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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요 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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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강구원 목사

해가 더해 갈수록 우리 민족사와 관련된 연구가 세분화되고 전문화 되어 감에 따라 이전에는 일방적이던 것들이 많은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 편승해서 우리민족이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대립되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을 떠나서 우리 민족이 지닌 비애와 한은 세계 어느 민족에게서도 쉽게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각골통한(刻骨痛恨)의 역사(歷史)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아픔은 인간들의 극히 초보적인 욕망에서 발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 같은 것이 주고 간 상처들입니다. 이 땅에서 운명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일제 강점기의 수난과 동족 상잔의 비극 6·25사변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1636년 12월에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아픔도 지나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치욕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의 이해를 더하기 위해 우리는 이른바 병자호란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이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파죽지세로 한양까지 밀어닥쳤습니다.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향으로 유질(留質)이 되어 갔습니다. 역사는 왕이나 대신들의 고통에 비해 백성들의 아픔을 아주 소극적이고 단조롭게 취급하고 있을 뿐 백성들에 대한 배려에는 인색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지위나 명예 따위를 잠시 잊어버리는 정도가 아니고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와 인간의 유독한 정체성마저 파괴당하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소현세자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볼모에서 풀려 고국으로 돌아올 때 최명길이 청과의 교섭으로 25,000여명의 포로들이 귀환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부녀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이름하여 환향녀(還鄕女)혹은 회향녀(回鄕女)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이들을 받지 않자 자살하는 소동까지 일어났습니다. 보다 못한 인조는 칙령(勅令)을 내려 전국에 있는 강을 회절강으로 하여 몸을 씻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였습니다. 만약 회절강에 씻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부하면 국법으로 다스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원치 아니한 침노를 당한 그들은 이방인 취급을 당하면서 한 많은 세월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여기 수가성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이 여자를 보십시오 이 여인의 처지가 흡사합니다. 이 여인 역시 타국인들로부터 원치 않은 침노를 당하여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마리아성의 수많은 여인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한 많은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건설되어 250여 년간 내려오다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이 먼저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게 망하였습니다. 이때에 살만에셀이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다른 지방에 옮기고 자국민을 사마리아 성으로 이주 시켰습니다. 그 다음에는 마게도냐 알렉산더 왕이 점령하여 또 사마리아인을 축출하고 자국민을 이주시키니 사마리아 성 사람들은 혼혈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 시 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도 하지 아니했습니다. 갈릴리를 갈 때에도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아니하고 요단강으로 돌아서 다닐 정도였습니다.
이 여인의 삶은 고통스럽다 못해 차라리 모든 것을 체념하고 살아가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자신의 원통함과 불만을 털어놓을 광장조차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동네로 뛰어들어가서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이 말은

Ⅰ. 삶의 의욕을 상실한 사마리아 여자의 탄성입니다.

사마리아 여자에게 삶의 의욕을 상실시키고 그녀를 비통하게 했던 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그는 생각하기를

1) 자신의 혈통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4장 9절에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그녀의 토(吐)해내는 듯한 응수는 사마리아의 어두웠던 지난날의 깊은 상흔이 표출되는 순간입니다. 침노를 당한 사마리아성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든지 타민족과 더불어 살면서 순수성을 파괴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유대인들과 어쩔 수 없이 상종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도 세계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서양인들에 비해 동양인들, 백인에 비해 흑인들, 그리고 저 아메리카 대륙에서 천대받고 있는 원주민인 인디안들 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역시 똑같은 조건을 가지고도 아니 훨씬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약소국가라는 이유 때문에, 그보다 더한 것은 동양인이라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차별 시 되고 있는 일은 국제사회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2) 야곱의 우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4장 14-15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물은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라고 했을 때 그녀는 물 길러 오지도 않게 그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물 길러 오는데 우물은 깊고 힘들었습니다. 야곱이 준 우물물은 야곱의 자손들이 먹었지만 다시 목이 마르는 물이었습니다.
인간들의 화려한 전통으로 우리 영혼이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탁월한 가문이나 사회적인 지위가 우리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많은 재물이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명예나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첨단 과학문명의 이기(利己)도 다시 갈증을 느낄 뿐 우리의 영혼이 만족을 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소개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은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시는 분이십니다.

