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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만난 예수(눅 5: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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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예수(누가복음 5: 3-11) 

누가복음 5장 3절부터 11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내가 만난 예수』 바꾸어 말하면 "내가 체험한 예수", "내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예수"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기록한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만난 예수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아무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배운 것도 없는 사람이요, 가진 것도 없고 또 가문에 이렇다 할 만한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를 만나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남' 이라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오래 오래 살면서 터득한 원리를 속담으로 우리들에게 전해 주는 것이 많습니다. 이 속담을 잘 살펴보면 참 좋은 진리가 그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중에 '이웃사촌'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촌도 일년 이년 안 만나다 보면 참 서먹서먹합니다. 그러나 이웃은 하루에 열두 번도 만납니다. 그러다 보면 정들고 궂은 일이 있으면 도와주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즐거워하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함께 울어 줍니다. 그래서 이웃이 참 좋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지간에도 자꾸 만나야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고 예수님을 머리로 믿는 사색적인 신앙, 관념적으로 믿는 신앙, 이것은 어디에도 내 놓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도, 예수님의 축복도, 혹은 능력도 체험할 때에 예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하는 새로운 면을 깊이 알게 됩니다. 또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정이 듭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질 좋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던 사건을 이 천년 전의 이야기로만 돌리지 마시고 베드로를 이 시간 각자 '나' 로 바꾸어서 "내가 만난 예수"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할 예수" 라는 내용으로 생각하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I. 나에게 요청하시는 예수(3절)

첫째, 먼저 바치라(3절 상반절)

베드로를 찾아오신 예수님, 오늘날 내가 만난 예수님은 먼저 바치라고 요청하십니다.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따릅니다. 예수는 게네사렛 호수가에 서서 호수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3절 상반절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이 말씀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고 계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바닷가 언덕에 앉혀 놓고, 예수님께서는 좀 떨어져서 바닷가에 대어둔 배에 오르셔서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배에 오르고 보니 시몬 베드로의 배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는 "이 배를 내 놓으라" 는 뜻이 있습니다. 즉 내가 필요하니 써야겠다는 뜻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심정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자기 평생에 이런 실패를 해 본 일이 없다 할 정도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입니다. 기분이 전혀 내키지 않았을 때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찾아 오셨으면 축복하신 후 마음의 여유가 생긴 다음에 바치라고 요청했다면 무척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 되신 주께서 축복은 가지고 오셨지만 내놓지는 않으시고 베드로가 가장 아끼고 없으면 못 사는 것, 누구에게 줄 수도 없고 빌려주기 곤란한 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기분으로 보아 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 베드로가 "아니오" 라고 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 라고 대답하여 마음대로 쓰시도록 내어 드렸습니다. 즉 바쳤습니다.

이것을 보면 믿음 생활은 기분 내키는 대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기분은 "아니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원하시면 언제나 '예' 할 것뿐이지 '아니오' 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축복이 다급한 줄 아십니다. 하지만 '축복 받기 전에 먼저 바치라. 가장 아끼고 귀하고 감춰 둔 것을 바치라. 내가 먼저 써야 되겠다' 고 하십니다. 이럴 때에 기분이 내키지 않겠지요. 그러나 '아니오' 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믿음에는 "아니오" 가없어야 합니다. 항상 '예' 뿐이어야 합니다. 축복 받기 전에 먼저 바칩시다.


둘째, 먼저 봉사하라(3절 중반절)

축복 받기 전에 먼저 봉사하라고 요청하십니다. 3절 중반절에 "육지에서 조금 띄우기를 청하시고"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봉사를 요청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요청은 먼저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밤새도록 고기잡이했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당장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집에 들어가야 되는 입장이지만 베드로에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또 밤새도록 고기잡이 한 까닭에 한 잠도 못 잤으니 잠자는 것도 급하고 아침 먹는 것도 급합니다. 이런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배를 좀 띄어 달라고 요청하셨습니다. 베드로의 노 젓는 기술, 하찮은 기술을 요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이런 기술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곳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위치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곳까지 원하시는 방법대로 먼저 봉사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봉사를 원하십니다.


