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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이렇게도 부르십니다.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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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충웅 목사 (대구문화교회)


로마는 망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일등 국가였습니다. 또 일등 국민이라고 자부했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힘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미국과도 같았습니다.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도 망하게 됩니다. 410년 북방 서고트족의 지도자 알라릭에 의해 함락됩니다. 로마 시민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그들은 그 책임을 기독교인에게 돌렸습니다. 꼭 일본 대 지진 때 그 책임을 한국 사람에게 돌린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인정했습니다. 당시 나라는 기독교가 주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권을 잡은 지 1세기도 되기 전에 나라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입을 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힙포의 감독이었습니다. 로마가 망한 것은 기독교인 때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되지 못해서 라고 지적합니다. 로마 사람의 윤리적 타락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상의 나라는 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옛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젊은 학자며 정치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골고루 갖추었습니다. 유대 종교에서 최고 지도자인 바리새인입니다. 최고학부인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렇게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에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잘난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장 하나님께 충성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의 제자들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가 없어지면 그들은 다 흩어 질줄 알았습니다. 그 소문도 아침 안개처럼 숨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는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를 따른 모든 사람을 죽여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스데반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래도 속이 차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여도 된다는 대제사장의 법적공문을 얻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제법 먼 다메섹이라는 곳에 교인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는 거기 가서 본때를 보여준다고 갑니다. 그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힘이 넘칩니다. 저 이단자 기독교인을 빨리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습니다. 가다가 강한 빛을 만납니다.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엎드려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합니다. 그는 “주여 누구 십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십니다. 그는 거기서 회개합니다. 변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수님을 전하는 사도가 됩니다. 저는 “하나님은 이렇게도 부르십니다.”라는 말씀으로 같이 은혜 받고자 합니다.

Ⅰ 자신이 무너져야 합니다.

사울 청년은 교만했습니다. 그럴 법도 하지요. 그는 철저한 유대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는 종교 귀족이었습니다. 꿈 많은 정치인이었습니다. 늘 희망에 불타는 학자였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더 큰 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이 땅에서 씨를 말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늘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갑니다. “제가 이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미 대제사장은 사울 청년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는 꿈에 부풀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꿈도 잠깐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이 비췹니다. 그만 그는 쓰러졌습니다. 음성이 들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합니다. 그는 그 말 한마디에 항복합니다. 그 순간 사울이란 청년이 변변히 대꾸 한마디 못했습니다. 토론 한 마디 해 보지 못합니다. 이미 사울은 이전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메섹으로 갈 용기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꺾을 수 없었던 사울이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새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모, 남편, 아내, 자식, 형제자매, 도무지 믿지 않을 것 같습니까? 사랑을 쏟아 부으세요.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한 순간에 돌아오게 하십니다. 사울은 거만했습니다. 한때 유행어 “잘났어. 정말!”란 말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정말 잘 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사울 청년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사람에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겸손과 섬김이 없이는 설수가 없습니다. 사울 청년은 너무 교만했습니다. 자기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확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서 초라한 사람인 것을 몰랐습니다.

