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의 방법대로 (합 1:1-11)

  • 잡초 잡초
  • 407
  • 0

첨부 1


- 설교 : 서영원 목사 (동암교회)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를 보면 마치 오늘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사람들의 모습은 오늘날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하나님에 대해 불신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기대했던 바람대로 되지 않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로운 왕이었던 요시야왕이 애굽과의 전쟁을 하다가 ‘므깃도’라는 전쟁터에서 전사하자, 이런 요시야왕의 죽음을 ‘므깃도의 슬픔’이라 해서 무척이나 슬퍼했습니다. 이 같은 요시야왕의 죽음을 놓고 백성들은 단순한 슬픔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까지도 의심하게 되는 신앙적 고민이 그들을 더욱 당황하게 했으며, 슬프게 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요시야 왕과 같은 의인이 원수의 칼에 왜 죽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왜 요시야 왕을 버렸을까? 라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시야 왕에 대해 평가하기를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라고 말했던 왕이 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왕이 전사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같은 왕의 전사의 소식을 듣고 슬픔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먹구름이 그들을 절망케 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활동하던 선지자가 바로 하박국 선지자 였습니다.
더더욱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을 일으킨 왕이 였습니다. 그 부흥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무후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요시야 왕이 적들과 싸우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왕의 죽음 앞에 영적 부흥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상황은 바벨론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백성들은 이것이 부흥의 댓가인가 하는 의심을 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은, 요시야 왕이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기 때문이라고 믿기까지 된 것이 그 때의 분위기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서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악인들이 잘 되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믿게 되고나서 더 많은 어려움이 오면 이 같은 생각을 가지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기 전에는 편했는데 혹시 예수님을 믿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구원 받은 사실 까지도 의심하려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살고 있던 시대가 바로 하박국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였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렘 44:17-18)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 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이 같은 말씀은 당시 유다 백성들의 불신앙적인 사상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요시야 왕에게 그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대하 34:27-28)“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또한 이사야 선지자에게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 57:1-2) “의인이 죽을지라도 마음에 두는 자가 없고 자비한 자들이 취하여감을 입을지라도 그 의인은 화액 전에 취하여 감을 입은 것인 줄로 깨닫는 자가 없도다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요시야 왕을 데려가신 참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시야왕의 부흥을 통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그들이 큰 파멸을 이기고 또 오래 계속될 포로 생활의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 수 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역사를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니엘, 에스겔, 에스라, 느헤미야, 스룹바벨, 학개, 스가랴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요시야왕의 부흥의 첫 열매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앙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일제 시대에 정말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던 헌신자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일제시대의 신앙 부흥의 사실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헌신과 희생의 바탕위에 오늘날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하박국시대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했는지 모릅니다. 어찌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가? 라고 불신앙적인 발언을 했을지 모르지만 그 부흥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날의 교회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믿음의 선진들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 위에 오늘날의 교회를 세워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과 뜻은 우리 계획과 뜻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를 다 듣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느낄 때 항의하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라고 항변하듯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의 기도는 결국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하박국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전제로 항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상황이 좋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 같아도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거부하거나 불신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항의하듯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하박국처럼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느낄 때 하박국 선지자처럼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8장의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강청하는 과부의 소리를 불의한 재판관이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끊임없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내 뜻과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갖 불의와 강포와 간악함을 겪으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전혀 알지 못하는 먼 곳, 이스라엘 바깥에서 응답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인류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면이 성경전체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역하고 바벨탑을 쌓다가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이 같은 이야기가 창세기 1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11장은 인류의 절망적인 상황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오직 한 사람 아브라함을 갈대아 땅에서 택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그 씨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갈라디아 3장 16절을 통해 말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인류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사사시대의 불신앙과 피 비린내 나는 싸움판에서 이스라엘 왕이 없으므로 각기 제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유대의 작은 고을 베들레헴에서는 하나님께서 룻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참 왕을 준비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이 세상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에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만 눈이 가리워져서는 안됩니다. 지금의 고통만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지금 환경이 고통스럽다고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어리석은 성도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도, 악인들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낙망하게 하는 그 순간에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를지도 모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뒤에도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받아 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의 망법을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이 가장 최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아니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볼 때 우리식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응답도 우리식대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우리의 방법대로 축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방법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당장에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나중에 하나님의 지혜를 찬송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방법도 사람들이 원했던 방법대로 오시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방법이 옳았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응답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원했던 모양대로 응답되지 않았다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뜻을 발견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