셋째, 먼저 은혜 받으라(3절 하반절)

주님은 세상 적인 축복을 받기 전에 먼저 은혜 받으라고 요청하십니다. 3절 하반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즉 주님은 배 위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또 베드로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고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보다 우선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주님은 백성들을 향해서 가르치기만 합니다. 이 때 베드로가 그 말씀을 통해서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배고픈 것도 가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못 받고 다른 축복을 먼저 받으면 모두 자기 머리가 비상하고 재간이 훌륭해서 잘된 줄 알고 거만하고 도도해지게 됩니다. 먼저 말씀의 은혜를 받고 다음에 다른 축복을 받으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요, 덕분인 줄 알고 감사하며, 겸손해 집니다. 세상의 다른 것을 받기 전에 주님께서는 먼저 은혜부터 받으라고 요청하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요청하시는 예수님은 '축복 받기 전에 먼저 바치라, 그리고 두 번째 축복 받기 전에 먼저 봉사하라, 세 번째는 축복 받기 전에 먼저 은혜부터 받으라' 고 요청하십니다. 꼭 마음 속에 새겨 두어야 할 일입니다.


II. 나를 지켜보시는 예수(4-9절)

첫째, 말씀대로 사는가(4-6절)

다음은 말씀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를 지켜보신다는 것입니다. 4절에서 6절까지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을 찢어지는 지라."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가르치실 때 베드로는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지 못 받고 있는지는 주님이 먼저 아십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지금까지 밤에 고기를 잡았고 좀 얕은 곳에서 잡았습니다. 아주 깊은 곳에서는 잡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말씀의 은혜를 받은 베드로에게 한낮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고 명했습니다. 베드로의 경험과는 정반대의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씀대로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감당을 못할 정도로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때까지 현장에 서서 베드로를 지켜보셨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명심할 것은 먼저 말씀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받은 후에 순종하려면 영원히 순종할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은 주님은 말씀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를 여러분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일주일 동안 지켜보신다는 것으로 이해 하셔야 합니다. 그 말씀대로 살면 되고 그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 본문의 교훈입니다.


둘째, 어떻게 쓰는가(7절)

둘째로 씀씀이를 지켜보신다는 말입니다. 7절에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가만히 지켜 본 결과 말씀대로 살아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도 주님은 가시지 않고 여전히 또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엄청나게 축복 받은 것을 어떻게 쓰는가를 지켜보신다는 뜻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자기의 동업자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습니다. 도와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물이 더 찢어지기 전에 빨리 네 배에 퍼 담으라는 것입니다. 즉 너도 갖고 나도 갖고,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먹고 나도 먹자는 것입니다. 함께 살자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지켜보니 그 자세가 너무도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망하는데 나만 잘 살게 되어 있질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큰 사업을 벌여 물건을 많이 만들어 냈을 때 다른 사람이 다 망하면 내 물건을 사 줄 사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함께 망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네가 잘 될 때 내 물건을 사줘서 나도 잘 되는 것이요, 내가 잘 될 때 너도 잘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원리는 다 함께 잘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더불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엄청나게 감당 못할 정도로 축복을 해 주셨는데 나 혼자 먹고살려고 했다면 그물을 다 찢어져 오히려 손해보고 잡았던 고기마저 다 놓쳐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살자는 그 자세가 너무나 훌륭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받은 축복이 크든 작든 혹은 많든 적든 우리가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을 주님이 꼭 지켜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쓰면 더 크게 주고 더 많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과 아랑곳없이 써버리면 주님이 또 주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아봅니다. 여러분의 씀씀이를 지켜보시는 예수님께서 좋은 여기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어떤 자세인가(8-9절)

예수님은 우리의 자세가 어떤가 지켜보십니다. 8절에서 9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세배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씀씀이를 보시고 저 사람은 물고기 축복으로 끝날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키우면 세계에 내놓을 인물이 되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베드로는 무식했을지라도 통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베드로를 지켜보셨습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나오자마자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립니다. 이 엎드리는 자세가 얼마나 훌륭합니까?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다가 출세를 했거나 혹은 돈 좀 벌면 어떻게나 거만해지고 거드름을 피우는지 차마 그 꼴을 볼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다가 성공했을 때 교만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주님 앞에 나오자 마자 무릎 꿇고 엎드렸습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때가 언제입니까? 모두 실패하고 망했을 때,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실패했을 때입니까, 성공했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평생에 이렇게 성공할 수 없었다 할 정도로 성공했을 때에 그랬습니다. 그래서 더 훌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이 올라 갈수록, 크게 될수록, 많은 것을 받았을 때 엎드리는 자세,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의 부족함과 나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이 자세를 가질 때에 믿음의 뿌리가 깊이 내립니다. 나는 죄가 없다 할 때에는 믿음이 설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출발하고 열매 맺어 꽃이 핍니다. 베드로는 평생에 세 마디를 고백하지 않습니까? 첫 마디가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이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우고 난 다음에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고 물으셨을 때 "주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두 번째 고백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부활하신 다음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도 죽을 때까지 꼭 해야 하는 고백입니다. 본문에 베드로가 한 고백이 바로 그 것 입니다. 훌륭한 믿음의 자세, 즉 엎드리는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공하고 잘 된 다음에 우리들의 태도와 자세를 주님이 꼭 지켜보십니다. 거만하고 도도하면 버림받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엎드리고 겸손하여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자세로 낮아져야 합니다. 여기에 믿음의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III. 나를 나 되게 하시는 예수(10절 하반절-11절)


첫째, 댈 줄 아는 사람(10-11절 상반절)

10절 하반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마태복음에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되리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되리라 하는 말씀이 없으면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무엇인가 되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이 되느냐 하면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나로 나되게 하십니다.

