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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나친 욕심을 버리자 ( 약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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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친 욕심을 버리자

본문: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결혼 30주년을 맞이한 60세 동갑 부부가 있었습니다. 결혼기념일에 천사가 나타나서 소원을 한가지씩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그동안 워낙 가난하게 살다보니 여행을 못했는데 세계일주 여행을 한번 해보았으면 좋겠네요.” 그러자 천사가 항공권과 여행경비를 건네주었습니다. 소원을 말하자마자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본 남편이 아내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멋쩍게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보다 서른 살 젊은 여자와 살았으면 좋겠네요.”
그 말에 천사는 “그동안 두 분이 열심히 살아서 드리는 혜택인데 소원을 안 들어 드릴 수도 없고… 아무튼 그렇게 원하신다면 이루어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참 이상한 소원도 다 있네요.”라면서 남편을 향해 날개를 폈습니다. 그런데 예쁜 새댁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편이 폭삭 늙어 90세의 노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분수를 모르는 사람의 욕심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잠 5:18)고 말씀합니다.
빈대 네 마리가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네 몸집이 너무 작은 게 항상 불만이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빈대들에게 새해 소원을 각각 물어보았습니다. 첫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네 소원이 뭐니?”“네, 저는 몸집이 작아 힘이 약해요. 그러니 힘이 센 소가 되고 싶어요.”“그래? 그럼 소가 되어라.” 그러자 빈대는 소원대로 소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네, 저는 하늘을 나는 새가 되고 싶어요.”“그럼 너는 새가 되렴.” 세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네, 저는 배고픈 건 견딜 수 없어요. 그러니 굶지 않고 매일 음식을 뒤져 먹을 수 있는 쥐가 되게 해주세요.”“그럼, 너는 쥐가 되거라.” 세 번째 빈대도 소원대로 쥐가 되었습니다. 네 번째 빈대에게 물었습니다.“너는 무엇이 되고 싶니?” 네 번째 빈대는 살그머니 욕심이 생겼습니다.‘어차피 원하는 대로 다 받는다고 하면 실컷 구해봐야지.’ 그는 하나님께 대답했습니다.“하나님, 저는 소처럼 힘도 세고요, 새처럼 하늘도 날고요, 쥐처럼 굶지도 않는 그런 것이 되고 싶어요.” 그러자 하나님은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그럼 소새쥐가 되어라.” 네 번째 빈대는 즉시 ‘소새쥐’ 아닌‘소시지’가 되어버렸습니다. 빈대도 낯짝이 있지, 구할 것을 구해야지 잘못 구하다가 큰 코 다쳤습니다. 욕심은 자기분수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위장병이 있는 것은 사람뿐이라고 합니다. 오직 사람만이 과식하고 위장병을 덤으로 받습니다. 자기분수를 초월했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과식하면 탈이 납니다.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고 내 소원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또 유머 책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노총각이 우연히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는 요술 방망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노총각은 돈도 가지고 싶고, 노총각인지라 여자와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재빨리 소원을 말했습니다. 돈, 여자입니다. 마침내 소원이 이루어 졌는데, 돈여자(정신이 이상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황금손 미다스 왕 이야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평소 황금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왕은 디오니소스에게 자신이 만지는 모든 것을 금으로 만들어 달라는 소원을 빌고 성취를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왕비와 공주마저 황금 동상으로 변합니다. 왕은 욕심을 후회했으나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미다스 왕처럼 자신의 욕심이 만약 모두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어떻게 될지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안델센이 지은 “분홍신”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어떤 소녀가 마술사가 만든 분홍신을 몹시 가지고 싶어하다가 드디어 그것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그 분홍신을 신는 순간부터 불행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 신은 신기만 하면 자꾸 춤을 추어야만 했습니다. 그칠래야 그칠 수 없는 춤을 일생동안 계속 추어야만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을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잠깐이고,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며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써도, 이제는 좀 쉬어 보려고 하여도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제 마음보다는 분홍신에게 붙들려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소녀는 결국 분홍신을 신고 춤을 추다가 지쳐서 죽어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에 이끌리어 살게 되어있습니다(롬 8:5). 그것이 육이 되었든, 영이 되었든 선택은 사람 자신이 합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도 가지고 나면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그리고는 그것에 끌려 다니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창조의 원리대로 하나님의 영에 이끌리어 살아야 하며 그 영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이 됩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맞은편에는 자기 앞집에 사는 두 어린 형제가 사이좋게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도 그를 알아보고서는 다가와서 공손히 인사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기특하게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그에게는 자두 세 개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동생인 아이에게 주면서 형과 사이좋게 나누어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그것들을 받았습니다 아주머니가 가고 난 뒤 동생은 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자두는 아주머니가 내게 주신 것이니까 형은 한 개만 가져. 내가 두 개를 가질게” 그러나 형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아니야, 내가 형이니까 내가 두 개를 가져야 돼” 결국 그들 사이에 자두 한 개를 더 차지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욕심이 있는 곳에는 다툼이 있으며 거기서 불행은 시작됩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으로 만족을 삼고 살아갑시다. 그러면 우리는 늘 감사한 마음으로 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보란 듯이 맛있게 먹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가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 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 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2장에 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사를 지었는데 소출이 풍성하매 곡식을 쌓아둘 곡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이것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 귀중한 것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가치인 "영혼"을 주신 그분 앞에서 가치 없는 것들을 고집하고 자아를 깨뜨리지 않을 때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을 입게되는 것입니다. 짧은 지식, 고정관념, 욕심 등 오늘 내가 쥐고 있는 바나나와 5백 원 짜리 동전은 무엇입니까?
