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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화목하라/ 롬 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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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화목하라

본문: 롬5: 1- 11

장 공예의 집안은 9대를 내려오면서 세간을 나지 않고 한 집에서 살아 식구가 수백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언제나 화평하고 돈후하여 당나라 고종 황제의 귀에까지 그 소문이 들어갔습니다. 고종은 이를 기특하게 여겨 그 집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때 고종은 장 공예에게 9대를 내려오면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장 공예는 종이와 붓을 가져다 놓더니 참을 인(忍)자를 백 개나 꽉 차게 써넣었습니다. 그것을 마치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화목하지 못함은 어른들의 의복과 음식이 고르지 못하다든지 젊은이들의 예절이 잘못되었다든지 하는 데서 비롯되는데 오직 참는 것으로 저희 집안의 헌법을 삼고 있습니다. 누구나 서로 이해하고 참는 데서 자연스럽게 말이 없고 화목하게 됩니다."
에덴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는데 악한 마귀가 침투해 증오와 불화를 사람에게 심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세계가 싸움의 세계, 질서의 세계가 무질서의 세계로, 조화의 세계가 부조화의 세계로 변했습니다. 이 같은 세계를 바꾸기 위해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화목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엡2:16, 골1:20, 요일4:10)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마5:9)이라면서 화목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화목해야 합니까?
첫째, 먼저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133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서로 화목하는 것 이상 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화해의 종교입니다. 자식들이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는 것을 볼 때 부모의 마음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좋은 말씀만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생활의 본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기적만을 나타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고, 이웃과 이웃과의 관계를 말하는 상징적인 뜻이 있습니다.
본문 10절에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11절 이하에도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원수 되었던 우리,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있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갈 길이 어디 있습니까?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의지하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나오셨습니다. 그 외에는 주님 앞에 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예배가 하나님께 열납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5장23절을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내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3)
셋째, 천국은 화목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17-19에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강과 기쁨, 의로움의 세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땅을 떠날 때 천국에 갑니다. 그곳은 미움과 싸움이 없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넷째, 화목은 우리의 책임이며, 하나님은 화목케 하는 사람을 천국의 일꾼으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평화와 기쁨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겸손함과 용납과 사랑에서 화목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역사는 교만과 우월감 또는 열등감과 자기 비하의 감정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화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책임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다툼이 있는 곳에서 화목케 하는 직책을 주셨습니다. 이 시대는 집단 이기주의가 팽배해 갈등과 대립으로 치닫습니다. 천국의 일꾼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곳에서 화목의 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5:18-19)
다섯째, 화목하지 않고 서로 싸우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두 집 다 무난한 매상을 올리고 있었지만 같은 종류의 음식점으로서 늘 상대를 견제하는 눈치였습니다. 하루는 앞집에서 간판을 바꾸어 달았는데 ‘원조 닭갈비’하고 써 붙였습니다. 간판이 효과를 발휘했는지 손님이 늘어 재미를 보았습니다. 그러자 맞은편 식당에서는 다음날로 ‘진짜 원조 닭갈비’라는 간판을 더 커다란 글씨로 달아 놓았습니다. 조마조마하게 두 집 사이에 맴돌던 전운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폭발한 모양입니다. 양쪽 집의 싸움은 감정 싸움이 되어 이성으로는 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전투 양상은 점점 치열해질 수밖에. 간판을 하루에도 몇 번씩 갈아치우려면 비용만 해도 엄청날 텐데 이제는 그런 손익계산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입니다. 상대를 누르고 말겠다는 자존심과 오기만 발동해서....
