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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니엘의 결심 (단 1:8-9, 9: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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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다니엘서 1장 8절에서 9절 그리고 9장 3절, 10장 12절 이 세 곳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다니엘의 결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립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같이 '다니엘이 결심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결심은 결심으로만 끝내면 안됩니다. 우리가 새해를 맞이하면 금년엔 이것도 하겠다 저것도 하겠다 결심을 하게됩니다. 그 결심이 결심으로만 끝이 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행동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금년 기도 제목 세 가지 중에 세 번째는 실천하는 큰 무리입니다. 사도행전 11장 29절을 보면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작정을 하고 실천을 했다는 뜻입니다. 작정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실행을 해야 합니다. 실천 없는 작정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은 아주 뻔지르르하고 그럴듯하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상 하겠다고 하는 것을 안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언제 그런 적이 있느냐"하고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됩니다. 거짓말은 쓸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결심으로만 끝내면 안됩니다. 그러나 결심 없는 실행은 또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니엘이 결심을 한 것을 우리도 본받아 결심을 하고 실행하는 우리 성도가 되자하는 의미에서 '다니엘의 결심'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1:8-9).

다니엘은 먼저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기로 결심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스콤을 통해서 해방 이후 지금까지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고 보아왔습니까?  이번 4·13선거를 치루면서는 그런 일이 많이 없어져 좋았습니다. 오늘은 갑이라는 당에 있었는데 어느 날은 보니까 을이라는 당에 가 있습니다. 을이라는 당에 있는가 했더니 어느 날에는 병이라는 당에 가 있습니다. 이런 정치인들이 철새 마냥 왔다 갔다 합니다. 정치인으로서 지조가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지조 없는 정치인들이 정치계에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무 것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정치인에게 반드시 정치인으로서의 지조가 있어야 된다면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신앙의 지조가 있어야합니다. 우리가 신앙의 지조 없이 간에 붙고 쓸개에 붙곤 합니다. 신앙의 세계와 불신앙의 세계를 왔다 갔다 손바닥 뒤집듯 하면 그 믿음은 전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키겠다고 결심했고 그대로 실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아합 왕 때 궁전 옆에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 왕이 그 포도원이 탐이 나서 알아보았더니 나봇의 포도원 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나봇을 불러다 놓고 포도원을 내 놓으라고 했습니다. "네가 원하면 더 좋은 땅을 주겠고 네가 원하면 값으로 두둑히 쳐서 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 때 왕의 비위만 맞추어 주면 한 밑천 잡는 것 뿐아니라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됩니다. 그렇지만 나봇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간단하게 대답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금하셨기 때문에 안됩니다"라고 말입니다(왕상 21:3). 그 말을 들은 아합 왕도 아무 말을 못하고 머리를 싸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밭을 왕에게 넘겨주는 것을 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 땅을 12조각으로 나누어서 한 지파에 하나씩 기업으로 주고 각 지파가 기업으로 받게 된 땅은 각 가정의 호주를 따라서 나누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공평하게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므낫세 지파의 슬로보앗이라는 사람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딸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 까닭에 기업의 땅을 한평도 받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 때 슬로보앗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와서 "그럼 우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한평도 받지 못하고 굶어 죽어야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의 응답이 "슬로보앗의 딸들의 말이 옳다. 그 딸들에게도 남의 아들들과 똑같이 나누어 주라"라고 하였습니다. 친정 아버지가 가진 재산을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이 나누라는 우리의 법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요즘 그 법을 제정했지만 이스라엘 나라는 1500년 전에 그 법을 제정했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 말씀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땅을 나누어주었데 그 다음에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딸들 다섯이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딸들이 다섯 몫을 받았는데 결혼을 할 때 므낫세 지파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간단하지만 다른 지파의 총각과 결혼을 하게 되면 소유권을 가지고 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므낫세 지파의 족장이 생각을 해 보니 땅은 한계가 있어서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 법인데 므낫세 지파의 땅이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나와 호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그 슬로보앗의 딸들은 므낫세 지파 총각에게만 시집을 가고 절대로 다른 지파의 총각에게 시집가지 말라. 