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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살은 죄다 (시 1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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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이철 목사

  얼마 전에 있었던 현대 아산 정몽헌씨의 투신자살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광복 기년주일을 앞두고 우리 사회에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렇게 화려하고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여겨졌던 사람,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한 몸에 안고 살았던 그였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말할 수 없이 공허했고 남모르는 고뇌와 고민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고등교육을 받고 유학까지 했고 한 회사의 최고 경영인으로서 우리나라의 재벌이 속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하게 자살할 수 있을지 우리의 마음에 안타까움을 안겨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과 사회지도자로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은 그 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전후로 해서 우리 사회에 자살 신드롬이 마치 유행병처럼 번져가고 있는 현상입니다.

얼마 전에 카드 빚에 시달렸던 30대 주부가 자녀 3명을 아파트에서 떨어뜨린 후에 자신도 몸을 던져 자살한 사건, 개인택시 기사가 성적부진으로 목숨을 끊은 둘째 아들의 죽음을 고민하다가 아들이 죽은 지 열흘 되던 날에 아들이 자살한 4같은 장소에서 목숨을 끊었습니다. 또 40대 초반의 검찰 공무원은 오랜 업무에 대한 긴장과 박봉에 대한 두려움이 한 인생을 이렇게 무너뜨리는 구나이제는 편히 쉬고 싶다는 유서를 남겨놓고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자살 건수는 해마다 수를 더해가고 있어서 지나 해의 우리나라 자살 건수는 그 전 해 보다도 6.3%가 증가한 13055건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작년 하루 평균 36명, 시간당 1.5명꼴로 자살을 한 셈입니다. 이것이 작년의 통계니까 금년에는 이것보다 더 수치가 많아질 것 같습니다.

자살을 하는데 있어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많이 시도하지만 성공률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많다고 합니다.

남자들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반면에 여성들은 계획 없이 어설프게 하다가 실패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들이 그런 면의 치밀한 계획을 남성들에게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자살의 동기도 매우 다양합니다.

생활고를  비관해서 , 부모의 폭력 때문에 , 실현당해서 , 성폭행을 당해서 ,성적 부진 때문에 ,진학의 실패로, 실직과 파산 때문에 , 집단 따돌림인 왕따 때문에 자살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자살이 유행병처럼 번지는 때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안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일들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병리현상을 보면서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 교회밖에 없는 사람들은 소망이 없으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믿는 성도들만이라도 이런 면에 있어서 바른 생각을 가지고 충동이 올 때에 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어야 되겠기에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자살은 죄라는 사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살이 왜 죄입니까?

자살이 죄인 것에 대해서 다섯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인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도 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특히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하나님께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동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피는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에 피 채로 먹지 말고 생명은 존중히 여길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짐승의 생명이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를 받은 우리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존엄하며 하나님께서 그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존귀하게 다루시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생명을 함부로 포기한다든지 남의 생명을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엄청난 도전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참으실지 모르지만 생명권에 대한 인간의 침해는 결코 그냥 계시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로 자살은 분명한 불순종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순종해야 할 말씀을 열 가지로 요약해 놓은 십계명 가운데 여섯 번째의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인은 다른 사람 죽이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생명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자살은 하나의 살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그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성도가 되었다고 하면 자살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남을 죽이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만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선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자살은 극도의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자살을 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서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황 가운데서 나를 도우실 수 있는데 돕지 않는다고 생각을 한다든지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고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데 현재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시고 함께 하시며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저버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자기 아들을 보내서 생명을 구원해 주셨고 한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고 사람이 그 생명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생명을 하찮게 여기고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분명한 불순종 일뿐 아니라 극도의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 많이 하고 말씀도 많이 알고 전도 열심히 하며 헌금하는 등의  신앙생활을 잘한다 할지라도 자살을 한다면 우리의 모든 신앙을 무너뜨려 신앙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로 자살은 극도의 이기주의입니다.

자살은 자기만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한다면 다름 것은 할 수 있어도 자살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정몽헌씨나 그 밖의 자살을 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될 때에 자기들은 그렇게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남아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 벗어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 남아 있는 가족과 형제들, 이웃들 ,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끼칠 파장들을 생각할 때에 자살이라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에게 끼칠 것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혼자  편하려고 자살하는 것은 극도의 이기주의이며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살은 회개할 수 없는 죄입니다. 우리가 다 죄를 짓고 실수를 하지만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회개하면 하나님은 미쁘시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하나님께 회개함으로써 우리가 받았던 구원의 그 감격을 회복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회복해서 살아갈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죄를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은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면 죄 사함을 받는데 자살은 그것 자체가 죄인데 언제 회개하고 용서를 받겠습니까?

자살은 정말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자살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는지를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고 무슨 죄든지 용서를 받는다고 하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의 죄와 과거의 죄와 미래의 죄까지 다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살한 사람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었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는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면 ‘그러면 자살해도 되겠네요’ 라고 말합니다.

