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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 (마 25:31 -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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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이른 봄날 두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사람들과 늘 좋은 관계로 지내는 보통농부로
며느리가 모은 돈까지 여비로 받아 어렵게 순례길을 떠났고.
여행 중 집안 일은 잊어버리고, 만나는 누구에게도 좋은 말,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만 하고자 했으며 기쁨이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여행 중 그는 물 한 모금 마시고자 들렸던 농가에서
전염병과 흉년으로 온 가족이
굶주려 병들어 죽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되자
차마 그냥 가지 못하고 도와주다 보니 여비를 다 써버리게 되었고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가장이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식구들이 그의 행적을 물었지만, 적당히 얼버무렸는데 그가 없는 동안에 집안 일은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부유한 농부였는데 매사에 엄격하고 빈틈이라고는 없는 성품으로 순례길을 가면서도 집안 걱정으로 당장 집으로 돌아가 모든 일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성지 부활대성당에서 주님을 닮은 사람의 환상을 보았으며 귀로에 친구의 선행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1년만에 집에 돌아 왔을 때, 아들은 술에 취해 있었고
다른 집안 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는 걸 알게되었습니다.
한숨을 위며 자작나무 밑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위쪽을 쳐다보고 있는데 친구 모습이 떠오르는데 영락없이 예루살렘 대성당에서의 환상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우리 인간은 일하는 것보다
사랑과 선행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여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위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우화집에 나오는 < 두 사람 > 이란 제목의 이야기인데
이야기 속의 극히 상대적인 성품의 두 사람을 통하여
우리가 삶에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또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하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은, 물질은 넉넉하지 않지만 늘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하고
매사 즐겁게 살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며 선행으로 살아가니
삶 자체도 넉넉하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치밀하고 빈틈이 없어 재산은 모았지마는
자신의 재산만 아끼고 선행을 모르고 살다보니 삶 자체가 공허하다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두 사람을 등장시켜 비유를 통해 분명하게 우리가 살아 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는 '지금 이 순간' 이요, 가장 필요한 사람은 '지금 당신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 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 지금 다른 사람에게 사랑과 선행을 베푸는 일'이다.'

성경을 보면 그렇게 크고 대단한 일들만을 선행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극히 간단하고 쉬운 선행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나오는 양과 염소 비유에 보면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는 것"
이것이 천국을 상속할 만한 선행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내가 서야할 자리를 바로 알아서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 즉 천국의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양과 염소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말할까요?

마25장에는 세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1) 열처녀 비유 2) 달란트 비유 3)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가 하면
마24:에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
세상 끝에는 심판이 있는데
그 심판 때에 심판의 기준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하는 뜻에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심판의 때를 잘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마치 학생이 평소에 공부하는 것은 시험 때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준비하지 아니한 학생이 시험에 합격할 수 없듯이
평소에 신앙준비 하지 아니한 성도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칭찬과 상급을 받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그런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냐?
1) 열처녀 비유에서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같이 등불에 기름 준비되었느냐?
즉 성령의 은혜를 받았느냐? 그렇지 아니하냐?
그러니 평소에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성도와 그렇지 않은 성도는
심판대 앞에서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2) 달란트 비유에서는 맡겨진 일에 충성했느냐? 게으름 피웠느냐? 입니다.
성경은 은사를 받지 못한 성도는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달란트 심판은 그 누구도 변명이 안통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3) 양과 염소의 심판은 바로 사랑의 봉사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얼마나 형제를 사랑하고 얼마나 불쌍한 사람 도와 주었느냐?