그렇게 해야만 그 땅을 이지파에서 저지파로 옮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그렇게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꼭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봇이 하나님께서 금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즉 "임금님과 저는 지파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 땅을 내가 주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쩔 수가 없습니다"라는 대답입니다. 임금의 요청이었지만 나봇은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합 왕의 왕후 되는 이세벨은 가만히 두지를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비류들을 시켜 나봇이 하나님을 저주했다고 거짓 증언을 하게 하고 돌로 쳐죽였습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그 재산권이 아들 중에 맏아들에게 돌아갑니다. 나봇이 죽자 맏아들을 붙잡아 놓고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금하셔서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여 맏아들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맏아들이 죽은 후에 작은아들을 불러다 놓고 또 물었습니다. 작은아들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금하셔서 못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둘째도 아버지와 형과 함께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성경은 '그 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내가 분명히 보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왕하 9:26). 아버지의 믿음을 아들들이 그대로 물려받았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믿음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형님의 믿음의 지조를 그대로 본받아 지켰습니다. 성경은 나봇과 그 아들들의 순교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지조는 목숨을 걸고 지킬 만한 값어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지조를 지킨다고 하는 것은 재산과 바꿀 수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목숨을 내 놓고라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봇의 순교에 대해서 얼마나 자랑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믿음의 지조를 저 버렸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믿음의 지조를 저 버리고 세상 것을 조금 더 받고 얻은들 그것이 복이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1장 8절에서 9절을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에게 구하니 하나님이 다니엘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 당시 중동을 지배하던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유대 나라를 침략하면서 반항하면 죽이고 항복하면 포로로 잡아 갈 때의 일입니다. 그러는 중에 다니엘도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유대 나라 사람들이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다 굳어져 버렸기 때문에 왕의 마음대로 부려쓰기에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앳된 청소년들을 뽑아서 가르치고 훈련시키면 그 두뇌를 써먹기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다니엘이 뽑혔습니다. 포로된 청년이 왕의 눈에 들어서 뽑혔다는 말입니다. 그 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으로 왕의 진미와 포도주가 베풀어 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절하였습니다. "왜 안 먹지?" "이것을 먹고 내 몸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몸을 더럽힌다는 뜻은 육신을 더럽힌다는 뜻이 아니요, 믿음이 오염된다는 뜻입니다. 바벨론 나라는 주 신이 태양신입니다. 왕을 비롯해 모든 귀족들이 그 왕궁에서 굉장한 음식을 준비 해 놓고 반드시 자기들이 섬기는 태양신에게 먼저 제물로 바칩니다. 그 후에 왕과 왕족과 귀족들이 참여하여 그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 음식이 다니엘에게까지 베풀어진 것입니다. 우상에게 받쳐졌던 제물쯤은 먹어주면 되지 우상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닌 이상 제물 역시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것과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음식을 차려놓고 절하고 나면 거기서 제사가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차려 놓고 절을 합니다. 그러나 끝이 나지 않습니다. 제사에 절을 한 후 우상 앞에 드렸던 제물을 우상 앞에서 그 신과 더불어 교제를 하면서 그 제물을 먹습니다. 우리가 누군가 사귀려면 함께 먹듯이 신과 사귀는 그런 순서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음식을 다 먹고 난후에 비로소 제사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비록 제사할 때 절은 안 했을지라도 그 제물을 먹고 참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우상 제사를 드린 것과 꼭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성찬 예식을 예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찬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상 섬기는 바벨론 사람들이 바로 그렇습니다. 다니엘은 "제물을 먹지 않으므로 출세를 못하면 못했지 포로 신세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의였습니다. 죽도록 고생할지언정 제물은 못 먹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지조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께서 환관장을 통해서 다니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었더니 채소만 먹고도 공부 잘하고 채소만 먹고도 일을 잘 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총리 중에 으뜸 총리가 됩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믿음의 지조를 저버리고 총리가 되었다면 다니엘에게 그것이 복이요, 성공이겠습니까? '차라리 출세를 못할망정 나는 믿음을 지키겠다'라는 것이 다니엘의 결심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결심이어야 합니다. 다니엘은 이처럼 신앙의 지조를 지켰습니다. 신앙의 지조는 목숨을 내 놓고 지킬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니엘에게는 신앙의 지조가 출세보다 더 귀했습니다. 다니엘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로 결심하더니 결국 목숨을 내 놓고 실천하여 나중에는 승리하고 성공했습니다. 다니엘의 결심이 우리의 결심이어야 하겠습니다.


둘째 중보기도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9: 3).

