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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창 24:3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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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에게 돌아올 유산을 물려 달라고 조른다. 결국에는 아버지가 물려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둘째 아들은 모든 것을 탕진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나간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잔치를 열어 준다.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형이 보니 집에 잔치가 벌어진다. 형이 아버지에게 불평한다. 아버지! 동생은 나가서 모든 것을 탕진하고 돌아왔고, 저는 집에서 아버님께 순종하면서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잔치는 열어 주지 않고 어떻게 된 것입니까?

형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고, 동생은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일꾼을 찾기 위해서 인력시장에 나간다. 6시에, 9시에, 12시에, 오후 3시에, 그리고 오후 5시에 일꾼을 불러다가 일을 시켰다. 저녁 6시가 되어 주인이 일꾼에게 일당을 나눠준다. 6시에 온 사람이나 12시에 온 사람이나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의 일당을 준다. 새벽부터 나와서 일한 사람이 자신의 공로를 자랑한다. 나는 이 사람들보다 더 튼튼하고 일도 잘해서 새벽부터 똑같이 일을 했는데 왜 오후 5시에 온 사람과 같은 액수를 주는가?

새벽부터 일한 사람은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고 오후 늦게 온 사람들은 불러서 일시켜 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다.

이같이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자랑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과 자신을 비교한다. 나는 집에서 열심히 일을 했지만 동생은 나가서 탕진하고 돌아왔다. 나는 새벽부터 열심히 일했지만 오후 늦게 일하기 시작한 저 사람은 약해서 일도 얼마 하지 않았다.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마음에 불평이 생긴다. 불만으로 가득차있다.

그러나 은혜로 사는 사람은 단 한가지 감사할 뿐이다. 나 같은 사람을 불러줬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23명의 대표팀 선수들이 피파에서 나오는 배당금을 받게 되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선수들을 A, B, C 급으로 나눠서 지불하려고 하였다. 나름데로 합리적인 방법일 수도 있다. 7게임 모두 뛰면서 골을 넣은 선수가 있는가 하면 일분도 뛰지 않고 벤치에 앉아있던 선수도 있다. 똑같이 배당금을 나눠준다는 것은 분명히 무리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선수들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주는 것은 마음 데로 나눠줘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주시든지 우리는 똑같이 나눠 가질 것입니다. 결국은 선수들의 의향도 이렇고, 국민 여론도 똑같이 나눠주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에 균등하게 나눠준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만일 선수들이 자신의 공로를 앞세우고 벤치에 앉아있던 선수들과 비교한다면 그들의 마음에 불평이 앞설 것이다. 불만이 앞설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공로를 앞 세우기 보다는 은혜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포루투칼과의 경기에서 박지성 선수가 멋진 골을 넣었다. 특유한 세리머니도 없이 히딩크 감독을 향하여 뛴다.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긴다. 왜 그랬을까? 나 같은 무명의 선수를 선발해서 뛰게해 준 은혜가 감사해서 그랬을 것이다.

이같이 공로를 앞세우면 분열을 가져오고, 불행을 가져온다. 그러나 은혜를 앞세우면 하나가 되게 하고 행복을 가져온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해 진다.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공로를 자랑하며 살지 말자. 은혜에 감사하며 살자. 이렇게 은혜에 감사하려면 우리는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한 남자가 길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던 참새가 이 남자 머리위로 그만 똥을 싸고 말았다. 그러자 똥을 맞은 남자가 자신의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휴우 황소가 하늘을 못 나는 게 천만다행이네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멕시코의 일부 지역에서는 온천과 냉천이 나란히 발견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현상 때문에 그 지역의 아낙네들은 빨래를 냇가로 가지고 와서 온천에다 옷을 삶은 다음 냉천에다 행구곤한다. 이 광경을 자세히 지켜보던 어느 관광객이 멕시코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위대한 어머니인 자연은 매우 관대해서 냉천과 온천을 자유롭게 사용할 정도로 많은 물을 공급해주고 있네요." 멕시코 친구가 대답하기를 "그렇지도 않다. 비누가 없다고 사람들의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긍정적인 관점으로 보면 새가 똥을 싸고 가도 감사하지만, 부정적인 관점으로 보면 냉천 온천이 같이 나와도 불평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관점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긍정적인 눈으로 보게 되고 긍정적인 눈으로 볼 때에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간다. 행복해서 감사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면 행복해 진다. 감사의 훈련이 되어야 한다. 감사의 습관이 들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내게 주신 복을 세어보는 마음의 질문을 가져보라. 부정적인 관점을 지닌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복을 세어볼 수가 없다. 그러나 긍정적인 관점을 가진 사람은 내게 주신 복을 세어볼 수 있다.

본문의 말씀을 보라.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자부감을 찾으러 그의 고향으로 갔다. 즉 이삭의 아내를 찾으러 간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은 아브라함에게 임하신 복을 하나씩 열거한다. "나의 주인에게 복을 주시어 창성하게 하시되 소와 양과 은 금과 종들과 낙타와 나귀를 주셨고, 사라가 노년에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 아들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아브라함의 자부를 찾기 위해서 왔노라"고 전한다.

