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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임마누엘 가정의 복 (삼상 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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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오늘은 가정의 달 5월의 첫 주일로 어린이날주일로 지키는 매우 뜻깊은 날입니다. 기도하기는 성도 여러분 가정마다 말씀의 제목처럼 임마누엘의 복이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임마누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임마누엘의 가정이 되겠습니다.’

에릭 프롬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자는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여 유명합니다. 늘 하는 일이면서도 늘 서툰것 같은 성도의 교제와 인사에도 기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성도가 은혜 받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줄로 믿습니다. 모든 면에서 결국은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들이 세련되고 앞서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이 주일이나 어버이 주일이 다가오면 고민이 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주일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린이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버이 주일이 되면 어버이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어버이를 모시고 있는 자녀를 대상으로 해야 하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임마누엘 가정이라는 큰 주제이기에 모두가 다 어우러지는 그런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며 두 번을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방황하며 실의에 빠져있던 모세를 부르실 때에도 '모세야 모세야~' 하시며 두 번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을 부르실 때 두 번씩 반복하여 부른다고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역을 강조하시기 위하여, 어느 때에는 매우 급하셔서 두 번을 연속하여 부르셨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마치 신약 성경에서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주님께서 말씀 하실 때 응답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장면입니다. ‘말씀 하옵소서. 주의 계집종이 듣겠나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부르실 때에 겸손하게 응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등학생들에게 부모님의 이름을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무슨 자 무슨 자 입니다.’ 라고 대답하면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하, 요 녀석 봐라’ 하면서 마음에 뭔지모를 뿌듯함이 느껴집니다. 집안 분위기가 상당히 괜찮은 가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게됨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일단 좋은 점수를 주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월이 바뀌어도 우리가 버리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가 예의입니다. 신앙생활도 예의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의와는 아주 거리가 먼 모습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무엇보다도 가정이라는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자유스러워 졌다고 해도 부모와 자식 간에 지켜야 할 예의가 있고, 성도와 성도간에 지킬 예의도 있습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전화하는 것을 본의아니게 전철이나 버스에서 듣게되면, 지금 친구한테 전화를 하는 것인지 부모님께 하는 것인지 전혀 구별이 안 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화 중 가끔씩 엄마, 아빠 소리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지금 부모와 통화하는 것이구나 하고 알 정도입니다.

아무리 다정하고 격의가 없다고 해도, 격의 없는 것과 예의 없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곤란합니다. 성도와 목회자의 관계도 아무리 은혜로운 관계라고 해도 그것이 예의 없는 관계를 의미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의를 지키면서도 아주 편안한 성도들이 우리 평안의교회에는 너무나 많음을 저는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중 한 사람 소개한다면 유만희 권사님이십니다.

오늘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말씀 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세는 갑자기 튀어나온 말이 아닙니다. 어릴적부터 어머니 한나에게서, 그리고 스승 엘리 제사장의 가정에서 꾸준히 배우고 익힌 삶의 내용이요 표현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하는 일식집 주방장에게 물어봤습니다. 얼마나 해야 이런 카운터에 나와서 손님을 마주대하며 주방장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최소한 9년은 걸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밥 짓는 일을 3년 정도는 하면서 한줌에 스시에 적당한 양만큼을 집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좋은 생선을 골라 알맞게 써는 일을 3년 정도 하고 나면, 마지막으로 3년은 왼손으로 밥을 떠고 오른손으로 생선 조각을 갖다가 딱 붙이면 정확한 밥알 수와 보기에도 먹음직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라고 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최소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10년은 되어야 전문가라고 불러 주는 것입니다. 대학원 나오면 매스터라고 붙여주는 이유도 거기있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평안의교회는 교회학교 교사 10년을 근속하거나, 성가대원으로 10년을 근속한 분들에게는 아주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여 그 분들을 위로하고 있는데 바로 해당되는 가정의 부부를 제주도로 다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최고 수준의 호텔에서 쉼을 얻게 하고, 맛있는 식당만을 엄선하여 입맛을 회복시키고, 부부가 모처럼 기분 좋은 여행을 하실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하는 것입니다. 올해로 그 일이 20회가 되었습니다.

