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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친한 친구 되기 (시 2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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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동안교회)
 

성인 5명중에 한명이 관람했을 만큼 흥행에 성공했던 ‘친구’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관객의 타깃 층을 보면 30대 이상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연령층의 한계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부산이라는 제한된 지역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의 갈증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했기 때문이라고 평합니다.

현대인은 시장개방, 구조조정, 민영화, 탈규제 등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부도, 배신, 소득감소, 파산, 가정불화, 가출, 이혼, 자살 등 우울한 현실을 접하고 살아갑니다.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하며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불안하기만 합니다. 믿음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겼던 부모도 자녀도 부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자기 김밥을 먹었다고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인 자식이 있는가 하면, 사는 것이 어렵다고 자녀와 동반자살을 하는 부모도 있으며, 봉급 때문에 부부가 서로를 죽고 죽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끼리끼리 울타리를 치고 서로 보호받으려는 현대인의 본능으로부터 진정 믿을 수 있는 것은 친구의 의리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게 된 것입니다. 거꾸로 영화의 이런 메시지가 관객들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도, 우리가 사는 시대가 얼마나 두려움과 불신으로 가득하며 동시에 변함없이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일평생 사람과 맺는 관계로 삶을 지속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계를 통해 우리 삶은 시작되었고, 관계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설정되기도 합니다. 그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선택할 수 없는 관계도 있습니다. 부모와의 관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와 관계를 맺지 않고는 우리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잘못 맺은 관계는 일평생을 어둠 속에서 살게 할 만큼 부모-자식간 관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인간은 그렇게도 갈망하던 충분한 신뢰와 안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과 예정을 따라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을 모르거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못 맺고 있을 경우에는 당연히 삶의 이유와 의미 그리고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꿈과 계획을 이뤄 성공했다 하더라도 성공이 존재목적을 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자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 때문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요 15:15 말씀은 놀라운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 친구란 막연히 가까운 관계가 아닌 신뢰를 바탕으로 삶의 깊은 부분까지 나누는 아주 밀접한 관계의 친구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단절된 관계를 아주 밀접한 친구 관계로 회복하시고자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하나님을 “그분은 너희와의 관계에 대해 열정을 가진 하나님이시다(NLT)”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친구 삼으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이제 성령으로 날마다 동행하시며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그러한 주님을 우리는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며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주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고 그 가운데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는 행동을 바꾸는 것 보다 하나님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하는데, 보통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한다 할 때 하나님을 느끼려 합니다. 뭔가 보고, 느끼고,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임재를 체험하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하는 모습과 방법을 찾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해답을 주고 있는 말씀이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만이 아니라 어렵고 힘든 일 앞에서도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라는 단어는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과 늘 동행하고 함께 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누릴 수가 없습니다.

‘고통과 고난이 가득한 이 땅에서 어떻게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입니까?’라고 되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는 죄로 인해 사망 가운데 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미래와 희망이 없는 존재였는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주시고, 영원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고난과 아픔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구속 받은 기쁨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뻐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은 기뻐할 수 있도록 예비해 두기도 하셨지만, 동시에 기뻐할 이유를 이미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자주 자주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초점이 없는 것과 부족한 것에 늘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기쁨보다는 없는 것에 대한 불안함, 불안함을 없애기 위한 초조함 때문에 더욱 힘든 것은 아닌지요. 가끔 사람들에게 질문을 해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이든 바꿀 기회를 30초 준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현재대로 있겠다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부족한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부족한 것을 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찾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이미 허락하신 것이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하심 앞에 응답하는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극한 상황에 이를 때에도 끊임없이 기도해야함을 말합니다. 여기서 기도하라는 명령은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기도할 때 쓰는 단어와는 달리,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에 초점을 맞추고 그 분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뜻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정도로 졸라서 무언가 얻어내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통해 얻는 가장 큰 유익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변해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왜 허락하셨는지, 제가 어떻게 풀어 가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의 관점을 제게 주십시오.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주님의 마음을 따라 일을 해결하고 사람을 대할 때 복된 결과를 얻을 뿐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며 특징인줄 알면서도 기도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성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중심의 얘기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기도하던 중에 나 중심적인 생각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도구로 갖추어지는 과정은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인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일을 시작하기위한 오프닝 세레머니로서도 또한 엔딩 세레머니로서도 아닌 일의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뜻을 살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이자 세상 사람들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마지막으로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범사에 이미 감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인정하고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로렌스 형제作)’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17세기 로렌스 형제가 전쟁 후 삶에 회의를 느끼고 들어간 수도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임재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는 여생을 아름답고 보람 있게 살고자 들어간 수도원에서 정작 자신에게 주방에서 밥하고 설거지 하는 일만 시키는데 몹시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인생의 고상한 목적을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나에게 기껏 맡기는 일이 설거지란 말인가!’ 그러나 곧 하찮은 일상 가운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로렌스 형제는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거지 하는 가운데도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 삶 어느 구석에라도 함께 가시는 하나님!’ 그러면서 하나님과 대화하기 시작했고, 대화 내용을 편지에 담아 수도원 원장과 주고받았는데, 바로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책에서 로렌스 형제는 숨기도(Breath Prayer)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등 짧은 문장이나 성경구절을 가슴에 품고 숨쉬고 내쉴 때 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숨기도처럼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임재하심을 체험하고, 임재하심 앞에 바르게 반응하며 주님과 가까워 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 방법에는 이 밖에도 많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잊기 쉬운 순간에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준비해두었다가 문득 다시 깨닫도록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메노나이트나 경건주의와 같은 영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방법입니다만, 회의를 하다가 중요한 안건이 나오거나 토의가 진지하게 진행되는 중간에 한 사람이 종을 ‘땡’ 하고 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생각과 논쟁을 중단하고 10~15분간 깊이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 앞에 우리가 나아갑니다.’라고 하나님께 여쭌 후 다시 논의합니다. 그러다 또 심각한 논쟁에 빠지면 다시 한 사람이 종을 치고 다시 기도의 자리에 함께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교회에서도 이 방법을 사용해보면 어떨까, 분열되고 과열된 논쟁 분위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여러분도 구역과 부서에서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분쟁과 과열의 순간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모든 논의가 하나로 조정되는 체험을 해볼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중요한 약속을 하면 핸드폰에 알람 장치를 해서 잊지 않도록 주의 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알람으로 자신을 일깨우고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함을 일깨워 줄 다양한 방법을 개발한다면 임재하심에 합당한 반응과 응답을 드리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으며,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친구로 여기시는 백성들에게 말씀을 묵상할 때 이행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알려주십니다. 사무엘상 3장 21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한 문제를 놓고 반복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은 묵상이 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고 싶어 하시고, 가까이 두시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에게 언약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욥은 일용할 양식보다 말씀을 더 소중히 여겼다고 고백했으며, 다윗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 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묵상에 대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여 즐거워하는 자로다”

