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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의 영양실조 (막 7: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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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예배 때 헌금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감사는 것 중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드릴 수 있는 물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마음을 굴뚝같아도, 드릴 것이 없다면 어찌 드릴 수 있습니까? 또 하나는, 드릴 수 있는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까? 가진 것 없으면서도 넉넉함을 누리는 부자가 있는가 하면 넉넉하게 가졌음에도 늘 없는 것 같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있습니다.

사실 있는 그대로와 의미는 엄청난 차이를 가집니다. 한 시간은 60분입니다.  이건 어느 누구나 똑 같습니다. 부자는 1시간이 120분이고, 가난한 사람은 한 시간이 30분이고, 그런 거 아닙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한 시간은 60분입니다.

그러나 똑 같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있으면 1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미워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있으면 1시간은 엄청 깁니다. 재미있는 일을 하면 한 시간은 금방 지나갑니다. 그러나 재미없는 일을 억지로 하게 되면 웬 시간이 그렇게도 안 가는지…….

설교도 그렇잖아요. 은혜가 되면 어느새 끝나잖아요. 그런데 은혜가 안 되면 지루하잖아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실이라고 해서 사실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가난하다고 해서 가난한 게 아닙니다. 부자라고 해서 또한 부자가 아닙니다.
같은 땅에 같은 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씨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거둡니다. 그런데 어떤 씨는 열매가 없습니다. 심지어 같은 줄기에서 자라서, 같이 맺어진 이삭인대도 어떤 것은 알곡이고 어떤 것은 쭉정이 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되려면 새가지 ‘V’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꿈’(Vision)입니다.

운명에 맡겨 되는대로 사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쁨과 슬픔, 소망과 절망이 교차합니다. 환경이 좋으면 마냥 기뻐하고, 앞으로의 밝은 소망을 가지지만, 환경이 나쁘면 슬퍼하고,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러나 꿈, Vision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암울하고 절망적인 환경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극복합니다. 꿈이 있다는 것은 곧 성공할 가능성을 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활력(Vitality)입니다. 
역동적인 힘을 말합니다. 추진력을 말합니다. 수없는 문제들이 가로 막아도 뚫고 나갑니다. 수없는 장애물이 있어도 뛰어 넘습니다. 이들 앞에서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모험심 곧 Venture입니다.
이들은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를 뛰어 넘어 미래를 볼 줄 압니다.
이 세 V를 가진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사람이 아니라 미래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오늘 여기서 살지만, 미래를 끌어당긴 오늘을 삽니다.

산위에서 배를 만드는 노아를 보십시오. 그는 오늘을 삽니다. 그는 산 위에다 배 만듭니다. 비가 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지만 홍수를 대비하여 산에 올라가 배를 만듭니다. 배가 홍수의 물위를 떠다니는 것은 미래입니다. 그러나 그때를 위해 배를 만드는 건 지금입니다. 노아가 배를 만드는 한, 그는 꿈의 사람이요, 활력의 사람이요, 모험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현재의 상황이 어떠냐 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미 성공을 그 삶에 담고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열정이 있습니다. 특수한 비법 이라든지 탁월할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열정이 있기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공하는 사람들은 소명의식 즉 하나님께서 이 일로 인해 나를 부르셨다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명의식하면, 일반인들이 오해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주의 종들에게만 있는 줄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직종에 종사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하늘의 소명을 가지고 일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성도들이 “목사님 참 힘들지요?” 하고 말 할 때 있습니다. 직장 다니는 사람도 힘듭니다. 사업하는 사람도 힘듭니다. 가정의 주부라고 왜 힘들지 않습니까? 다 힘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이 다를 뿐입니다. 누구나 그 소명을 발견하면 힘들어도 힘 안 듭니다.
아세요? 힘들어도 힘 안 드는 거? 자기가 재미있어 하는 일은 아무리 힘들어도 힘이 안 드는 거고, 자기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리 쉬워도 힘든 겁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11장 28-30절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까? 정말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예수의 짐은 가벼울까?