  베드로는 소돔성이 멸망당할 때 하나님께서 의로운 롯을 건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벧후 2:7). 거기만 보면 롯이 '의롭다'하는 것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사실상 소돔 고모라 성을 뒤 엎을 때 롯을 건져낸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창 19:29). 아브라함은 아버지 없는 조카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조카의 뒤를 잘 봐주고 재산을 불려 주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그 재산을 다 삼촌이 가로챘을런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은 그걸 늘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가를 보내주고 살림을 따로 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소돔에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왠일 이십니까" "지금 내가 소돔 성의 백성들을 더 이상 두고 보지를 못하겠다. 오늘 밤에 내가 끝내고 말겠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조카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사자를 붙들고 간곡히 기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날 해 뜨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유황불이 내려와서 소돔성을 뒤엎을 때 롯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에 가서 성경은 소돔 성을 뒤엎을 때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구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롯은 멸망당할 소돔 성 사람과는 달리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기도는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기도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삼촌 되는 아브라함의 중보기도를 통해서 그 기도 덕분에 구원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나를 위해서 누가 기도해 준다는 사실은 그만큼 귀한 것입니다. 누가 내 이름을 수첩에 써 놓고 나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기도해 주고 때로는 나를 위해서 밤새워 기도해 준다면 그처럼 귀한 도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처럼 아브라함의 조카를 위한 중보기도가 롯에게는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다니엘이 결심을 하고 실천한 것이 곧 중보기도였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장 1절에서 3절을 보면 '메대 족속 아하수에로의 아들 다리오가 갈대아 나라 왕으로 세움을 입던 원년 곧 그 통치 원년에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가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기를 결심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책이 바로 다니엘 서입니다. 그런데 포로생활 하는 중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언한 것을 기록한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을 보니 유대 사람들이 바벨론에 망하고 예루살렘은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고생하는 기간이 칠십년에 마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예언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 유대 나라를 1차로 공격하고 이어서 2차로 공격하고 또 제3차로 공격할 때 완전히 망합니다. 그런데 1차로 공격하고 죽일 사람은 죽이고 포로로 사람을 잡아 올 때가 주전 605년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기세를 부리던 바벨론이 파사 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 파사 나라의 왕 고레스가 살펴보니 그 나라 한 구석에서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너희들 왜 이러고 있느냐? 빨리 돌아가라"고 하면서 포로들에게 귀환 명령을 내립니다. 그때 고레스 왕이 스룹바벨이라는 사람을 총독으로 세우고 그 사람의 인솔하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제1차 포로 귀환입니다. 그 다음에 2차 3차 계속되었습니다. 유다가 제1차 침략을 당할 때가 주전 605이었고 제1차로 귀환할 때가 주전 537년입니다. 605년에서 537년이면 72년입니다. "그런데 70년만에 회복된다고 했는데 왜 72년입니까?"라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70년이 맞는 까닭은 포로로 잡혀가는 그 해와 포로에서 돌아오는 그 해를 빼 버리기 때문입니다. 영락없이 70년이 아닙니까? 이 사실을 다니엘이 깨달은 때가 언제냐 하면 바로 한해 전인 주전 538년입니다. 538년이 먼저고 그 다음 해가 537년입니다. 537년에 포로생활에서 해방이 됩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1년 전에 깨닫고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포로생활 하는 백성들의 믿음을 보면 이게 아니다 싶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국 전쟁 때 거제도 수용소 생활처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일정하게 정해진 지역 안에서만 살게 하였을 뿐입니다. 필요하면 노동력을 동원시킵니다. 그리고 포로들로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결혼하여 살게 하였습니다. 그러기를 70년이 지나다 보니 제법 이제는 자리가 잡혔습니다. 결국 살만큼 되었을 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는 귀환명령이 내렸습니다. 즉 돌 하나도 제 자리에 놓여 있지 않을 정도로 훼파된 성곽 그리고 성전도 쑥대밭이 되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다시 돌아가서 땅을 일구고 성전을 다시 건축하고 예루살렘성을 다시 쌓고 나라를 세우는 고생을 생각하면 말이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안정된 삶을 내버려두고 돌아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민의식을 깨우치고 아무리 고생이 될지라도 믿음으로 돌아가겠다는 사람은 적은 무리 일뿐입니다. 이것은 기도할 문제였습니다. 다니엘은 그때 엎드려서 "하나님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십시오. 선민의 믿음, 그리고 선민 의식 빨리 회복하고 가나안 땅에 가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하도록 도와 주십시오"라는 뜻의 기도를 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그렇게 결심하고 기도했더니 1차, 2차, 3차로 가나안까지 무사히 돌아왔고 돌아와서 성전을 회복하고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고 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보기도가 이처럼 귀한 것입니다.

  다니엘은 으뜸 총리로서 자기 하나를 위해서 기도하자면 십분이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했더니 기도가 응답이 되어 이스라엘 나라가 가나안 땅에서 회복이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니엘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기로 결심하고 실천한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중보기도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지금 남북의 두 정상들이 만납니다. 이래서 만나기 시작하게 되면 통일은 시간 문제가 될런지도 모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우리가 이를 실행하여 기도하는 날 우리 나라가 통일되는 새나라가 될 것입니다.