다시 한 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가 아닙니다. 천국 가서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 내 가슴이 성령의 은혜로 뜨겁습니까?
지금 내 맡은 일에 충성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누굴 사랑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여기에 아멘이 나온다면 그는 합격이요
유구무언이라면 그는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님은 사랑과 선행을 베푼 사람을 오른편 양으로
그렇지 아니한 사람을 왼편 염소로 구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양과 염소의 특성 때문입니다.
유목민에게 있어서 양과 염소는 다 중요한 가축 동물입니다.
양은 고기와 젖과 가죽을 주고 염소도 고기와 가죽을 줍니다.
그러나 같은 가축이지만 구별하는 것은 바로 양과 염소의 기질 때문입니다. 양은 온순한 반면 염소는 고집이 셉니다.
즉 양은 목자의 말을 잘 듣지만
염소는 평소에는 말을 잘 듣다가 뿔나면 염소 고집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른편 양은 바로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교인의 비유입니다.
반대로 왼편 염소는 주님의 말씀보다 자기 고집대로 믿는 교인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어릴 때 큰아버지 집이 산에서 염소를 키우며 살았어요
명절이면 온 집안이 다 산에 큰집에 모였는데
염소를 경상도 사투리로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 얌셍이
제가 물었어요
[ 큰아버지, 왜 염소를 얌생이라 해요 ] 하니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염소와 양이 다른 점이 염소는 수염이 있어요
그래서 하는 말이
[ 한 것도 없으며 수염 치겨 들고 에헴 하며 잘난체 하니 그렇지 ] 해요
한 것도 없이 에헴 하는 얌생이 같은 교인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른편 양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인 것입니다.
왜 오른편 양이 되라고 할까요?
오른편 양은 바로 하나님의 복받을 자의 별명으로서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는 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기 예수님으로부터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 하는 말씀을 듣는다면 얼마나 감격스럽게습니가?
얼마나 잘했으면 예수께서 이러한 말씀을 했겠습니까?
가끔 우리 권사님이 그럽니다.
[ 목사님 목사님, 부엌에 일하는 교인들 칭찬 좀 해 주이소 ]
[ 내가 칭찬한다고 뭐 대단한 말입니까? ] 하니
[ 목사님 그래도 안 그렇습니다. 목사님 칭찬하면 다 좋아해요 ]
그러고 보니 나도 대단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 중에 누구를 소개하면서
[ 이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한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 이 사람은 사기칠 사람이니 조심하십시오.
돈을 떼어먹는 사람이니 조심하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아서
그 복을 자식들에게 상속시킬 수 있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못된 짓 한 자는 저주가 3~4대까지 내려가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자는 수천 대까지 복이 내려간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복 받을 사람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오른편 양같은 교인이 어떤 복을 받을 사람입니까?

1) 31절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앉는 자들입니다.
[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
주님의 영광의 보좌에 함께 앉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자리에서 앉아 살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지 못한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2) 오른편에서는 복입니다.
성경에 오른 편은 항상 하나님의 편이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는 엄청난 축복을 받습니다.
창48장에 요셉이 야곱의 축복을 받기 위해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갔는데 야곱은 손을 엇갈리게 해서 오른 손은 차남인 에브라임에게, 왼손은 장자인 므낫세에게 놓고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깜짝 놀란 요셉이
[ 아버지 오른손은 큰아들에게 놓고 왼손은 작은아들에게 놓고 기도해 주십시오. ] 하고 말했더니
야곱은 [ 나도 알고 있다.
작은아들이 오른손의 축복을 받게 되어 있다. ] 라고 합니다.
그러니 오른편의 축복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그러니 항상 주님의 오른편에 서기 바랍니다. 축복의 자리에 서기를

3) 하나님의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예비된 나라가 어디입니까? 바로 천국입니다.
이 말은 천국에서 부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제가 한번은 외환은행에 돈을 바꿔러 갔는데
젊은 아주머니가 외국돈을 가지고 돈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데
외국환 직원이 어느 나라 돈인지 몰라서 고개를 꺄우뚱해요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이 돈은 유고슬라비아 돈인데 ㅇ 4개 떼고 계산해야 된다고 하니
돈 바꾸러 온 아주머니가 예~? 하면서 얼굴이 울상이 되요.
어떤 외국인이 가게에 와서 10달러 짜리 물건을 사면서
무려 공이 6개가 달린 외국돈을 내 미는데
자기 생각에 아~ 이 사람이 한국실정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싶어
얼른 90불을 내어 주었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유고 돈 100만원은 우리돈 100원 가치 밖에 없어요.
그러니 돈을 스레기 통에 던져 버리고
[ 왠지 좀 이상하다 했다 ] 하며 투덜거리며 나가요.
이 땅에서도 이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이 안 통하는 나라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의 물질은
유고 돈에 붙은 0과 같습니다.
천국에서는 그 영이 많다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서 이 땅에 부자라고 천국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부자는 바로 오른편 양같은 성도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받을 성도는 예비된 주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 했습니다.
주님의 나라는 모자람이 없는 나라입니다.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나라입니다.
이보다 더 귀하고 중한 것은 영원한 나라라는 사실입니다.
있다가 없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좋은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주님의의 나라를 상속받는 복 받을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럼 오른편 양이 어떻게 이런 복을 받을수 있었습니까? <6>