11절 상반절의 "배들을 육지에 대고" 라는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 라고 하는 인생을 예수님 앞에 배를 대듯이 갔다 대어야 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인생이나 자기의 가정을 예수님 앞에 대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이상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또 베드로는 자기의 사업을 그리고 자기의 성공을 예수께 갖다 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이렇게 자기의 인생을 댈 줄 아는 사람은 인생 중에 최고입니다. 가장 훌륭히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석가에게 대는 사람도 있고 공자에게 대는 사람도 있으나 예수께 댄 베드로가 가장 훌륭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둘째, 버릴 줄 아는 사람(11절 중반절)

베드로는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11절 중반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여러 해 전에 국민학교 5학년 된 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여름성경학교를 마치고 선생님들과 여주에 있는 강가 모래사장에 갔는데, 그렇게 씩씩하고 활달하게 잘 뛰어 놀던 아이가 하루 종일 축 늘어지고 기분이 좋지 않고 말도 잘 안하고 놀지도 않습니다. 그러는 이유를 집에 돌아와서 알았는데 삼일 전부터 볼 일을 못 봐서 그렇다고 합니다. 조금 있다가 볼 일을 보고 왔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기분이 좋아서 먹을 것 내놓으라는 등 뛰어 놀고 야단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먼저 받아야 됩니다. 즉 먹어야 되고 마셔야 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지 못하면 죽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편으로는 자꾸 버려야 됩니다.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처럼, 버리지 못해도 죽습니다. 가정집에 상수도가 있습니다. 틀어 놓으면 나오기만 합니다. 그러나 버리는 곳이 없으면 그 집은 난리가 납니다. 반드시 버리는 하수도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믿음도 먼저 받아야 됩니다. 은혜도 받아야 되고 능력도 받아야 되고 축복도 받아야 되고…, 그러나 믿음의 찌꺼기라고 하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죽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버릴 줄 아는 사람이 참 위대한 사람, 훌륭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버릴 것을 버릴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끊을 것을 끊고, 버릴 것을 버리고, 해결할 것을 해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버리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 닮아 가는 사람(11절 하반절)

그 다음에 베드로는 예수를 닮아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1절 하반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예수를 좇으니라." 버릴 것은 버린 다음에 예수를 좇았다는 것입니다. 좇는다는 말은 닮는다는 뜻을 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는다 혹은 잘못 믿는다 할 때 표준을 어디에 두겠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서 깜짝 놀라는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주일 낮 시간 결석자가 재석수에 절반이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교회가 1,000명이 모일 때까지만 해도 낮 시간이나 저녁 시간에 모이는 숫자의 거의 비슷했습니다. 낮에도 1,000명, 저녁에도 1,000명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저녁예배에 결석자가 왜 그렇게 많습니까? 그것은 '일주일동안 세상에 나가 살다가 한 시간 나와 예배만 드려 줘도 하나님 고맙게 생각하시오.' 그 뜻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나가서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전혀 구별 없이 살아갑니다. 주일날 나와서 한 시간 예배드리면 할 일을 다한 것으로 착각합니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믿어서야 우리가 어느 세월에 제 구실을 하겠습니까? 학생이면 학교에 열심히 나가야 합니다. 학과에 충실해야만 실력이 향상됩니다. 그래야 비로소 제 구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믿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워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을 닮았느냐는 것이 신앙의 표준입니다. 베드로가 저렇게 위대해지고 훌륭해진 것은 예수님을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을 많이 닮을수록 질 좋은 믿음이요, 우리의 인생이 예수님을 많이 닮을수록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써도 이런 사람을 쓰시는 것이고, 이런 사람이 또한 큰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많이 모이느냐는 것도 귀하지만 베드로 같은 인물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계속 닮아간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베드로만큼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없다 할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님을 닮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먼저 바치라, 먼저 봉사하라, 먼저 은혜 받으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가, 축복으로 받은 것을 어떻게 쓰는가, 또 성공한 후에는 자세가 어떠한가를 지켜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댈 줄 아는 사람, 버릴 줄 아는 사람, 예수 닮아 가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교회에서 베드로 같은 일꾼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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