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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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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광일 목사 

일제시대 우리나라에서 하와이로 이주해 사람들 가운데 아주 신앙이 좋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탕수수밭에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주일이 되자 예배드리기 위해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화가 난 농장 주인이 이제부터 주일에 교회 가는 자들은 매질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은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서 하와이에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해서 왔는데 주일을 못 지킨다면 여기에 온 이유가 없어지니 매를 맞더라도 주일을 지키겠다" 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농장 주인은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이들은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기 전에 매를 맞고 가겠습니다' 라고 농장주인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협박을 하다가 안되니 회유를 하면서 "주일날 일하면 삯을 더 쳐주겠다" 고 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간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 고 물으니 "우리는 돈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농장주인은 그들의 뜨거운 믿음에 감동을 받아 매 주일 농장 일을 쉬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멀리 교회 가는 것보다 가까이서 예배드릴 수 있도록 농장 안에 예배당까지 지어 주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대답 속에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납니다. 사랑의 고백 한 마디로 병석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새 출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랑의 위력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가는 그 자리에는 엄청난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는 질문을 통하여 베드로를 수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질문은 헬라어 원어로“아가파스 메”인데,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현재 예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왜 나를 모른다고 하게 된 줄 아느냐? 네가 왜 이렇게 실수가 많고 형편없이 된 줄 아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시간 마음을 열고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는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뜨거운 입술로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아가페의 조건 없는 사랑을 고백할 때 변화와 역사가 일어납니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의 뜻은 무엇입니까?


첫째 영적으로 치유하시려는 음성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마친 다음에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때 베드로는 '나는 형제도 사랑합니다. 내 이웃도 사랑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합니다.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순간에 모든 것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배신자요, 실패자가 되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영적으로 병든 베드로를 향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며 옛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옛 이름을 부르신 이유는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고 사랑한다고 소리치던 옛 자아인 시몬이 부인한 것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반복하여 물으신 것은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베드로를 사랑하고 계심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그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는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자유함을 얻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오늘 우리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터치될 때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던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던지 어떤 나락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던지 간에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워 주십니다. 그리고 치료하여 주십니다.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귀를 기울여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 부끄럽지만 나도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 순간 우리의 영적 상처가 나음을 입는 은혜를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음성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직분 중에 최고의 직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를 가리켜 교회의 기초가 된다고 칭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도라고 해도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기에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분명히 물으십니다. 주님에게는 어떠한 직분을 맡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중한 직분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못해서 파괴적인 일을 할 때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교회 임원명단에 있음만으로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힘입었습니까?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였습니까?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하였습니까? 주님의 고통과 부활의 기쁨을 맛보았습니까? 주님의 주신 떡과 잔을 통해서 우리 위해 찢기신 살과 우리 위해 흘리신 피를 기념하였습니까? 그러나 이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십니다. 즉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즐겼느냐 하는 것 보다 주님을 얼마나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베드로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열심도 좋지만 주님을 사랑하면서 열심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하는 모든 일은 헛것입니다. 요 2:17에 보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내는 열심은 주님을 삼켜버립니다. 주님을 위해서 바로 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베드로처럼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손으로 일하고,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머리로 생각하고,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일보다 우선이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어 주님의 사명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진정한 헌신을 원하시는 음성입니다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 '시티 스터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톱을 달리는 학생이었고 크리캣 선수였습니다.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캠퍼스 집회에 참석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는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기로 결정합니다. 학교 당국자들은 이 학생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선교의 길에 나서자 친구가 와서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이것은 자네에게 지나친 희생이 아닌가? 다시 한번 재고해 보게". 이때 시티 스터드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사랑이 사실이라면 내가 그를 위해서 바치는 희생은 그 어떤 것도 지나친 희생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헌신입니다.

헌신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해서 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헌신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에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아가페적인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과거에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현재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은혜가 넘치고 부흥하는 교회는 한결같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는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온전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분들이 안내 위원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 차량도 운전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주저하지 않고 기쁘게 헌신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이 고맙고 감사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 질 때에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교회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주님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솔직한 고백을 듣고자 하십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의 분량을 확인하고자 물으십니다. 얼마나 섬길 수 있는지, 얼마나 순종할 수 있는지. 믿고 이 일을 맡겨도 될 만큼 사랑하는지, 죽음의 자리에서도 부인하지 아니하고 사랑하는지, 물으시는 주님의 질문 앞에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하며 분명하게 사랑의 고백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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