사실 오른편 양이
어떤 굉장한 역사를 이루고 굉장한 업적을 남긴 것 아닙니다.
35-36절에 보니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오른편 양이 하는 말이 37절에
[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렇게 하였나이까?
나는 주님에게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요 ] 하니
40절에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고 합니다.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절실히 요구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문제가 많고 무가치한 자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기초해 볼 때 이런 분들을 돕는 것이
곧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순장님 가운데는 영육간에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을 가장 소중한 사명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분들이 많아요.
사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예친원들을 섬기시는 순장님들은
많은 희생과 아픔을 감당하고, 남모르는 탄식과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자기 삶 전체를 쏟아 주님과 예친원들을 섬긴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희생과 아픔과 가난만 남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순장 생활 20년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도 합니다. 순장사역은 그만큼 희생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적당히 챙길 것들을 챙겨가며 사역하는 순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땅에 부자 보다
예비된 나라의 상속자 즉 천국의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물 한그릇으로도
내가 진정한 저들의 참된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선교사 메이불 쇼(Mable Shaw) 여사가 선교지에서
아프리카의 반투족 주일하교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 대추장님의 이름으로 남에게 물 한 그릇을 주면 하나님이 꼭 기억하신단다. ] 반투족 어린이들은 예수님을 대추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며칠 후 쇼 선교사는 감동적인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낯선 나그네 한 무리가 마을 어귀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길거리에 주저앉았습니다.
그 때 물동이를 머리에 인 이 마을 어린이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아이들은 나그네들 옆에 꿇어앉아 물그릇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 우리는 대추장님 이름으로 이 물을 가져왔습니다. ]
나그네들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감지덕지하며 물을 받아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아이들은 빈 물동이를 들고 달려와서 쇼 선교사를 향해 외쳤습니다. [ 선교사님 ~! 우리가요 대추장님 이름으로 물을 주었어요.]
아프리카의 토인들은 같은 종족이 아니면 경계하고 심지어 적대시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나그네들이 이 어린이들을 만나지 못했으면
물을 얻어먹기는커녕 마을에서 쫓겨났을 것입니다.
반투족 어린이들의 단순한 행위가 그 나그네들에게는
친절을 뛰어 넘어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물 한 그릇의 친절이야말로 나그네들에게는 어떤 명 설교보다도 대추장 되신 예수님을 더 잘 소개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행은 결코 크고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간단하고 쉬운 일들입니다
물 한그릇, 밥 한그릇, 옷 한벌, 따뜻한 위로 한마디가
바로 우리가 저희를 도우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나를 천국부자로 만든다는 사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 다음 정반대의 왼편 염소 비유가 나옵니다.