복 있는 인생이란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의 삶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의미에서 첫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인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인생의 표준이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자신의 욕망뿐으로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인생의 기준을 정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영향을 받는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상대화 시키는데 능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것, 부서지지 않는 것, 깨어지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전제조건이 인정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사람입니다. 죄인이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죄에 해당하는 원어 ‘하마르티아’란 ‘표적에 맞지 않고 빗나가다’라는 뜻입니다.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목적을 좇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기준이 없는 사람(악인)은 인생의 목표가 있을 리 없습니다.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죄인)은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상을 전제로 하는 생각과 마음을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묵상’이란 단어를 동양적인 의미로 생각해서 가만히 침묵 속에 잠잠히 잠기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힘을 다해 소리를 내어서 읽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대로 살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 묵상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의 삶을 보면 하루 동안 누구를 만나고, 어떤 사람과 교제하는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제하는 사람의 영향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요소는 무엇이며, 영향을 끼치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진단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사람과 가까이 만나고 있다면, 이러한 만남과 대화를 경계하십시오.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비신앙적인 생각에 젖어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 사람을 다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에는 한계가 있고 정해진 만남의 범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일깨워주는 친구가 있다면 참으로 유익될 것입니다. 대화 중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함께 하심, 인도하심과 섭리하심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둔 사람은 절대 무너지지 않습니다.

자살사이트에서 만나 죽음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가끔 보게 됩니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사람들이 만나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나눈 대화 때문입니다. ‘살아보니까 별수 있냐. 어차피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잿빛 인생 희망이 없잖아.’ ‘살아서 뭐하냐. 일찍 죽자.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 할 수 있는 네가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철학과 이성, 논리와 설득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지 살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당장 솔깃할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허무로 인도합니다. 그 결과가 허무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귀한 인생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좋은 친구, 영성을 깨워줄 친구와의 만남은 이렇듯 중요합니다. 그런데 보다 더 본질적인 만남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말씀과의 만남입니다. 말씀과 깊게 교제하는 시간을 가지기 바랍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 주시는 삶의 지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는 것은 약속으로 주어졌습니다. 행동이야 어찌됐든 십자가상의 강도도 구원 받았던 것을 보면 믿음만으로 구원받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세계를 보는 시각과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사명자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치유하는 일을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일찍이 부르셔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 세우시고,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도전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시대가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는 시대는 아닙니다. 어쩌면 총선 이후 더 큰 혼란이 우리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지 모릅니다. 거세게 흘러들어오는 쾌락과 향락의 문화가 우리를 병들게 할지도 모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뜻을 정하여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쓰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대세 속에 자신들을 맡기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왕이 내리는 상의 진미를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고집해야합니다. 그럴 때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통해 하나님 역사를 다시금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희망이요 꿈이 되기를 원한다면 말씀 앞에 자신을 다시 돌아보십시오. 여러분 삶 속에 지금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행세하는 것은 무엇인가 점검해 보십시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주님의 임재하심 속에 교제하며 살아갈 때 여러분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직접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지 마시고 하루에 한번쯤 오늘 들었던 본문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묵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말씀이 아닙니다. 살아서 생명력이 있고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 심령과 골수까지 쪼갭니다. 말씀의 인도함을 받는 인생은 삶의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발 위에 등불이 되어 실족하지 않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선택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선택 하는 대로 삶의 방향은 좌우될 것입니다. 그 앞에서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선택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말씀을 늘 묵상함으로 주님의 좋은 친구 되시기를, 더불어 삶의 놀라운 역동성과 창조성을 체험하며 시대의 어둠을 밝혀 나가는 동안의 귀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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