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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요 2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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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공생애에 있어서 대표적인 두 지역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유구한 역사동안(BC 1050-지금까지 2050동안) 수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이 곳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습니다. 왕들이 있었고, 제사장들과 학자들, 장군들..... 무릇 시대 시대마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다 모여서 살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도시에 대하여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하셨습니다. 오히려 이 도시를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름 하나는 근사하였지요.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은 평강이시다/ 평화가 충만한 도성/ 평화의 도성’ 얼마나 좋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 도시를 바라보시면서 소리 높여 우셨습니다.(눅19:41-44)
그리고 이름은 ‘평화의 도성’이지만 내용은 정반대로 미움과 갈등과 외식과 억울한 죽음이 방치되고 있는 음모의 도성이라고 슬퍼하셨습니다.(눅13:32-35)
결국 이 도시는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는 도시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도시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얼마나 모순된 이야기입니까? 평화의 도성이 평화의 왕(요14:27)을 사형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져 있는 도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요, 성전 자체이신 예수님을 철저히 파괴하고 허물어 버렸습니다.(요12:19-2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예루살렘 도성이 바로 우리(인류)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과분하신 사랑과 은총 속에서 살면서도 배은과 배신을 밥먹듯 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감사도 하지 않고 영화롭게도 아니 하였습니다.(롬1:20-23) 오히려 미련하고 허망하고 악하여져서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우리 인생은 소망 없는 존재,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시49:20, 롬3:10-15) 따라서 우리는 전적 무능, 전적 타락한 존재요, 영원히 죽어야 할 죄인이요, 창조주(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골고다(해골 골짜기)에서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예수님은 능력의 메시야로 권위와 권능을 공생애 동안에 보여 주셨습니다. 이제 원래의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으니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신 절대자의 모습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전능자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같았으면 골고다 해골 골짜기에다 죽이고 내 버리고 방치했던 저 예루살렘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가져야 마땅하겠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로 회복하셨습니다.(마28:18-19) 그러므로 이 신분과 권위와 권능을 갖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빌라도 총독, 헤롯왕, 대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찾아가실 수 있습니다. 가서 본 때를 보이고, 복수를 하고, 위대한 힘을 자랑해 보일 만 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불러모으거나 만나서 자신의 진정한 신분을 보여줌으로 저들이 모두 공포에 질려 졸도하거나 충격사 하도록
응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예루살렘 심장부를 찾아가지 않으시고 의외로 저 북쪽 시골 갈릴리로 향하고 계십니다. ‘해골들의 골짜기’를 의미하는 골고다를 떠나서 생명이 약동하고 용솟음치는 저 시원스러운 갈릴리를 향하여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고뇌의 겟세마네(기름을 짜다라는 뜻), 슬픔의 비아 돌로로자(슬픔의 길), 죽음의 골고다를 필수적으로 거치고 나서 마침내 새 생명이 강렬하게 솟구쳐 오르는 저 아름다운 호수 갈릴리에 도착하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참 종교요,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소망의 종교요, 은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일찍부터 십자가와 부활이 이루어지고 나면 이 곳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신 적이 있습니다.(마26:32, 28:7-10, 막16:7) 그 말씀대로 지금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이 갈릴리에서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1. 죽으셨고, 살아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다시 한 번 만나야 합니다.(1-5절)

실의에 젖어 있던 제자들이 지금 갈릴리 해변에서 ‘부활의 주님’을 직접 뵙고 있습니다.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주님과 음식을 나누고 있습니다. 진지한 만남, 완전한 만남 즉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진정한 사랑도 두 사람간의 ‘인격적인 만남’이어야 하듯이!)

인격적인 만남이란 무엇입니까?

1) 삶을 함께 가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적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실제로 이 곳 갈릴리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하고 계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십니다. 대화를 갖습니다.

2) 서로 평생 진실 되이 사랑하겠노라고 제 다짐하는 것입니다. 막연한 사랑 이해가 아닙니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결혼을 기약하는 두 젊은이가 있습니다. 규수가 남자에게 묻습니다. ‘훗날 내가 뚱뚱해져도 변함없이 사랑할 겁니까?’ 이럴 때 남자들은 대체로 우스개나 농담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여성 쪽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질문입니다. 정직하고 지지하게 이 질문에도 대답할 수 있어야 진실된 사랑이라고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이러해야 합니다. 이것이 갈릴리 사랑입니다.

3)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 사회, 교회, 가정, 개인적으로 진지한 변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야 할 절박한 상황입니다. 이대로 갈등과 대립, 불신과 증오를 키워 간다면 생명과 사랑이 자랄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지난 부활주일(04. 4. 11)에 예쁜 계란들을 나누었습니까? 계란 껍질을 깨고 그 속에서 병아리가 태어 나오는 생명의 신비, 변화의 신비를 멧세지로 나누는 행사였습니다. 제자들은 낙심과 불안과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온통 혼재된 상태에서 버려 두었던 옛 그물과 어망들을 끄집어내었습니다. 그래도 먹어야 살 수 있으니, 그리고 온갖 고뇌와 번민을 잊어버리고 싶어서 그들은 배를 띄워 고기잡이에 나섰던 중입니다. 그러나 지금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면서 진정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절망하지 않고 소망을,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용기를, 더 이상 죄책감에 눌리지 않고 자유와 해방을, 더 이상 자포자기하지 않고 소명 의식 재확인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생각하기도 싫고, 두 번 다시 찾아가기도 싫은 저 골치 아픈 도성, 머리 아픈 도시 예루살렘으로 예수 부활의 증인되고자 올라가는 위대한 변화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할렐루야)


2. 하나님 나라(교회) 봉사의 필수 사명을 재 각성하고 재 결단하는 곳입니다.(15-18)

주님과 제자들 간에 인격적인 만남의 시간이 끝나갈 즈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5,18절)”
그렇습니다. 은혜 받은 신자, 주님 만난 신자, 성령의 감동을 받은 신자는 ‘사명의 자리(단계)’로 한 걸음 나가야 합니다. 그냥 감동하고 즐기고만 있으면 안됩니다.

1) 주님은 제자(베드로)들에게 “내 어린양을 먹이라(치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세 번 거듭하여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수고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봉사하는 것입니다. 수고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꺼이 교회를 봉사합니다. 주일 학생을 키우고, 초신자, 새신자, 낙심자를 돌봅니다. 슬퍼하는 자, 병든 자, 고민하는 자를 돕습니다. 불신자를 전도합니다. 이런 일들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힘 안들이고, 돈 안들이고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 번이나 거듭하여 다짐하고 또 다짐하십니다.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내 어린양을 먹여다오” 어린양을 먹이고 돌보아야 하니 수고가 크고, 많이 참아야 하고, 울어야 하고, 나를 희생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주님은 베드로에게 ‘원치 아니하는 고난’도 각오하고 감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18절)
이것은 장차 베드로가 로마에서 전도하다가 체포당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이 일은 베드로가 일찍이 스스로 서원한 일이기도 합니다.(눅22:33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행12:5 성취됨),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위하여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 수 있다면 사실 이보다 더 값진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만난 신자는 고난의 세월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고생하고 고난 당하는 것은 힘은 들지만 가치 있고 행복합니다.(골1:24)
갈릴리는 맑고 깨끗한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에는 온갖 생명들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만나 사 신앙고백과 사랑과 사명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갈릴리는 오늘 이 곳 우리 교회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일마다 예수님을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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