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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 (마 11:2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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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은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의 주제 역시 구원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셨으면 그 같은 희생을 감수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4)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눅 15:) 이 비유 끝에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무엇이길래 이처럼 대우하시는 것일까요? 생각할수록 감격할 뿐입니다.

이제 죄인들이 할 일은 하나님의 구원의 초대에 기꺼이 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초대에 모든 사람이 호응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마 22:)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었으니 얼마나 화려하고 풍성하게 차렸겠습니까? 그런데 희한한 일입니다. 잔치에 정식으로 초청 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했습니다. 임금은 최고의 격식을 갖추어서 미리 초대장을 발부했을 뿐 아니라, 잔치 시간에 맞추어 종들을 보내 그 청한 사람들을 모셔오게 했는데도 그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는 잔치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일에 바빠서 임금의 초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더 괴이한 것은 어떤 자들은 임금이 보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에 임금이 노해서 군대를 보내 그 살인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살랐습니다. 그런 다음, 임금이 종들을 불러 말하기를 잔치에 청한 사람들이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이에 종들이 길에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를 막론하고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왔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임금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임금의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종들은 선지자들을, 초대받은 자들은 선민이라고 자부하던 유대인들, 그 가운데서도 종교 지도자들을 의미합니다. 길거리에서 마구 데려온 자들은 세리나 창기나 죄인들을 말합니다.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는 곧 구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구세주를 보내실 것을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보내심을 받고 와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귀신 들렸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는데도 냉랭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자 그들은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고 비난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대합니다. 하나는, 임금의 초대를 받을 만큼 신분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 곧 유대 사회의 귀족들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과 바리새인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또 하나는 비천한 백성들과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전자는 스스로 의롭고 부하고 지혜롭고 잘났다고 자부하는 자들이고, 후자는 스스로 불의하고 가난하고 미련하고 못났다고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의 잔치에 참석하는 데는 선한 자나 악한 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혹 보면, 지금은 너무 죄가 많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으나 나중에 좀 착해지면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는 그런 사람들은 잔치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인즉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면 구태여 예수 믿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 의롭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합니다. 우선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므로 구세주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 같은 반발은 도덕적으로 깨끗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심합니다.

또 한 가지 그들이 기독교를 싫어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처한 비참한 실상은 기독교처럼 분명하지는 않지만 타종교들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을 전적으로 무능한 존재로 여기는데 반해서 세상 종교들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만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힌두교에서 고행을 하는 이유는 고행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제어해서 업보를 쌓지 않음으로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함입니다.

또 그들은 명상을 통해서 그들의 신들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곧 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불교는 부처를 신처럼 숭배하고 마치 전지전능한 존재인양 주장하지만, 원래 불교는 신을 믿지 않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부처가 되어야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스스로의 노력과 수행을 통해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다보니 힌두교도들 가운데는 수백리 길을 땅바닥을 기어서 성지 순례를 나서는가 하면, 불교에서는 수년 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지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한 저들의 몸부림은 처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닥에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교만이 깔려 있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진리는 구원은 사람들이 고안해 낸 방법으로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편은 인간들이지만 인간들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명상을 하고 고행을 하고 자기의 가진 모든 것으로 적선할지라도 그런 행위로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실상을 이같이 말씀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분명히 선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선이 아닐뿐더러 선으로 위장한 악에 불과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인간의 기준은 지극히 보잘것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곧은 자에 비유한다면 인간의 기준은 비뚤어진 막대기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기준은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의로운 자로 자처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율법을 완전무결하게 지키노라고 자부했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 자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바리새인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율법은 마치 밝게 비추는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의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는 거울이 우리의 얼굴에 묻은 오물을 없애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했기에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한 자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겸손한 자라야 믿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복음을 배척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나사렛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 너무나 어리석게 보입니다. 자기 한 몸도 구원하지 못한 사람을 어떻게 메시야로 믿으란 말이냐고 반문합니다.

그들은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서 제외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 곧 교만한 자들이 구원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숨기셨기 때문이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 곧 겸손한 자들이 구원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에 관한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주권적인 뜻에 의해서 우리 각자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구원은 우리 각자가 원해서 받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탁월한 지혜와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종교와 철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실력이 있어서 난해한 종교 이론이나 심오한 철학을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같은 지식과 능력이 나사렛 예수가 누구신지를 이해하는 데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장 18절로 25절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8)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20)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렇습니다. 지혜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가하면, 이 세상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보면 세상 지혜는 미련하게 보이고, 세상 지혜를 가지고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미련하게 보입니다. 따라서 이 둘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의 주체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법에 의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타 종교인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느냐고 반발하지만, 이는 교회가 의논해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기독교 내부에도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신학 교수도 있고 목회자도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에는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깊이 침투해서 타종교와 교류하는 것을 자랑스레 진행하고 있습니다. 신부가 절간에 가서 강론을 하고 스님이 성당에 와서 설법을 하고, 비구니와 수녀가 함께 모여서 찬송가와 찬불가를 부르고, 교제를 나눕니다.

추기경이 방송 프로에 나와서 불교나 무속이나 기독교나 할 것 없이 진실되이 믿으면 다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자 청중이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같은 모습을 보고 “천주교와 불교는 포용력이 있다. 역시 깬 사람들은 다르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신문과 방송이 앞 다투어 보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구원은 사람들의 다수결에 의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지지한다고 해서 구원의 길이 변경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들은 초대교회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소위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되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서는 구원 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당시에 이 율법주의는 유대인 신자들 사이에서 대단한 호응을 얻어서 복음의 진리를 위협하는 이단이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6)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사도가 이처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구원은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주님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 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죄인들의 구주로 세우신 이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사렛 예수만 구주로 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6)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십니다. 처음 가는 곳일지라도 도로 표지판이 지시하는 대로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지만, 표지판을 무시하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가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말 것입니다. 혹 서울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어도 천국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을 뵌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눈으로 뵐 수 없으시며, 거룩하신 신이시므로 하나님을 뵙고 살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4절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고, 그 18절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고 했을 적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 14:)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실 뿐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셔서 탄생하신 완전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인성과 신성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는 우리와 한 형제가 되심과 동시에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는 주님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 것은 우리 인생들을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사장의 중보를 필요로 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일은 제사장의 손을 빌려서만 가능했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보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무엇인지 일깨워 줍니다. 중보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어야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우리의 공로로 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며 순전히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잘나고 지혜있는 사람들만 구원하신다면 못나고 미련한 사람들은 소망이 없었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잘나고 능력있고 지혜로운 사람들을 버리시고 오히려 못나고 무능하고 미련한 우리를 부르시고 마음을 열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성도들을 통해서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택하시고 불러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심으로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삶을 영위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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