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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마 25: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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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영천교회)

  젊은 청년세대에게 가장 매력적인 말은 ‘평등’이라는 말입니다. 불평등에 대해서 청년들은 울분을 가지고 분개합니다. 불평등한 것을 가장 싫어하는 세대가 청년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 민주노동당이 10명, 국회로 진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평소의 슬로건이 ‘평등’입니다. 몇 가지의 공약들이 전부 평등구호를 배후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평등구호를 어떻게 실현해 갈지는 두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

  본문을 보면 한 사람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고 멀리 갔다가 돌아와서 계산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불공평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하나님이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두 달란트를 주고, 한 달란트를 주느냐, 이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것부터 불공평이라는 것입니다. 달란트를 받는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또 돌아와 가지고 계산을 할 때도 불공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가지고 열 달란트 있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한 달란트밖에 못 가졌으면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몇 개 주어라” 그렇게 해야 공평한데 이 주인은 한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서 빼앗아 열 개 가진 그 사람한테 오히려 주었습니다. 있는 자에게 더 풍족하게 주었습니다. 이 두 가지 처사를 보면 주인이 불공평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 편에서 볼 때는 이 두 가지가 공평한 것입니다. 그것이 본문에 숨어있는 진리입니다.

  오래 전에 우리나라에 닥터 요하네스 박사가 왔는데 이 사람은 러시아에 있는 희랍정교회 신학대학 총장입니다. 종교계의 인사로는 거물급입니다. 그가 우리나라에 와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희랍정교회가 그렇게 흥왕하고, 온통 기독교 문화로 찬란하게 빛난 러시아가 왜 공산화가 되었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1917년에 러시아가 공산화되었는데 그 이후에 약 70여 년간 모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공산화될 그 때에 온 러시아는 기독교문화로 충만했습니다. 성 페테르부르크에는 온통 기독교문화입니다. 이삭성전은 로마의 베드로성전을 방불케 하는 대등한 성당이고 기독교문화는 그야말로 러시아가 가장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이 러시아가 공산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하네스 박사의 대답은 상상 외로 간단했습니다. 한 마디입니다. “우리가 속았습니다.” 지상낙원을 부르짖고 신분과 계급과 빈부차이가 없는 평등사회를 부르짖던 공산주의가 러시아 교회를 속였습니다. 거기에 러시아 교회가 속아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

  여러분, 본문의 이 사건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지혜를 줍니다. 우리가 몇 가지 관찰을 해 보면 우선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종은 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항의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달란트를 주인 뜻대로 맡겨주는 것입니다. “자, 너는 한 개 받았어.” “너는 두 개 받았어.” “너는 다섯 개 받았어.” 주인이 자기 뜻대로 나누어 주는 것이고 종들은 그것을 받는 입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내게 얼마를 주었느냐, 너는 얼마를 받았느냐는 그런 것을 가지고 주인을 평가할 관계가 아닙니다. 이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는 재능대로 맡겼다는 것입니다. 그릇을 쓸 때 이 접시에다가 나물 담고, 이 접시에다가 조기 구워 담고, 이 공기에다가 간장 담고, 이 대접에다가 국 담고 주부가 필요한데로 그릇을 씁니다. 그런데 김치담은 그릇이 “주인 아줌마, 나 지금 냄새가 고약해서 도저히 안 되겠어. 고소한 냄새나는 참기름 바른 김을 담아 주시오.” 그릇이 그렇게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주인이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쓰는 것입니다. 주인이 재능대로 그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시간을 똑같이 줍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나 두 달란트 받은 자나 한 달란트 받은 자나 일 하는 시간은 똑같습니다. 누구는 장사를 오래하고 누구는 장사를 적게 하고 가 아닙니다. 주인이 먼 나라에 여행가서 있는 동안 돌아올 때 까지는 마음대로 내가 그 돈을 가지고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주인이 원하는 것은 사실은 양이 아닙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의 이 결과를 보고 우리가 ‘아, 하나님 나라는 양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여기에 주인이 보는 것은 가치입니다. 그 양에 포함되어 있는 종들이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그 삶의 가치를 지금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발성과 생산성

  또 하나는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삶의 충성을 주인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바로 이런 원리가 매우 강조됩니다. 자발성이 있어야 합니다. 생산성이 있어야 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남겼습니다. 생산을 가졌습니다.