목사님들이 그런 어려움을 생각해서 자살하면 구원 받지 못하니까 자살하지 말라고 가장 안전하게 얘기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예수를 분명히 믿었으면 어떤 죄라도 용서를 받기에 자살했다고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 정말로 예수님을 믿었다면 자살을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살은 하나님의 생명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면 자살은 명백한 불순종이기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살은 결국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살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성경의 욥보다도 자살할 이유가 많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욥은 그 당시의 가장 큰 부자인데 하루아침에 자신의 재산을 다 파산당하고 자신의 자녀들이 한곳에서 한꺼번에 몰살을 당하고 맙니다. 그래도 살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것뿐 아니라 집에도 못가고 구더기가 몸에 가득하고 기와로 몸을 긁어야 하는 몹쓸 병이 걸렸고 평소에 그와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이 그와 멀어집니다.

그를 저주하고 심판하고 손가락질하고 옥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자기 곁에 있어 주어야 할 아내마저도 욥을 향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면서 그를 떠납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자살하지 않는 것은 오늘날 이 시대 풍조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자살하는 사람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만 욥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욥이 어떻게 합니까?

욥도 죽고 싶은 마음뿐이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보면 욥이 죽은 자가 사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하고 하나님께 사는 것에 낙이 없으니 생명을 거두어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만 자신이 목숨을 끊지는 않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욥은 생명이 자기의 것이 아닌 줄을 알았습니다.

욥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고 연약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하나님을 붙잡고 있습니다.

실낱같은 믿음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붙잡고 있습니다.

욥은 자기가 그러한 가운데서도 살아있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욥을 볼 때에 우리 믿는 성도들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그 분의 뜻을 안다고 하면 절대로 자살만큼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용서를 받아도 자살만큼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가롯유다가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베드로도 가롯유다 못지않은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가롯유다는 한 번 예수님을 팔았지만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거짓말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가롯유다의 다른 점은 가롯유다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자살하지 않았으면 베드로처럼 회복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살한 가롯유다는 회개할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베드로도 가롯유다 못지않은 죄인이지만 그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다시 찾아와서 그를 회복시켜 주시고 용서받고 주님을 부인한 것 이상으로 주님을 위해 헌신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전부 살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도 시편 기자가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드러내고 믿음의 사람으로서 무슨 일을 하려면 첫째 조건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낙심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지라도 마지막으로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이 모든 일들을 해결해 나가시고 그 마지막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이루시며 우리를 위한 소망을 준비하셨음을 알고 자신이 생명을 끊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소망이 있고 할 일을 다 하고 하나님의 위로와 상급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에 살다보면 죽고 싶을 때가 있고 자살이 떠오를 때에 생각을 바꾸어 자살이라는 말을 거꾸로 하면 ‘살자’가 된다고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어려움으로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우리 성도들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요즘 우리의 사회를 볼 때에 유행처럼 번져가는 자살 신드롬이 가장 우려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이것에 많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의 자살 싸이트에 접속하여 그곳에서 부추기는 방법으로 자살하기도 하고 하찮은 일 때문에 쉽게 자살해 버리는 사례들은 자살 신드롬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정몽헌씨가 죽고 난 후에 강원도의 어떤 노인은 비관하여 정몽헌 씨를 따라 자살을 했고 그 뒤에 계속해서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는 보도를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악한 원수 마귀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우리 자신들이 이것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하며 우리의 가족과 이웃, 교회의 성도들을 보면서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며 소극적인 사람들을 잘 보살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따르는데 10명중의 8,9명은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사전에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정몽헌씨의 경우도 전날에 가족들과 친구들과 식사를 한 것이라든지 머리를 자르고 목욕을 한 것, 얼마 전에 선친의 산소를 찾았을 때에 눈물을 보인 일들이 그러한 신호의 예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위 사람들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고 살피면 이런 것들을 예방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자살 신호는 대체로 5가지로 표현되는데 ‘내가 사라져 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더 이상 네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 ,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등의 말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고 갑작스럽게 물건을 정리하거나 옛 친구를 방문하고 주변 사람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경우 , 식사를 잘 못하거나 잠을 잘 못 이루는 경우 , 알콜이나 약물을 과다하게 복용하는 경우 , 행동이 과격해지거나 말이 없어지는 등의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또한 자살 충동을 유발한 상황적인 요소들을 주변에서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한데 이혼이나 별거 ,사별의 인간관계에 급격한 변화가 있는 경우, 직장이나 명예상실로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오는 경우 , 난치병이나 장애등의 신체 상실감을 갖는 경우들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웃이 있을 때에 그들에게 닥칠 최악의 경우들을 생각하면서 가까이 해주고 믿는 성도들로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주는 것만큼 자살에 대한 예방책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소망이 없어서 자살하기에 소망과 용기를 주고 친구가 되어 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하며 깊은 상처가 있어서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전문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주선해주어야 합니다.

교회의 상담실을 소개하여 이용하도록 하고 이런 위기를 겪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기도해 줄 뿐만 아니라 담당 교역자가 특별히 보살필 수 있도록 얘기해주어야 합니다.

전 4:12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한다는 말처럼 가정과 교회와 이웃이라는 끈으로 엮어 있으면서 넘어지기 쉬울 때에 서로 붙잡아 주면서 사회적인 병리 현상을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번 정몽헌씨의 투신자살과 함께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인 자살 신드롬을 보게 하시면서 무엇보다도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고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우리도 예외가 아니므로 미리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고 우리 모두가 공동체로서 함께 묶여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이 우리 모두에게 교훈이 되어서 이 시대를 극복하며 모든 어려운 문제를 극복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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