마태복음 8장 17절에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병약함, 우리의 질병, 그것을 떠맡으시고, 그것을 짊어지셨다면, 그 멍에 그것이 어떻게 편하고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너희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셨는데, 어찌 우리에게 주신 멍에와 짐이 편하고 가벼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을 본문을 봅니다.
예수께서 두로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셨는데, 예수님은 아무도 그것을 모르기 바라셨으나 사람들이 다 알아 숨어 계실 수 없었습니다. 악한 귀신 들린 딸을 둔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베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읽고 있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뭐 느껴지는 거 있습니까? 뭉클한 어떤 감정은 아니더라도 잔잔한 어떤 느낌이라도 있습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데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정도야 당연하지요.” 그리 생각하십니까? “딸을 고쳐만 준다면 나도 그 정도는 하겠다.” 그럴 것 같지요?

정말 여러분이 지금 이 귀신 들린 딸을 두 어머니의 심정 같은 그런 심정으로 이 예배에 참석하셨습니까? “오늘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 만나야 해” 그런 마음으로 여기 오셨습니까? 그런 간절함이 있으세요?
이 여인은 이방인 입니다.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곧 수로보니게 출생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은 아예 상종도 안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27절에 예수님께서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 이방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더욱이 그 발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팽개친 상태 입니다.

게다가 여자입니다. 낯선 남자와 이야기만 해도 흉이 되던 시절에, 여자가 남자의 발 앞에 엎드렸다는 것은, 아무리 상황이 다급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그 부끄러움까지 팽개쳤습니다.
“목사님은 날 어떻게 보시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하고 싶으신 분 많을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리 하셨습니까? “나도 그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스스로 물어 보세요. 지금 여기 나와 있는 여러분의 심정이 이 여인과 같은 심정입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자기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그 사랑하는 딸이 귀신 들렸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딸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그런 아픔이 그 여인에게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딸이 귀신에 들려 발버둥치며 악을 쓸 때마다, 그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 이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지금 여러분도 그런 심정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들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예수님 자신이 온 것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온 것이라고 그리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예수님 앞에 나아가도 맨송맨송한 마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이 여인과 같이 절박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자존심이나 부끄러움까지 팽개칠 만큼 그렇게 절 박 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스스로 의로운 줄 알고 있습니다. 남이 손가락질 할 만큼 나쁜 일 한 것도 없으니까요.

더욱이 놀라운 건, 스스로도 엄청난 문제로 아파하며 고민 하면서도 예수 앞에 나오지 않고, 또 이렇게 나온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집에다 두고 온다는 겁니다. 직장에 두고 온다는 겁니다. 사업장에 두고 온다는 겁니다. 그리곤 지금 여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처럼 않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곤 예배 내내 머릿속은 “저 문제 어떻게 하지?” 그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나왔지만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 초중등학교 시절, 목욕하기 참 힘들었습니다. 목욕탕에 가본 기억이 없습니다. 한 몇 번 간 것 같은데……. 대부분 집에서 목욕합니다. 여름날이야 개울이고 어디고 뛰어들면 되지만 겨울에는 부엌에서 물을 덥혀서 해야 합니다. 물을 데우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래도 부엌이라 춥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그러니 목욕할 엄두가 못 나는 거지요.
가끔 체육시간에 때 검사 했습니다. 옆 반이 체육시간에 때 검사 했다고 하면, 쉬는 시간에 학교 근처 웅덩이에 달려가 씻는 겁니다. 그냥 배 앞쪽만 씻는 겁니다. 그리고 검사하는 거지요. 배만 살짝 들었다 내려놓으면 되는 겁니다. 등이랑 온 몸이 때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면서도 배만 씻고, 마치 온 몸이 다 깨끗한 것처럼 서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때있다고 걸려서 매 맞는 아이들보고 웃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께 나아간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보여 드리기 위한 겁니다. 배만 씻고 “보세요. 예수님 저 때 없습니다.” 그것 보이려고 나아가는 것 아닙니다. 내게 있는 문제들 끌어않고 나가는 겁니다. 나의 죄인 됨을 끌어않고 나가는 겁니다. 삶의 문제, 죄의 문제, 이 모든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심을 믿고 나가는 겁니다. 문제가 있기에, 그 문제를 내가 감당 할 수 없기에, 귀신들린 딸을 둔 어미의 심정으로 예수님께 나아가는 겁니다. 예수님 아니시면 삶과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자존심이고 부끄러움이고 다 팽개치고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나아간 이 여인이 예수께 간청합니다.
사실, 예수님께 나아가기가 어렵지 일단 나아가기만 하면 간청하는 건 쉬운 거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이것이 발걸음을 멈칫거리게 하고 망설이게 하는 거지, 일단 예수님 앞 나아가 무릎을 꿇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연히 간청하게 되는 겁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늘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들을 인자한 모습으로 맞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마음속에는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청하는 이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 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누가 아이들에게 주려고 만든 빵을 아이들에게는 안 주고, 개들에게 주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아이들과 그 집에서 키우는 개 이야기가 하시는 것 아닙니다. 이방인에게는 줄 구원이 없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는 줄 은혜가 없다는 겁니다.