  ‘서비스’(Service)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비스 산업, 서비스 정신 등 아주 좋은 말입니다. 그런데 아주 경계할 말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lip service'라는 말입니다. 말로만 서비스하는 사람들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 하류에는 나룻배로 즐기는 관광코스가 있습니다. 아주 스릴이 있습니다. 폭포하류에도 영향이 있기 때문에 그 물결을 타고 가는 나룻배의 아슬아슬함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이 있는데 한번은 관광객이 탔는데 노를 젓는 사공을 보고 “이봐요 당신, 몇 년간 일했소?”라고 물었습니다. “20년째 노를 젓고 있소.” 조금 있다가 “그동안 사고 난 적 없소?” “왜 그러시오?” “겁이 나서 그렇소.” “당신 노 저을 줄 아시오?” “몰라요.” “노 저을 줄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 노를 젓든지 말을 안 하든지, 내가 죽으면 당신도 죽어.” 그런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노를 저을 줄 모르면 입이라도 다물고 있어야 되는데 립 서비스로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17대 국회의원들, 이제 립 서비스로 국민들 앞에 공감을 못 얻습니다. 제가 토론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모두 말 잘합디다. 그런데 제가 조금 우려가 됩니다. 이제는 싸움하지 말자, 이제는 화합하고, 이제는 상생의 정치를 해야 된다는 똑같은 논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치공약으로 내세웠던 그 공약을 주장하려면 여의도는 대판 싸움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이제 싸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민주노동당이 국회 밖에서 주장했던 것을 국회 안에서 주장해 보십시오. 이것은 정쟁이 아니라 전쟁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게 있는데도 이제 며칠 안 되니까 이제 립 서비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립 서비스로는 안됩니다. 서비스는 좋은데 립 서비스는 대단히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다음에 'eye service'가 있습니다. 아이쇼핑이란 말이 있는데 아이쇼핑은 할수록 다리만 아프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아이 서비스를 하면 안됩니다. 눈가림으로 하면 안됩니다. 사람보는 데서만 하는 척, 눈가림 서비스는 안됩니다.

  그리고 'ear service'가 있습니다. 듣기는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그래 말해라. 내가 듣기는 들어준다” 이런 것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이런 위험한 서비스들이 우리 사회에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이런 병든 서비스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면 우리의 충성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 앞에 보고할 때 말이 많았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남긴 사람은 주인 앞에 그것을 내어놓은 것으로 끝났는데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주인 앞에 책망을 받을 때 변명이 많았습니다.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하고 주인을 오해했습니다.

  더 큰 기회와 사명

  그리고 본문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하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는 주인이 어떻게 말하느냐 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되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라고 합니다. 이 주인이 베푼 보상 중에 칭찬 다음에 나오는 것,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이 대목이 서구 기독교에게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의 기회로만 만족하시지 않고 더 큰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다섯 달란트 남긴 것으로 너는 다 되었다’가 아니고 더 큰 기회를 주인이 보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겨 주리니 네가 한 번 더 해라”며 더 큰 기회를 주인께서 주셨습니다. 주 하나님 앞에 충성된 종은 이렇게 또 다른 더 큰 기회를 누리는 특권과 축복을 누립니다. 이 축복이 우리들의 생애에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하는 그런 재목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이 한번 높이 들어 쓰는, 제2의 기회를 주는 그런 믿음의 젊은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능력대로 평가받은 구조로 형성이 되어 갑니다. 기흥에 가면 삼성전자단지가 있습니다. 물론 출퇴근이 있습니다. 하지만 출퇴근이 없는 기술자, 직원들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몇 시에 출근했나 확인카드로 체크하고, 퇴근을 몇 시에 했는지 체크하는 이런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출퇴근을 언제하든 결과는 실적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출근을 몇 시에 하든, 퇴근을 몇 시에 하는 그게 아니라 그 사람의 근무실적, 연구실적을 가지고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노는 것 같은데 연봉은 억대를 받습니다. 그런 세상으로 지금 변해가고 있습니다.