성가대를 10년을 근속한다는 것, 교사를 10년 근속한다고 하는 것, 9년하고 기분 나뻐서 그만 두었다가, 다시 또 하면 10년 근속이 아닙니다. 10년 하는 동안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항상 여유 있는 시간만 있겠습니까? 바쁘기도 하고, 직장이 바뀌기도 하고, 기분 나쁜 일도 있고, 속상한 일도 있고, 싸우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명의 자리를 10년을 지켰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분에게 감사의 표현을 하는 것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곁눈질로 무엇을 해 본다고 하면 우리는 큰 일꾼 될 수 없어요. 예를 들어서, 곁눈질로 운전을 배웠다고 하면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겠습니까? 모범운전자가 되겠어요? 더구나 곁눈질로 신앙을 배웠다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성도가 되겠습니까? 눈썰미가 좋은 분들으요, 교회 생활 2- 3년 하면 이것저것 다 합니다. 선교회장도 하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다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흉내내는 것이지요.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섬긴다고 하는 것은 준비되고, 훈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사무엘은 어머니 젖을 먹을 때부터 그는 훈련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의 집에서 엘리 제사장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는 훈련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언제든지 듣겠다고 하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하면, 아니오부터 나오는 사람이 있어요. 무슨 대화를 하면 아니오부터 나오는 사람, 그 대화의 화법을 잘 들으면 그 사람의 인격 바탕을 알 수 있어요. 네거티브 마인드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요.

예를 들어서, ‘자, 오늘은 너무 감사한 일이 많습니다.’ 그러면 얼른 말을 받아가지고, ‘뭐, 감사하기보다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언제나 상대방의 말을 뒤집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한 두 번이 아니예요. 늘 주목해 보면 그 사람의 말투는 항상 다른 사람의 말을 뒤집고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은 큰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항상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덮고 시작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 보다는 그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 하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감사할 뿐만 아니라 ‘오늘은 너무 기쁜 날이네요.’ 이렇게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면서 자기의 의견도 덧붙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언어는요, 이 사무엘의 언어와 같아야 합니다. ‘말씀 하옵소서. 듣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순종해 보고 뭐가 잘 안되면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 이렇게 해 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네요.’ ‘아, 그런가요? 내가 왜 그것을 몰랐을까? 그러면 어쩌면 좋을까요?’ ‘이런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목사는 그에 대해서 존경심이 생겨요. 그 자신은 그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지만, 목사의 의견을 존중해 주었다고 하는 그런 좋은 원만한 관계가 생겨요. 처음부터 ‘그건 아니고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관계가 단절이 됩니다.

지금 사무엘의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세, 하나님의 종의 자세입니다. 기본이 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무엘에게 앞으로 행할 일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 일은 사람들이 들으면 두 귀가 울릴 것이라’ 엄청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이 일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 받지 못 할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13절에 보니까 내가 엘리의 집을 심판하겠다. 심판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다. 모르고 죄 짓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해야 할 대부분의 것들은 유치원 다니면서 이미 다 배웠습니다. 유치원 안 다녀도 괜찮아요. 저도 유치원 안 다녔어요. 다니고 싶었지만, 그 때는 다닐 만한 여건도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알고 짓는 죄 중에 사람에 대한 것은 그래도 용서의 기회가 있는데, 하나님에 대하여 그 하나님에 대한 부분도 예배에 대한 부분은 우리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엘리의 죄가 무엇입니까? 너가 아는 죄악에 인함이라. 도대체 엘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그의 죄악은 직접적인 것은 아닙니다. 간접적인 거예요. 자식들이 제사를 소홀히 여기고, 업신여긴 죄, 그 일을 네가 방치한 죄라고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죄를 하나님께서는 엘리에게 물으셨고, 네가 어떤 속죄의 제물이나 어떤 예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단정 지으셨어요.

신약에 보면 성령을 훼방한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살면서 두려워 해야 할 일은 하나님에 대해서, 특히 예배에 대해서 무시하거나 만홀히 여기거나 방해한 죄는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지요.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에배를 방해하는 일이 우리의 자식들의 행위거나 나의 행위가 되면 안 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나서 제사 후에 그것을 다 나누게 되어있는데, 그 중에 좋은 것들을 먼저 자기들이 가져가서 먹었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무시 하는 일은 용서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예배를 통해서 무시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참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심판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이제 사무엘이 그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 엘리도 눈치가 있습니다. 아침에 사무엘을 불러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 하시더냐. 내게 한 가지도 남기지 말고 다 이야기 해 주었으면 좋겠다. 엘리가 얼마나 궁금해 했겠어요? 결국 사무엘은 엘리에게 다 이야기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 엘리는 이렇게 수용합니다.

18절 말씀입니다.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 하셨으면, 그것은 다 수용해야지. 내가 다 받아들여야지.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이 생각하셨으면,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면 받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를 어떻게 부상키시고, 어떻게 이끌어 주시는지 보게 됩니다.