사람의 심성이 그렇습니다. 누군가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정말 도와주어야 하는데 도울 능력이 없을 때 오히려 미안해합니다. “어떻게 하지?” 그렇게 안타까워합니다. 도와주지 못 하면 내내 마음이 무겁습니다.
예수님이 누구 입니까? 그 분은 모든 사람에게 은혜 베풀기 원하셔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누구든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을 부르셨고, 그래서 그 앞에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마가복음 6장 56절에, “예수께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에 들어가시든지, 사람들이 병자들을 장터거리에 데려다 놓고 예수께 그 옷술 만이라도 손을 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손을 댄 사람은 모두 병이 나았다.” 그랬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 된다는 겁니다. 왜요? 이방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이방여인을 개 취급하셨습니다. 정말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라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이 여인의 말을 보십시오.
“주님,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습니다.”
그럼요. 아이들 먹어야 한다고 개들은 굶기나요? 개들은 개들대로 주어지는 것 있는 겁니다. 이 여인은 그걸 알았습니다. 주인의 자녀들이 먹는 것 있다면, 상 아래 개들이 먹는 것도 있는 것 아닙니까?
또 상 위면 어떻고, 상 아래면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과 구원을 받기위해 격식을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율법이요, 장로의 유전이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했구요, 오히려 구원의 하나님을 멀리 했습니다.