3) 자신이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4장 17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 『남편』은 남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라는 절대적인 이름이 이 여인을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가 거쳐가면서 이 여인을 한결같이 슬프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있는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남편은 바로 예수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남자라는 이름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그 이름 여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상대적인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울고 있었습니다.

4) 예배 장소와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본문 4장 20절에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의 대화가 남편이야기에서 갑자기 예배문제로 전환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심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했습니다(요 4:21).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바로 예배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모두에게 도전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이것은 복음으로 인한 이방 정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공간적으로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항상 우리의 예배는 언제 어디서나 신령과 진정만이 있을 뿐입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한 이 말은

Ⅱ. 고대하던 메시야를 만난 여자의 탄성 입니다.

본문 4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1) 예수는 인간의 이해 관계를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4절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9절에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지나가지 아니하는 사마리아를 통행했습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유대인 남자이지만 진정으로 사마리아 여자를 만나 주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흑인과 백인, 그리고 황인종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모든 지역과 모든 족속들과 차등이나 경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만의 이유로도 예수님은 인간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얼마든지 초월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는 인간의 보편적 사고를 초월하신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19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본문 4장 29절에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그 여자의 과거를 말해 주었습니다. 비참한 지경에서 메시야를 고대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녀의 한 맺힌 과거를 파헤쳐 주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아니고 오히려 자기를 안다고 하는 관심에 대한 감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선지자라고 말했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생수를 그녀는 야곱의 우물과 병행하여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하는 생수는 그릇에 담는 물리적인 생수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3) 예수는 인간 조상보다 선재(先在)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12절에 『…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으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면서도 지극히 도전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8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야곱의 조상 이삭과 아브라함이 있기 전에 아니 아담이 있기 전에 홀로 계신 분이십니다.

4) 예수는 그녀가 소망하는 메시야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장 25절에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를 대망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원통한 사정을 알아줄 사람은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메시야 곧 그리스도뿐이라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자기의 소망을 말함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익숙한 자처럼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본문 26절에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라고 했을 때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소리쳤습니다.
원치 아니한 침노로 인해 비통한 생을 살아가는 이 여인에게는 오직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소망이었습니다.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한 이 말은

Ⅲ.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여자의 탄성입니다.

본문 4장 28-29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마리아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갔다는 것에 대해 과거를 청산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본문과의 개연성이 희박합니다.

예수를 만난 그녀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간 것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동네에는 아마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만나서 메시야를 만난 것에 대한 공감을 가지려는 인간의 본능이 발동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예수님께 물을 대접하는 것보다, 물을 동이에 채워서 집으로 가져가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동네 사람들은 육신의 갈증보다 영혼의 갈증을 더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암 8:11). 그래서 그는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탄의 침노를 받은 아담의 후손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사탄적인 요소들로부터 침노를 당하여 울부짖는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소망이신 예수를 만난 사람은 소리를 지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한 사람은 감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메시야입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남편입니다. 그는 영생하는 생수입니다. 그는 우리의 생명의 떡입니다. 그는 우리의 진정한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진정한 남편은 없습니다. 명예도, 재산도, 자녀도, 육체도, 우리가 믿고 의지할 만한 존재는 아닙니다. 이 땅에서 같이 살고 있는 부부도 영원한 관계는 못됩니다. 이 땅에 살 동안 파트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입니다. 이사야 54장 5절에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토록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세상의 온갖 부조리 속에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난 우리의 감격이 우리의 생활 수단이자 우리의 육신의 갈증 정도를 해결하는, 물동이 정도를 극복하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성도 여러분, 지금은 보여 주는 믿음, 보여주는 신앙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딤전 4:15).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 2:17).
야고보서 2장 18절에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3장 13절에도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들이여, 일방적으로 은밀한 것을 견지해 왔던 우리들의 신앙을 보여 주는 신앙으로 그 패턴(pattern)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혁명적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적 전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보여 드릴 것이 있게 합시다. 보여 줄 것이 있는 성도, 보여줄 것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만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내가 다니는 우리 갈보리교회에 와 보라 그리고 나를 보라 나의 자손을 보라 나의 기쁨을 보라 내가 받은 복을 보라 나의 섬김을 보라"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값지고 고귀한 언어(言語)가 아닌가?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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