19절입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오늘 여기에서 나왔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88년을 사시고, 임종하시면서 3가지를 말씀하셨는데, 그 중에 하나가 내 평생 가장 행복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가장 행복한 삶이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뭐라고 고백하겠습니까? 넓은 집 맨션 아파트에서 살았던 것이 내 인생에서 제일 좋았다라고 고백하면서 돌아가시겠습니까? 뭐라고 임종때 자식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돌아가시겠습니까? 지금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할 이야기가 많지만, 한 가지만 해야 될 때, 이야기할 시간이 많지 않다면 내 평생 80, 90을 사는 동안에 가장 행복했던 것은, 보람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해 주신 임마누엘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너희들도 임마누엘의 삶을 살거라. 이렇게 임종 때 말할 수 있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허겁지겁 장롱에 통장 몇 개가 있고, 어디에 땅이 있고, 어디에 집이 있고, 어떤 분은 자기가 어디에 재산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 가지고, 나이가 많아서 혼미해 지니까, 헷갈려 가지고, 그렇게 평생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쓰지 않다가 나중에는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못 알려주고 가버리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 집은요, 자기 부모님 재산이 어디 있는지 모른대요. 뭐하는 짓입니까?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임마누엘의 삶이 사무엘은 지금 어릴 때부터 시작되고 있어요.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집사, 권사 되어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어릴 때부터 임마누엘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적인 거예요.

그래서 본문 19절 이하에 보면 구체적으로 사무엘에게 임마누엘하신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그 말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말의 권위가 있었다는 이야기지요. 우리는 흔히 친구사이나 이웃 사이에서 이런 비참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개 이야기를 50%만 접어들어’ 내가 정성을 다해서 이야기 했지만, 절반은 포기하겠다는 이야기예요. 믿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쯤 인생을 살았다면,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의 권위가 떨어진 사람은요, 다른 무엇으로 회복되지 못합니다. 먼저 말의 신뢰를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이 말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키고 믿을만 하다. 손해가 나도 그 사람은 지킨다. 이런 신뢰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성공한 인생입니다. 하지만 외형적으로 아무리 많이 가지고, 아무리 많이 가졌더라도 말한 것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변명으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아니예요.

저는 정치적인 이야기는 잘 안 하는 사람이지만, 얼마 전에 정말 웃기는 일을 보았어요. 대통령 탄핵에 대해서 한 정당의 전 국회의원이 다 사표내겠다고 내더니, 얼마 있다가 사표를 안 내고 다 돌려줬는데, 왜 그러냐고 시민단체가 물어보니까 이것은 연애편지 쓰듯이 썼다가 지우는 것과 같습니다 하고 말쟁이 의원 하나가 그렇게 변명을 했습니다. 난 그 이야기 듣고 너무 웃었습니다.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국민의 대표라고 하는 그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이면 지도자에 대한 미래가 이제는 없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느 정당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수준의 문제예요.

적어도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알 때 이 나라는 기초가 든든해 질 줄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예요. 여러분들이 하는 이야기는 말 자체를 신중하게 그 삼사일언이라는 말이 있어요. 3번 생각하고 1번 이야기 하자. 일단 이야기 했으면 책임을 지자.

사무엘은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권위가 있습니다. 사무엘은 어렸지만, 사무엘은 소년입니다. 본문의 사무엘은 소년입니다. 소년이지만, 권위가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임마누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이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북쪽도시, 브엘세바는 남쪽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신의주에서부터 부산까지를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어린 사무엘이지만,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뢰받는 사무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사람들도 인정할 줄 믿습니다. 바울사도의 고백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랴.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요, 때때로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수 있어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람들도 결국은 존경하게 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은 하나님도 떠나지만, 결국은 사람도 떠납니다. 결국은 다 잃어 버리는 거예요. 기준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 결국 사람의 인정도 받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사무엘, 21절에 보면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셨다는 말씀입니다. 3장에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잘 말씀하시지 않았던 때입니다. 그러면 이 어린 소년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이제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깜박깜박했던 꺼져가는 불꽃 같던 운명의 이스라엘, 영적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이스라엘, 다시금 하나님께서 그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강력하게 밝게 타오르는 불빛처럼 이스라엘 소망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거예요.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어린이들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이 나라의 희망이 되도록 키워야 합니다. 다른 무엇 보다도 하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비된 자녀들로 키워서 그 아이들이 교회에 희망이 되고, 이 나라 이 민족에 기둥이 되도록 키워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조차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 하고, 하나님의 뜻을 준행하는 일을 가장 먼저 그들에게 가르쳐서 하나님 중심으로, 임마누엘의 가정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어린이 주일을 맞게 하시고, 어린이들이나 그 어린이들을 키우는 부모님들이나 모두가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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