주님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 이 저주를 받은 자들아 - 받을 자가 아니고 이미 받은 자입니다.
나를 떠나 마귀와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
[ 예~!? ]
[ 왜?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고 병들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냐? ]
[ 예이, 주님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는 모양인데
우리가 언제 임금님에게 그렇게 하지 아니했습니까? ]
[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러니 이 얌생이들을 영벌에 처하라 ] 고 합니다.
염소가 받은 벌 영영한 불이 무엇이고, 영벌이 무엇입니까?
영벌이란 영원한 형벌 즉 지옥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물 한그릇 떠 준 것이
천국의 상속자가 될 수 있고
어떻게 지극히 작은 자에게 밥 한그릇 한 주었다고 지옥에 가야 하나?
성경은 분명히 예수 믿음으로 천국간다고 했는데
그럼 선행을 베풀어야만 천국가고
그렇지 못하면 지옥간다는 말인가?
그럼 기독교 하고 다른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프랑스 혁명때 한 성도가 왕당파로 몰려 사형 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십자가 모양의 작은 창이 있었습니다.
이 성도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후
감방의 십자가 모양 창틀에서 희미한 글씨가 발견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는 "높이" 십자가 아래는 "깊이"
오른 쪽 끝에는 "길이" 왼쪽 끝에는 "넓이"
이렇게 네 개의 낱말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와 길이와 넓이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교수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
그렇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같으면
구원받은 자로서의 행동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지요.
마치 나무가 살아있으면 싹이 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과 같이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 같으면
불쌍한 사람 보고 그냥 지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능력도 많으시고 부자이신 하나님인데
이 땅에 가난하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 그냥 두십니까?
바로 구원 받은 성도들이 복된 삶을 누리는 특권을 주시기 위하여
그리고 천국에서 부자되게 하기 위하여
이 땅에 불쌍한 사람들 두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에게 공통점 한가지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임금이 물었을 때 둘 다 자기가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지 목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긴 하지만
내용상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먼저 왜 오른편 양은 자기가 선행을 베풀고도 그렇게 한 줄 몰랐습니까?
그것은 성도의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의 미담 기사가 국민일보에 실렸습니다.
제목은 < 너무 약소한 걸 내놔서 부끄럽습니다.>
3월 22일 오후 3시 서울 종로구 신문로 구세군 대한본영 5층 회의실. 싯가 10억원 상당의 충남 아산시 배방면 공수리의 토지를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재미동포 이주영(87세) 할머니의
장학금 기증식이 있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수줍어하며 이같이 소감을 밝혔습니다.
이 할머니의 학생 돕기는 미국에서도 유명했습니다.
월 1백 52달러 짜리 단칸 아파트에 세 들어 살면서
빈깡통을 주워 팔아 매년 2명의 한국학생에게
장학금을 줘 교민사회에서는 '깡통 할머니'로 통한다고 합니다.
한번은 기자가 물었습니다.
[ 할머니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나요 ]
[ 모르겠어, 그걸 어떻게 기억해 ]
이번에 기증한 땅은 해방 후 과수원을 하려고
남편 함께 마련한 땅 2만평입니다.
이 할머니는 친척들의 반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고국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는 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요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의무라고 합니다.
이 할머니의 둘째딸 정은식씨는 구세군 사관이며
사위는 구세군 한국사령관을 역임한 장 희동씨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른편 양은 자기가 하고도 기억지 아니하는 성도입니다.
아니 당연히 한 것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억지 않습니다.

물론 왼편 염소도 자기가 안한 것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왜? 구원 받은 성도 같으면 사랑의 봉사가 몸에 베였을 건데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즉 사랑의 손길에는 무관심하다 보니
주님의 요청의 손길이 다가와도 그냥 지나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내일의 가족 여러분
나는 지금까지 어느 편에 서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무명의 아일랜드 시인이 행복의 비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참된 선이란 무엇인가? 나는 묵상 중에 물었다.
'질서'라고 법정이 대답했다. '지식'이라고 학교가 대답했다.
'지혜'라고 현자가 대답했다. '쾌락'이라고 바보가 말했다
'명예'라고 병정이 말했다. '공평'이라고 예언자가 말했다.
그때 내 심령이 슬프게 외쳤다. '아니야. 모두 틀린 대답이야."
그 순간 나의 가슴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모든 심령이 간직한 정답은 [사랑과 친절] 이 한 마디란다.'"
예수님을 보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를 알기 위해 나온 사람,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의 사명을 깨달은 사람의 심령에서 울리는 한 마디는
바로 < 사랑과 친절 >입니다.

오늘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의 비유를 통해
나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는지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선이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물 한그릇 밥 한그릇 옷 한벌 주는 것이라는 것 기억하며
섬김의 달을 보내면서
나의 신앙생활에는 그 자국이 남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따라 합시다~!
하늘나라의 부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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