  열매로 말하라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형성된 여러 가지 이념들이 있습니다. ‘뷰로크라시’(Bureaucracy)라는 관료주의라는 게 인류사회를 늘 지배해오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크라시'(Aristocracy)라는 것도 있습니다. 귀족사회가 또 지배를 합니다. ‘데모크라시’(Democracy)라는 것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요즘은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라는 게 있습니다. 실적주의, 즉 실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선진사회는 냉정할 정도로 메리토크라시 사회입니다. 무정합니다. 실적이 없으면 도무지 안 됩니다. 요즘 교회도 메리토크라시 형태로 운영하는 교회도 가끔 드러나고 있습니다. 전부 실적위주입니다. 그것이 교회본질과 배치되기 때문에 찬성할 수는 없고 그게 옳다 라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오죽 성도들이 자기 할 일을 안 하면 그렇게 실적으로 평가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살면 메리토크라시가 교회 안에 왜 들어오느냐는 것입니다.

  모 신문에 보니까 교회 안에도 노조결성을 신청했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부목사들, 기사들, 사무원들을 중심으로 노조를 조직한다고 합니다. 너무 혹사받은 교회직원들이 많다, 대우도 못 받으면서 너무 부교역자들을 혹사시키는 교회가 많다, 이런 사람의 권익을 위해서 노조를 설립을 해야 된다고 해서 그 운동이 지금 일어나고 있고 노동당국에서는 조건만 갖추어지면 설립이 가능할 수도 있다 이렇게 답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정한 관계로 교회가 지금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우리 자신들이 반성해야 되는 일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지금 착하고 충성되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방법이 지금 교회 안에도 들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 자신들이 자발적이고 생산적인 종으로서 착하고 충성된 자리로 나아가야 됩니다. 이 관료주의나 귀족주의나 민주주의나 실적주의라는 이것이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이념들이지만 이미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관료주의가 있습니다. 귀족주의도 있습니다. 민주주의도 있고 실적주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여행에서 잊혀지지 않는 좋은 추억이 뭐냐 하면 제가 두 번째 예루살렘에 갔을 때 무화과를 가지고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무화과가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고구마를 먹듯이 두 개를 먹어도 요기가 될 만큼 무화과가 큽니다. 무화과는 이름 그대로 꽃이 없는 과실입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크고 잘 익은 무화과를 펼쳐 보면 꽃이 열매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꽃술이 열매 안에 있습니다. 열매 안에 꽃이 들어가 거기서 아름답게 피어져 있고 향기를 내고 맛을 냅니다. 예수님이 이 무화과를 즐겨 드셨고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가 없는 그 무화과를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무화과는 하늘의 열매, 영적인 열매로 봅니다. 무화과, 석류, 포도, 감람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과실인데 이 무화과의 모습이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라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맺는 말

  성도들은 안으로 꽃이 피어 있어야 됩니다. 안으로 꽃을 피우고 맛을 내는 과실이 형성되어 있는 무화과처럼 우리의 신앙인격과 삶의 내용이 그런 충실함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겉으로 화려한 게 아니라 안으로 내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착하고 충성된 종의 모습입니다. 있는 자는 더 받아서 풍족하게 되는 원리가 바로 신앙 안에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받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더 주시는 하나님, 있는 자에게 더 큰 것으로 맡겨주시는 이 주인, 그 주인 앞에 멋있게 쓰임 받은 우리 세대가 다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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