“우리가 진짜 원조 닭갈비”하면 “원조 특허 받은 진짜진짜 닭갈비”라고 응수하고 뒤에다 ‘주의! 유사닭갈비!’하고는 경고문까지 내달았습니다. 다음날엔 ‘원조라고 다 원조냐?’를 선봉에 세웠습니다. 주인들은 물론이고 종업원까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와서 멱살잡고 욕설에다 온갖 모함을 다 퍼부어 댑니다. 구경 중에 제일이 불 구경, 싸움 구경이라고 합니다. 흥미 있게 싸움 구경하던 사람들도 험악해져 가는 분위기에 질려 도망질했습니다. 입맛을 잃은 단골들은 혀를 차며 다른 먹자골목으로 옮겨갔습니다. 이젠 손님은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이래저래 양쪽 식당 모두 단골을 잃어버리고 아예 재기 불능, 텅 빈 거리에 주저앉게 되었습니다. ‘상처뿐인 전투! 이젠 그만둡시다.’그때서야 제정신을 찾았지만 이미 때늦은 뒤였습니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이솝우화 중에 아주 친한 네 마리의 황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도 함께 갔으며,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었습니다. 그렇게 항상 서로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어떤 위험이 다가오면 그들은 서로 힘을 합하여 대처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사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사자는 어는 누구와도 일대일 대결은 자신 있었지만 한번에 네 마리는 힘에 겨웠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기회를 엿보았고 소들이 풀을 뜯을 때 그 중 약간 뒤쳐진 황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귓속말로 다른 소들이 그의 흉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자가 이런 식으로 자꾸 접근하자 마침내 네 친구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각자는 다른 세 마리가 자기모략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그들 사이는 깨어져 각자 홀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자가 노리던 바였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사자는 그들을 잡아먹었고 그래서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화목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서로 믿어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까요.
첫째, 먼저 신앙으로 하나님과 화목해야 합니다.
화평을 가지려면 먼저 자신이 하나님과 화평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근심과 걱정과 염려가 가득한 사람, 내적인 투쟁이 있는 사람은 자연히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 보아도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바닷물이 요동해서 솟구쳐 올라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악인의 마음에는 안정이 없고 평화가 없습니다. 어느 사회, 어느 단체나 말썽부리고, 이 사람과 다투고 저 사람과 다투고 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자기 자신의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남편이나 아내와 다투고 나온 사람이 밖에 나가서 편할 것 같습니까?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신경질 내고 짜증냅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은 나가서 다른 사람이 다투려고 하면 피하고 맙니다. '저렇게 복잡하게 스트레스 받고, 그럴 필요가 있나?' 하며 피합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이 불안한 사람은 가서 이 사람과도 다투고 저 사람과 다투고 자꾸 트러블을 만듭니다. 교회도 가만히 보면 조용한 교회를 시끄럽게 바꾸고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그 가정에 평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해야 하고, 하나님과 화평하려면 죄의 용서함을 받아야만 됩니다.
욥기 22:21에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죄와 마귀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평화의 왕으로 모시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며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급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습니다. 그런데 처마는 좁고 사람이 많아 겨우 서있는 처지였습니다. 갑자기 어느 아주머니가 사람들을 밀치며 끼여드는 바람에 맨 끝에 있던 젊은이가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하는 수 없이 비를 맞으며 길을 가려고 했습니다. 그때 처마 밑에 있던 한 사람이 “여보게, 인생은 다 그런 거라네”하며 위로했습니다. 젊은이는 아무 말 없이 돌아섰습니다. 잠시 후 그 젊은이가 여러 개의 우산을 사 가지고 와서 처마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말을 건넨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이 다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구체적 사랑의 실천에 대하여 성경은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 예수님은 형제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분노는 마귀가 틈을 타는 기회를 주고(엡4:26-27), 살인을 가져오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이에게 관용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할 때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가 화목하고 평안합니다. 또한 양보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평화를 위해 좋은 환경을 조카 롯에게 양보했습니다. 이삭도 평화를 위해 블레셋 사람에게 우물을 양보했습니다. 양보와 타협 없이는 평화의 공동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셋째 한국교회가 먼저 화목의 본이 돼야 합니다. 남북 화해와 지역 갈등 해소를 위해 기도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갈등과 대립 속에서 불화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남북 화해와 통일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한국교회가 지금까지 하나 되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넷째, 화목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은 시기와 미움, 싸움과 분열이 사라지고 평화의 세계가 이뤄집니다. 평화의 복음을 이민족의 가슴마다에 심읍시다. 아직도 냉기가 돌고 있는 저 북한에 하루 빨리 평화의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되도록 기도합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肉饍)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17:1)
이밖에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은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골1:20-22),
2) 말씀으로(시85:8), 3) 온유함으로(시37:11), 4) 소금으로(막9:50), 5)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함으로(벧전3:8), 6)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함으로(벧전3:8), 7) 복을 빌어줌으로(벧전3:9), 8) 선을 행함으로(벧전3:10-12) 입니다.