이 말씀 속에 아브라함의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와 양과 은금과 종들과 낙타, 이 모든 것은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는 것이라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어 창성케 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

긍정적인 관점으로 나에게 주신 어떤 복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갖고서 복을 찾아보아라. 나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 스스로 내게 주신 복을 찾아보았다. 그리고 적어 보았다. 복음의 능력이 믿어지는 것도 복이요. 성경을 읽을 때에 믿어지는 것도 복이요. 말씀을 전하는 목사가 된 것도 복이요. 은혜로운 교회에 담임목사가 된 것도 복이요. 내 주변에 좋은 협력자가 있는 것도 복이요. 최선을 다해서 돕는 교역자들과 상근자들이 있는 것이 복이요. 소신껏 목회할 수 있도록 돕는 장로님들. 한 마음으로 협력하는 성도님들. 돈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하시니 이것도 복이요. 받은 복을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말씀을 준비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자장면이 생각났다. "하나님 자장면을 주심도 복입니다." 여름에 시원한 수박도 주시고 시원한 냉면도 주시니 감사. 등이 가려웠다. "긁을 수 있는 손톱을 주심도 감사합니다."

이렇게 내게 주신 복을 세어볼 때에 나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였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는 이런 질문을 마음에 갖고 산다면 내가 경험하는 모든 것이 결국은 감사의 조건이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이 질문을 하게 되니 비가 오는 것도 복이요. 태풍이 불어서 자연의 질서를 깨닫게 함도 복이요. 살면서 겪는 고통조차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생각으로 바뀌게 된다.

이번 맥추감사주일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에 "나는 어떤 복을 받았는가?"를 세어보아라. 분명히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며 살 것이다.

어떤 청년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좋은 습관을 갖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자리에 들 때가 매일같이 받은 복 200개를 세는 것이다. 이 청년은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청년들과 함께 자장면을 먹으러 갔는데 회장이 오래 기도를 한다. 기도하고 아멘했더니 자장면이 모두 불어서 먹기 어렵게 되었다. 늘 감사가 습관에 들었던 이 청년이 "하나님, 저희가 배고픈 줄 알고 기도하고 났더니 곱빼기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습관을 갖고 있는 청년이 다른 청년에게 받은 복을 세어보는 좋은 습관을 전한다. 이 청년은 매일같이 받은 복을 200개를 세는데 친구에게 받은 복을 세어보기 시작하라고 권고한다. 200개가 어려워서 백 개만 채우기로 약속하고 매일같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복을 세기 시작했다. 말이 100개이지 늘 변함없는 일상의 삶에서, 그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100개는커녕 10개도 채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복을 세는 친구들에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왜 그 친구라고 짜증나는 일이 없겠나. 답답한 일이 많이 있지만 그렇게 복을 세다 보니 받은 복이 너무 많음을 깨닫게 되어, 남 보기에 화가 나는 일도 그저 담담한 마음으로 웃으면서 넘길 수 있다고 한다.

받은 복을 세어보는 습관을 들이자. 하루에 백개가 어려우면 우선 오십개부터 시작해보자. 당신의 삶은 분명히 하루 하루가 달라질 것이다. 오십개를 세고 얼마가 지나면 백개로, 백개에서 이백개로 받은 복을 세어보는 습관을 가져보라.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분명히 달라진다.

만약 지구상의 인구가 100명밖에 되지 않는 마을로 축소된다면, 물론 현 세계의 인구 구성, 인구 비율은 그대로 보존한대로 축소한다면, 이 조그맣다고 할, 또 다양하다고 할 마을은 어떤 모습이 될까? 스탠포드 의대의 의학박사인 필립 M. 하터가 이 계산을 시도했다고 한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57명은 아시아인, 21명은 유럽인, 14명은 서반구(미주)인, 8명은 아프리카인. 52명은 남자, 48명은 여자. 70명은 비기독교인, 30명은 기독교인. 6명은 세계 부의 59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그 6명은 모두 미국 사람. 80명은 적정수준에 못 미치는 주거 환경에 살고 있고, 70명은 문맹, 50명은 영양 부족, 1명은 죽기 직전, 1명은 임신 중, 1명은 대학 교육을 받은 적이 있고 1명은 컴퓨터를 소유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좋은 집에 살고, 먹을 게 충분하고,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선택된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좋은 집, 먹을 것이 있는 데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면, 아주 엘리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 만약에 전쟁의 위험, 감옥에서의 고독, 고문에 의한 고뇌, 기아의 괴로움 등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세계 인구 상류 500만명 중의 한 사람인 셈이다. 만약 고통, 체포, 고문, 혹은 심지어 죽음의 공포 없이 매주 교회를 다닐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는 곧 지구상 30억 인구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누리는 행운아이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있고, 몸엔 옷을 걸쳤고, 머리 위로는 지붕이 있는 데다 잘 곳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 75%보다는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고, 은행에 돈이 있고, 지갑 속에도 있고, 어딘가 잔돈만 모아놓은 동전통도 있는 사람이라면, 지구상에선 상위 8%의 부자에 속한다. 만약 고개를 들고 얼굴에 웃음을 머금으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환경이나 생활이 어렵다고 느끼신다면, 이제 그 생각을 바꾸라. 우리는 하나님이 선택한 축복받은 사람이다.

사랑하는 성도여! 받은 복을 세어보는 습관을 갖자. 당신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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