  대영제국 안에는 잉글랜드가 있고 스코틀랜드가 있습니다. 그런데 잉글랜드가 강성해서 스코틀랜드를 점령하여 합병을 시켜 버리고 대영제국이라고 한 것입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민족과 종교가 다릅니다. 대영제국 안의 잉글랜드는 종교가 성공회입니다. 스코틀랜드는 우리와 똑같은 장로교입니다.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 존낙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하였습니다. 그 때 존낙스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에게 죽음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말은 오해하면 안됩니다. '하나님 이것 주십시오. 안 주시려면 차리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이런 식으로 기도해도 됩니까? 라고 말하는 분도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존낙스의 경우 우리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존낙스는 지금 천주교에서 오도하는 잘못된 신앙 때문에 구원 문제가 심각합니다. "종교가 개혁되고 바른 믿음으로 우리 민족이 구원을 얻어야 되겠는데 하나님 조속히 이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십시오. 이 민족이 구원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내 한 목숨 바쳐서 내 민족이 구원을 얻는다면 나는 그것을 원합니다."라는 뜻의 이야기입니다. 나중에는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스코틀랜드가 일색으로 장로교가 되어 종교 개혁에 성공을 했습니다. 그때 대영제국을 통치하던 왕이 메리 여왕이었습니다. 그 메리 여왕이 얼마나 종교개혁을 핍팍했는지 모릅니다. 그 때 메리 여왕이 기도하는 존낙스에 대해서 "기도하는 존낙스 한사람이 완전히 훈련되고 무장된 일개 사단보다 나에게는 더 무섭다"라고 하였습니다. 일개 사단이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일개 사단이 쳐들어오면 서울이 뒤짚히고 맙니다. 기도하는 한 사람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일개 사단이 기도하는 한 사람을 못 당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민족을 위한 중보기도가 성공을 거두고 승리하고 민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바로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해서 중보기도 하기로 결심하고 실행하여 이 나라 이 민족을 구원해야 하겠습니다.


셋째 겸비한 자세를 갖기로 결심하였습니다(10: 12).

  본문 10장 12절을 보면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보여주는 환상이 지극히 신비로운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그 뜻을 몰랐습니다. 너무 답답하였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비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가 다 지나간 현재이기에 지금은 다 알고 있지만 다니엘이 환상을 보는 그 때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환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벨론 나라가 기승을 부리는 최강국인가 했더니 파사 제국이 일어나 바벨론을 멸망시킵니다. 여기까지는 다니엘이 경험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름도 없던 헬라 나라가 일어나더니 파사를 침공하고 멸망을 시킵니다. 그런가하면 헬라 나라가 망하더니 남방왕과 북방왕이 등장을 했습니다. 남방 왕은 애굽을 가리키고 북방왕은 수리아를 가킵니다.  남방 왕이 강성 할 때에는 북방 왕을 치고 북방 왕이 강성할 때는 남방 왕을 치는데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유대 나라는 쉽게 침략을 당합니다. 남방 왕보다는 북방 왕이 강합니다. 유대 나라를 점령한 후에 수리아 사람들이 성전을 더럽히고 성전 마당에다 우상을 세워놓고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돼지를 잡아서 제사를 드려 번제단을 더럽히고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고 얼마나 유대인들을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그때 유대 나라에서 마카비라는 사람이 일어나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한때 성공하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신구약 중간 시대에 되어진 일입니다. 다니엘이 깨달을 수가 없어서 겸비한 자세를 갖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겸비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까닭입니다.

  이것은 구약에 절대로 나오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구약과 신약사 중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세계 역사 중에 대제국들이 흥망성쇠를 이루면서 인간의 역사가 흘러나가는 것을  보여주는데 다니엘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 위해서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와서 "이것은 인류역사가 흘러가는데 제 멋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전부 하나님이 주장하신다"라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다니엘은 깨달았습니다. 겸비하면서 깨달았고 깨닫기 위해서 겸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아 이것을 써 놓는 것이 네 사명이요, 바로 인류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만민에게 전파하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한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깨닫기 위하여 겸비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성공하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뜻을 알기를 원하십니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실패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천하의 어떤 지식보다도 귀한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뜻을 아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그 뜻을 아는 사람만이 인생을 성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 바로 다니엘입니다. 우리는 겸비한 자세를 갖고 나를 향한 그리고 인류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고 승리하고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다니엘은 신앙의 지조를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것은 목숨을 내 놓고라도 지킬 값어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지조를 저버리고 출세하는 것은 성공이요, 복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중보기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포로 되었던 백성들은 무사히 가나안에 돌아가서 나라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니엘은 하나님의 자기를 향한 뜻을 깨닫기 위하여 겸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자기 사명을 깨닫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성공하였습니다. 다니엘의 결심이 우리 결심이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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