'서로 화목케 하는 삶'이 얼마나 복된가 하는 사실을 보십시다. 잠언 10장 12절은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7절에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하면서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모두가 죄 있는 사람인데 사랑하면 죄를 덮어버립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면 죄를 드러내게 됩니다. 잠언 15장 16-18절에 보게 되면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간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17장 9절에 보면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허물이 있어도 덮어주고, 사랑 없는 사람은 자꾸 그것을 드러내서 결국 이간시켜 버린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 자식은 희망 없는 자식이고 망나니야"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 아들을 그렇게 희망 없는 망나니로 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달라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어머니에게는 사랑이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다른 세상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없으니까 그 사람이 망나니에 희망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만 어머니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잠언 18장 6-9절에는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남의 말'은 무엇을 말할까요? 남의 좋은 것을 말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경험을 보면 어떻습니까? 말하는 중에 남의 좋은 말, 칭찬하는 말, 성공하는 말을 많이 합니까? 아니면 남 흉보는 말, 잘 안 되는 말, 못된 말들을 많이 합니까? 양심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칭찬하는 말, 성공하는 말, 좋은 말하는 것이 듣기가 좋습니까, 아니면 남 흉보는 말이 듣기가 좋습니까? 이상한 일입니다. 인간 성품이 타락한 다음부터는 남 훌륭한 일, 잘되는 일, 성공한 일을 말하게 되면 그저 "그래, 그래" 하다가도 남 흉보는 말, 남 망했다는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깨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남의 흉을 보고 헐뜯는 이야기는 별식(別食)과 같아서 귀가 솔깃해져 흥미 있게 듣는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합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선전을 합니다. 그대로만 선전합니까? 거기에 붙여서 전하니까 처음 말하는 것과 나중에 말하는 것이 아주 다른 말이 되어 버립니다.
잠언 20장 3절에서는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했고, 잠언 25장 8절에는 "너는 급거히 나가서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수욕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고 했습니다. 다툼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서로 사랑하며 화평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에게 꾀임을 받아 범죄한 이래 사랑대신 미움이, 화목대신 싸움이 인간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위로 하나님과 화평하고 옆으로는 이웃과 화목 되는 종교입니다. 본문 1절에도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서도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부탁하셨을 뿐만 아니라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4)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제가 화목하지 않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뜻을 받아서 에베소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메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로마서 12장 18절에 보아도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화목의 결과는 어떠합니까?
1. 삶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이웃과 화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아름답습니다.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를 나타낸 걸 표시할 때 아름다움이 생깁니다. 색깔도 그렇습니다. 무지개가 왜 아름답습니까? 일곱 가지 색깔이 조화를 이루어서 아름다운 겁니다. 빨주노초파남보. 이 색깔이 조화를 이루니까 아름답습니다. 조화를 무시하고 새빨간 색깔만 보십시오. 무지개가 노란 색깔로만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별 모양이 없을 겁니다. 조화된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유명한 화가가 되기를 원하는 몇 명의 소년들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방문 했습니다. 그는 아주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소년이 화판 더미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예민한 그의 작업이 방해를 받아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는 붓을 집어던지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년에게 화를 내며 심하게 꾸짖었습니다. 소년은 울면서 화실 밖으로 뛰어나갔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다시 붓을 들고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시켜 보려고 애썼지만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창조성과 영감은 화를 낸 후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는 울고 있는 소년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미안하구나 내 말이 너무 지나쳤다 나를 용서해다오 나는 너보다 더 잘못했구나 너는 그저 화판에 걸려 넘어진 것뿐인데 나는 공연히 화를 내어 나의 생명 안에 흘러드는 하나님의 영감을 막았구나 나와 함께 다시 화실로 들어가지 않겠니?" 그런 후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16:7)
2. 하나님과 가깝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즐거움을 누립니다.(엡2: 14- 17)
" 이 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3. 의의 열매를 거두고, 복이 있습니다.(롬14:19)
예수님은 산상보훈인 마태복음 5장 9절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8)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이유는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살게 하려고 하신 까닭입니다. 성도 상호간, 형제간, 부부간, 모든 사람에게 혹시 서로 서운한 감정이나 나쁜 생각이 있다면 먼저 화해를 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길 원하십니다.
시편 34편 19절은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 지어다”라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찾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화목하게 하는 자들이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화평의 복음을 통해 수직적 화평,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아주 중요한 화평입니다. 기본적인 화평입니다. 또한 화평의 복음을 통해 수평적 화평, 이웃과의 평화를 이루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화목을 누리고, 화평을 전하기에 힘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서로 화목하라고 말씀하신 주님,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소망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분노의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평화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옵니다. 우리가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http://allcome.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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