사도행전 15정에 예루살렘 회의가 나옵니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방인이라도 할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 합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가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하나님께서 일찍이 여러분 가운데서 나를 택하셔서 이방 사람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이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속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셔서 그들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셔서,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가 다 감당 할 수 없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메워서, 하나님을 시험하시는 것 입니까? 우리가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알고, 그들도 꼭 마찬가지로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상 위의 음식이냐, 상 아래 음식이냐가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 음식이 뭐냐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그 음식을 누가 주느냐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상 아래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주시는 은혜요, 복이요, 능력이라면 상 아래면 어떻습니까?
자존심을 세우려면 세상을 향해 세우십시오. 왜 세상 사람들한테는 기죽어 살면서 하나님 앞에만 나오면, 교회만 나오면, 믿는 사람들 앞에서는 기를 세우십니까? “개? 개라니?” “내가 누군데.” “상 밑의 부스러기? 왜 내가 상 밑의 부스러기를 먹어야 하느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디 초청 받아 가면, 상석에 않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고. 그런데도 “내가 왜 말석에 앉아야 하냐?”고 생각 하십니까?
세상 사람들 섬기는 대는 익숙하면서, 왜 하나님을 섬기며, 목회자를 섬기며,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는 늘 자존심을 세웁니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야구 프로야구 기록 중 가장 많은 에라(실책)를 기록한 사람이 뉴욕 자이언츠 팀의 찰스 히크맨이라고 합니다. 1900년도 시즌에서 120게임에 출전했는데 91회의 실책을 냈답니다. 그것은 그의 나쁜 버릇 때문인데 다리를 굽히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땅 볼을 번번이  놓쳤습니다. 그의 별명은 “피아노 다리 히크맨”입니다. 다리를 굽힐 줄 모르고 뻣뻣하게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조금 알려졌다고 나를 성자나 위인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처럼 죄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인간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참 장하다.’ 라고 말씀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것이 상 아래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기왕에 먹는 거, 상 아래 부스러기 보다 상 위의 잘 차려진 음식이 나을 겁니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의 은혜는, 상 위에 상 아래나 관계없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과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면 동안 먹은 것이 만나입니다. 아침 일찍 들에 나가 보면 하얀 만나가 깔려 있습니다. 그 것, 그냥 거두어 오면 되는 겁니다.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아침에 나가보면 만나가 깔려있는 겁니다. 그 것 거두어 오면 식량이 되는 겁니다. 그것도 어쩌다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매일 입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왕창 거두어 왔을 겁니다. 한 되만 있어도 충분히 먹을 수 있지만 어디 그렇습니까? 아마도 한 줌, 두 줌 더 담아 왔을 겁니다. 여러분은 안 그러셨겠지만, 난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담아 왔다고 남아있던가요? 두고두고 먹게 되던가요? 그날 먹고 남은 거 다음 날 보니 썩었습니다.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무엇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자를 것도 없고, 남을 것도 없이, 필요한 만큼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만나보다는 하나님께 눈과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적어도 하나님께서 주셨기에 감사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이 가지면 좋겠지요. 그래서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치지요. 그러나 상 위의 복까지도 몽땅 받을 수 비결은, 상 밑의 부스러기도 사모하는 열정을 갖는 것입니다. 상 밑의 부스러기도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신앙을 갖는 것입니다.
보세요. 여인은 손에 쥐어진 부스러기, 그 부스러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 끼 먹거리는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 여인의 귀신들린 딸을 살려낸 것입니다. 상에 둘러 앉아 먹는 이스라엘 사람도 받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그 여인은 받은 겁니다.
“그래요, 나는 개 같은 이방인 입니다. 그러나 상 밑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여인의 고백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귀신들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하는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 “떡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 고치는 것과 떡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본문은 이 여인의 간청이 육신의 굶주림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간청은 은혜에 대할 갈망이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29절,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거기에 “믿습니다.”가 있습니까? 거기에 “네 믿음대로”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러나 이 여인은 아주 좋은 아주 큰 믿음이 있었음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있다는 Vision에 있었습니다. 비록 환경은 고침 받을 수 없지만, 아무도 자신의 딸을 고칠 수 없지만 예수님만은 고칠 수 있다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존심과 부끄러움조차 버리고 주님 앞에 나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추진력이 있었습니다. 주변의 눈총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존심과 부끄러움을 꺾고 그 발 아래 엎드린 그 분의 입에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한 걸음 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것은 또한 그 여인의 모험심이었습니다. 딸을 고치고자 하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고통 하는 딸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제 어렸을 때, 동네에 작은 아이들 가운데 유난히 배가 볼록하게 나온 아이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배가 불렀던지 마치 터지면 어떻게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들어보니, 영양실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쥐 잡아 머이면 낳는다는 겁니다.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배가 그렇게 부른데 왜 영양실조냐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알았지요. 그 배부름은 영양실조 때문에 생긴 병에 의한 거라는 걸.
신앙이 이런 사람을 봅니다.

가진 것 있음에도 하나님께 드릴 것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미래가 없습니다. 꿈, Vision이 없습니다. 꿈이 있다면 막연한 꿈입니다. “로또 복권이나 하나 맞았으면 좋겠다.”
주님을 믿는 다면서도 십자가 지고 가는 것 싫어합니다.
예수님 믿어도 간절함이 없습니다. 자존심이나 부끄러움 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야 까닭이 없습니다.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 합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 합니다.
상 위의 대접 받기를 원합니다. 상 밑의 부스러기는, 설사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능력이라 할지라도 불평 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일에도 자존심 상해 난리 칩니다.

터질 것 같이 배는 부름에 영양실조라고 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좀 넉넉하게 살게 되었지만 여전히 신앙의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까짓 거, 안 도와주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신앙은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 잘 하는, 그래서 신앙의 본이 되는 것 같지만, 여전히 신앙의 영양실조에 걸려있는 사람들을 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신앙을 다시 살아나게 할 것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영혼에 생명을 불어 넣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이미 나가고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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