 점점 퇴화되었습니다. 가까운 것만 쳐다보니 시력이 점점 약해져 멀리 있는 것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새는 닭이 되었습니다. 또 한 마리의 새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높은 가지 위에 올라가 앉았습니다. 그랬더니 발 밑뿐 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먹이가지 발견했습니다. 창공을 가르며 먹이를 낚았고 날개는 점점 힘이 생기고 눈도 더 좋아졌습니다. 그 새는 독수리가 되었습니다.

  내 마음의 눈을 더 멀리 더 깊이 더 높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가까이 보이는 것만 보면 절망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멀리 영적인 것, 신령한 것, 하나님의 것,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어야 절망을 이기고, 희망과 믿음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친히 참여하고 계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음성을 믿음의 귀를 가지고 들어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어루만져주심을 믿음의 마음으로 느껴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절망을 금방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제 내 삶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 더 많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절망을 내 마음속에서 모두 쓸어내 버릴 수 있습니다. 절망의 어둔 그림자를 모조리 씻어버리십시오. 희망으로 채우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희망과 기쁨으로 채우십시오.

  동굴과 터널은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차이점이 있습니다. 동굴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어두워집니다. 반대편으로 뚫린 곳이 없기 때문에 동굴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널은 다릅니다. 처음에 들어갈 때 어두운 것은 같지만, 터널은 저쪽 끝에 다시 나오는 길이 있습니다. 아무리 깊은 터널일지라도 출구는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절망을 만나는 것은 동굴에 들어간 사람과 같습니다. 동굴에 들어간 사람은 어느 쪽이 밝은 길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어떤 도움이 없다면 동굴에 깊이 들어간 사람은 큰 낭패를 당하고 길을 잃어버린다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터널에 들어간 사람과 같습니다. 비록 당장은 어두워 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면 밝은 빛이 보이는 출구가 있습니다.

  우리가 동굴을 헤매는지 터널에 들어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느냐, 나 혼자 걸어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절망의 어둠에서 내 혼자 방황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다면 그 사람은 동굴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비록 어둡고 힘든 고통과 절망을 만났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나의 길에 모셔들이길 바랍니다. 그래서 동굴이 아니라 터널을 지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37:5~6에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내 마음속에 절망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씨앗이 자리를 잡게 하십시오. 절망의 씨앗이 뿌려지면 잠시 후에 어둠의 커다란 그림자가 자신의 삶, 전부를 뒤덮어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빛이 나의 삶에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내 자신을 깨뜨려 버리십시오. 자기가 깨어져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사는 길은 스스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시간이 아닙니다. 자기 힘이 모두 빠진 상태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에 절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손을 쓰실 때에 사람의 절망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임재, 하나님의 손길의 체험, 하나님 말씀과 더불어 사는 삶,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 가운데 절망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하시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광야의 모든 믿음의 식구들이 절망을 이기고, 희망과 기쁨으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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