로마를 보십시오. 강한 나라였습니다. 절대 무너질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망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은 영원한 하나님은 도성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는 아가페가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이나 황제들은 하나님의 도성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믿도록 무력으로 강요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성을 실현하려고 한 교황도 황제도 다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권력투쟁만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성벽을 쌓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사울을 부르실 때에 무력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말씀 한 마디에 사울은 무릎을 꿇고 맙니다. 사실 사울은 너무 잘난체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안다고 자부했습니다. 바리새인의 교만의 피를 이어 받았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입니다. 부자였습니다. 학자였습니다. 정치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무시했습니다. 큰 소리 치면서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피에 굶주린 사람처럼 살기등등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것도 아닙니다. 부도덕하지도 않았습니다. 덜 윤리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죽이기까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울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이 무지했습니다. 성경을 줄줄 외웁니다. 잘 지켰습니다. 그런데도 그 많은 메사야 예언은 왜 모릅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대단한 명문가정에서 태어 날 줄 알았습니다. 화려한 예루살렘에서 귀족 집에 태어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기대에 빗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명문의 후손도 아닙니다. 나사렛 천한 목수의 아들일 뿐이었습니다. 그도 목수였습니다. 그가 서른 살에 예루살렘에 나타났습니다.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부터 예수청년은 변했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합니다. 자기는 구약에 예언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구세주)라 합니다. 놀랍게도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 장로들 외에는 예수청년의 말을 따른 것입니다. 병자를 고칩니다.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합니다. 죽은 사람을 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믿어라 합니다. “내가 곧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고 외쳤습니다. 그렇게 목마르게 기다리던 백성들에게 단비였습니다. 그런데 사울 청년은 이런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 떠나신 이후부터 사울은 성령의 불끄기 운동에 앞장선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무시했습니다. 저런 멍청한 것들이 무엇을 한다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Ⅱ 순종했습니다.

사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미워할 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몇 마디 말씀에 압도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장님 된 사울 청년은 쉽게 항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길을 막으신 것입니다. 그 길을 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성내에 가서 아나니아란 선지자를 만나라 합니다. 그가 사울의 눈을 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사울의 할 일을 지시하십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다른 제자처럼 제자훈련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아주 짧은 몇 마디로 그는 예수님의 부활증인이 됩니다. 그는 유럽과 아시아를 넘나들며 세 번이나 돌았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선교사로 안디옥교회에서 파송받습니다. 그가 외친 주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우리의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사울(큰사람)에서 바울(작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 같다고 했습니다. 사도들 중에 가장 작은 자라 했습니다. 정말 이전의 사울의 모습은 흔적도 없습니다. 가전 명예, 부귀, 자랑스러운 것 다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버렸습니다. 한 사람의 변화가 세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깨져야 합니다.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자아가 죽어야 합니다.

1865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그린빌(Greenvill)에서 남 침례교 신학교(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가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이 막 끝난 때였습니다. 학생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학교 건물은 다 부서졌습니다. 이 학교에 등록한 학생은 고작 일곱 명이었습니다. 교수가 네 명이었습니다. 설교학교수는 보이스(James Boyce)박사였답니다. 그의 강의를 듣는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그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교수님은 전력을 다 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이 때의 강의 노트를 책으로 냈습니다. “설교의 준비와 실제”(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란 설교학 개론입니다. 이 책은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130년이 지난 오늘도 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사회에서 문을 닫자고 했습니다. 네 명의 교수는 “학교를 죽이기 전에 우리가 죽을 정도로 열심히 해 보겠으니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그 뒤에 그 학교는 성장했습니다. 지금도 미국 켄터키 주 루이스빌에 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신학교가 되었답니다. (신학생 2천명, 교수 140명, 예산 1천 4백만 달러...『크리스챤신문 2073호. 2004.5.6일자』

한 사람 바울은 기독교 역사의 지도를 새로 만든 일꾼입니다. 스스로 나는 초라하다. 무능하다.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인생은 허무하다. 죽는 것이 낫지. 이래 살아 뭘해. 그런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 다메섹으로 가던 종교깡패 두목 사울을 보십시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대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과거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회개하고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일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사건을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입니다. 이를 그가 쓴 편지 첫 머리에 올리고 있습니다. 그도 이 세상에서 남이 부러워하는 것을 다 누려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돈 후에 본 자기의 옛 삶은 정말 엉터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신 것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맺는말 :

저는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은 변했습니다. 예루살렘 그 광장에 수만 명이 모입니다. 불 뿜은 설교를 했습니다. 한꺼번에 수천 명씩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를 본 유대의 관원들은 긴장했습니다. 겁을 집어 먹었습니다. 이 불은 꺼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책회의도 했습니다. 때에 사울 청년이 앞장선 것입니다. 그는 법적공문을 들고 다메섹으로 갑니다. 예수님 말씀에 항복합니다. 순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으로 변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늘 승리합시다.

2004.5.16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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