어느 장사꾼이 호수가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 이상한 고기를 낚았습니다. 그 고기는 금빛 색깔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고기가 낚시꾼에게 말을 했습니다. "제발 저를 다시 물 속에 살려서 넣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당신의 소원을 세 가지 들어 드리겠어요." 낚시꾼은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기가 다시 애원하기에 대답했습니다. "소원을 셋이 아니라 다섯 가지를 들어 준다면 너를 살려주마" 그러자 고기는 서글픈 표정으로 말하기를 "저는 세 가지 소원밖에는 들어줄 수가 없답니다." 그러자 낚시꾼은 흥정하듯 말했습니다. "그럼 네 가지 반만 들어다오" 고기는 지친 목소리로 대답하기를 "셋밖에는......" "좋다 네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타협하면 어떻겠니?" 이렇게 낚시꾼은 제안했습니다. 고기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는 뱃바닥에 숨이 끊어져 죽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나 지나치면 반드시 손해가 나거나 실수합니다. 신경이 지나치게 예민하면 정신병이 생깁니다. 경쟁이 지나치면 서로가 망합니다. 자동차의 속도가 지나치면 무서운 사고가 생깁니다. 음식도 지나치게 먹으면 탈이 납니다. 일도 지나치면 몸에 병이 생깁니다. 돈도 지나치게 쓰면 적자의 요인이 됩니다. 좋은 약도 지나치게 먹으면 독이 됩니다. 지나쳐서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지나치게 많아 과밀현상이 생기면 살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 다섯 가지 지나친 것을 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마시지 말고, 그리고 지나치게 먹지말고, 지나치게 색을 따르지 말고, 지나치게 일하지 말고, 그리고 지나친 욕심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지나친 것은 질병과 불행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이 지나친 욕심을 품게되면 명철한 판단이 흐려지고 무리한 행동을 하게됩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욕심의 포로가 되면 이성의 눈이 흐려져서 보일 것이 안 보이고 지나친 욕심은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킵니다. 그래서 자연히 무리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무리하지 말자.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기본원칙입니다. 자연계에는 무리가 없기 때문에 질서와 조화의 법칙하에서 움직입니다. 사람만이 무리하게 행동합니다. 욕망은 생의 원동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여러 가지 욕망을 가집니다. 이런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동분서주합니다. 욕망이 없다면 사멸하고 말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치면 탐욕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알고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분수를 지키고 분수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고셰 신부의 불로장생주>라는 단편 소설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가난을 미덕으로 삼았던 수도원으로 심지어 종을 살 돈이 없어 기도 시간을 알리는데 나무로 된 딱따기를 사용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이 수도원이 떼돈을 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불로 장생주'라는 술 덕분이었습니다. 불로 장생주는 고셰라는 수도사가 여러 가지 약초를 제조해서 만든 훌륭한 약주였습니다. 그 술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되자 수도원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모든 건물이 깨끗이 단장되고 신부들도 비싼 옷으로 바꾸어 입었습니다. 고셰는 그 공적으로 인해 어느덧 신부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사가 진행될 때 술에 만취된 고셰가 성당에 뛰어들어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그는 손수 만든 술을 시음하다가 술 중독자가 되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후부터 고셰는 성당에 나오지 못하고 주조장 안에서 혼자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고셰는 자신의 영혼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장을 찾아가 술 제조를 그만두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원장을 비롯한 신부들은 이건 바로 하나님을 위한 선한 사업이므로 이를 그만둔다면 바로 하나님 거역하는 것이라고 고셰를 윽박질렀습니다. 따라서 순진한 고셰는 할 수 없이 계속 술을 만들었습니다. 그 수도원은 술로 인해 매우 바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신부나 수도사 전체가 술병을 포장하고 상표를 붙이고 또한 그것을 운반하느라고 미사를 거를 때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당 안에는 아주 작은 소리지만 고셰 신부의 술주정하는 소리와 고함치는 소리가 점차로 더욱 자주 들려 왔습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은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돈에 구애받지 않는 생활을 하고자 열심히 돈을 법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십니까? 돈을 벌수록 돈의 노예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고셰신부나 프레몽트르 수도원은 처음에는 가장 순수한 동기에서 술을 제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돈의 맛을 안 다음부터는 가난했던 시절 순수했던 기도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 예배 등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오로지 술을 팔아 돈을 벌기에만 급급하였던 것입니다. 즉 수도원이 본래의 의도와 목적을 벗어나서 부(富)의 축적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욕심으로 인해 심판 받은 자의 실례를 보면, 하나님의 물건을 취함으로 가족 모두를 돌에 맞아 죽게 한 아간(수7:25,26)과 재물을 탐하여 거짓말을 한 결과 문둥병에 걸린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왕하5:25- 27), 그리고 재산이 아까워 사도들 앞에서 거짓말하다가 목숨을 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행5:1-11)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이와 대조적인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상인이 산을 넘어가다 심한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이들은 방향을 잃고 추위에 떨었습니다. 겨우 바위틈을 찾아 대피했습니다. 자리를 잡자 이들은 곧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붙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불쏘시개가 없었습니다. 한 명의 상인이 두툼한 지폐를 내어놓았습니다. 나머지 한 명도 두툼한 지폐를 내어놓았습니다. 이들은 '거액의 돈'에 불을 붙여 모닥불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구조대가 도착할 때까지 얼어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구조대원들은 '타는 돈의 연기'를 보고 이들을 발견했습니다. 돈의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목숨을 구한 것입니다.
사람은 모태 속에서 빈손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도 역시 빈손으로 돌아갑니다. 그 어떤 부자와 권력자도 천 원 한 장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고 죽을 때 또한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딤전6:7-8) 그런데도 인간의 욕심은 한정이 없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어떤 농부가 1천 루불만 내면 그가 종일 걸은 만큼의 땅을 차지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모든 것이 소문 대로였으나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해가 지평선 밑으로 떨어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동녘에 해가 뜨기 무섭게 마을촌장의 전송을 받으며 출발했습니다. 그는 내일이면 자기 것이 될 땅의 곳곳에 말뚝을 박으면서 서둘러 걸었습니다. 한낮동안 걷다가 뒤돌아보니 실로 엄청난 넓이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을 보니 아주 기름진 땅이 눈에 띄었습니다. 욕심이 생긴 그는 힘껏 달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에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땅을 넓게 잡았기 때문에 해떨어지기 전까지 갈 수 있을까 겁이 났습니다. 그는 쉴 사이 없이 뛰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해지기 전에 빨리, 해떨어지기 전에 어서"하고 중얼거리며 마구 뛰었습니다. 장하게도 그는 해가 막 지려는 순간 출발점에 결국 도착하였으나 푹 쓰러지고 맙니다. 그는 그토록 탐하던 땅을 차지하는 순간 그렇게 죽어갔던 것입니다. 후에 사람들이 그의 묘를 쓰기 위해 괭이를 집어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여섯 자의 땅을 팠습니다. 그리고 그를 그곳에 묻었습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 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잠25:16)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우리가 죄를 지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지나친 욕심은 자신을 망하게 하고 슬픔을 가져옵니다. 그러므로 지나친 욕심을 가지지 않으려면 밝은 지혜와 욕심을 통제하는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지나친 욕심을 버립시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비범한 진리입니다. 은혜를 망각하고 욕심을 내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탐욕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적거나 하나님을 믿지 못해 욕심을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탐욕입니다. 세상 사람들, 악한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말에 자극 받아서 욕심을 내는 것이 탐욕입니다. 탐욕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먼저 정신차려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성령의 능력과 말씀의 권위로 쓸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거룩한 백성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잠23:20), "마음이 탐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잠28:25),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의 마땅한 바니라.'(엡5:3) 이만큼 성경이 탐욕에 대해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욕심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 받고, 경건 생활을 통해 자신을 훈련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양을 돌릴 수 있길 축원합니다.
*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욕심이 많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으려하고, 어떤 때는 좋은 물건을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작은 욕심과 탐욕이라도 우리 마음 안에 머물지 않기를 원합니다. 내면의 작은 싸움에서부터 주님을 의지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붙들어 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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