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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받은 자의 선택(3)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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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신시내티한인교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면서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땅을 주고, 많은 자손을 주고, 복의 근원이 되는 복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기가 살던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리고 떠난 이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습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간을 통해서 이렇게 택함 받은 아브라함이 현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땅과 관련해서는 조카 롯과의 갈등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혜롭게 선택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손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보다는, 아내 사라의 말을 들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잘못 선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브라함의 이러한 모습만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미흡할 것입니다.

오늘은 무엇이 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컬을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흔히,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였을 때 바치고자 했으니 그 믿음이 훌륭한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시대나 그 후에도 이방 민족들은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자기의 아들을 죽여 바치는 제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조상(아버지)”이라 불리고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과연 어떤 모습이 이 “믿음”이라는 표현에 해당될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택함 받은 자로서 바른 선택을 하였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선택이 바로 믿음의 진정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아버지)”라 부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대한 아브라함의 선택은 우리가 시험 볼 때, 잘 몰라서, 4개 중에 하나를 연필 굴려 선택하는 그러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택을 영어로는 “choice”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choice”하는 상황에 놓여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상황은 이런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아들이 죽어야 했고, 아들이 살아있도록 하고자 하면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말아야 하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결단(decision)”의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전의 땅 문제로 인한 아브람의 선택과 또 아들 문제로 인하여 결정을 내리던 모습의 상황과는 구별이 되는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즉, 이전의 상황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면, 지금 이 상황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을 통해서 너희 후손이 하늘의 별보다도, 바다의 모래알보다도 많게 해 주시겠다고 다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이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과 이에 따른 선물로 주신 이삭을 다시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그 모순 된 모습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러한 “decision”의 상황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의 생명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으로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이었기에 이 아브라함을 우리는 “믿음의 조상(아버지)”라 일컬을 수 있게 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이 간직한 이러한 모습을 우리들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를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먼저 이 신앙은 하나님의 시험(test)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아십시다. 이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뭔가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시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응답을 보고 나서 점수를 매기셨습니다. 그것이 본문 12절 하반 절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앙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확인의 과정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하고 아끼는 것마저도 하나님께 아끼지 아니하는 그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 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습”과의 깊은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하고 싶어 하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시험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 시험 방법은 두 가지인데 “반복과 번복”이라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창 12:1의 말씀이 생각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처음으로 부르신 말씀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을 또 한번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모든 것을 버리라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반복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선물하셨던 것을 다시 “달라”고 요구하시는 번복된 자세입니다. 이는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모순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번복이라는 실수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번복되는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반복과 번복된 모습으로 시험 문제를 내셨다고 한다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이 모습 역시 믿음과 연관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이러한 반복과 번복되는 모순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나아가는 자세입니다.  이미 부르심에 순종하여 나아간 사람에게 무언가 다시 요구하시는데 그 요구가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어기는 그러한 요구라는 말입니다. 네 몸에서 난 자식을 통하여 네 자손이 불어나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약속을 깨뜨리시는 명령을 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횡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 되는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이 하나님에 대한 일관성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우리들도 이러한 아브라함의 태도를 우리의 삶 속에서 간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의 모습을 3절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라는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순 된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이지만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 하나님의 가라고 하신 모리아 땅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떠납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부지런함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가장 우선을 두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데 최우선으로 하고자 하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머뭇머뭇 거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에게 이 모습이 있습니까?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명령이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쁜 삶을 살아갑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를 먼저 염두에 두며 살도록 해야겠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자세요 모습이라고 봅니다.

두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삼일 길을 가는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삼일 동안 어떤 일이 주어졌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합니다. 아브라함도, 아들 이삭도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삼일 길을 갑니다.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저 가야하는 것뿐입니다. 이 자체에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채워져야만 되는 기간을 말합니다. 이 모습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속에 있어야 하는 기간처럼 새로운 사건을 잉태한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이 삼일 길을 견디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누군가에 하소연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모습을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의 신앙 잡지 Guide Post의 뒷면 표지에 실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뉴욕의 아리따운 아가씨의 신앙 간증입니다. 이 아가씨는 출퇴근하는 길에는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늙고 얼굴도 까무짭짭한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아무런 걱정근심이 없는 사람처럼 늘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답니다. 이 아가씨가 한번은 말을 걸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아무런 걱정근심 없는 사람처럼 보여요. 늘 미소를 짓고 계시니 말이예요. 짜증나는 일도 없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 할머니는 “낸들 왜 어려운 일이 없겠소?” “그런데 어떻게 늘 그렇게 미소만 짓고 계실 수 있어요? 제가 늘 다니면서 볼 때 할머니의 표정에서 어두운 모습이라곤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그 비결이 뭔지 제게도 좀 가르쳐 주세요.” 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 비결을 가르쳐 주었답니다: “아가씨, 나는 괴롭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삼일을 기다린다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기까지의 삼일이 걸렸기 때문이라오. 나는 아무리 큰일도 이 삼일 안에 다 포함된다고 생각한답니다. 이 일보다 더 큰일은 없기 때문이라오. 그래서 나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삼일만 견디면 되겠지’하고 지낸다오. 그러니 정말 그렇게 됩디다”라고 그 비결을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신앙을 온전히 지니려면 이러한 삼일의 기다림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갖기에 성급한 나머지 이 3일을 기다리지 못하는 우리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도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도 기다렸습니다. 침묵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습에 있어서 여덟 달 반 만에 태어난 아기와 같아서는 안 됩니다.

셋째로 발견할 수 있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모습을 보십시다. 산기슭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데리고 온 사환들에게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지시하고는 이삭에게 번제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올라가는 도중에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 때 대답한 아브라함의 말이 8절입니다. 이 8절의 말씀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이 아브라함의 대답의 성격을 분석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아브라함의 대답은 아브라함이 뭔가 알고 대답한 말이 아닙니다. 알고 대답한 것 뿐 아니라, 그렇다고 믿음으로 대답한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자포자기의 허무한 대답도 아닙니다. 부르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구약 학자는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 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런데 설명할 수 없는 이 말은 우리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라는 현실로 우리를 인도한다(The expositor must take care not to explain, for it will not be explained. But without explanation, the text leads us to face the reality that God is God.)”고 말합니다. 단지 아버지로서 아들을 죽여야 하는 입장에서 아버지로서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자기도 모르게 던져야 했던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이 무의식적인 대답이 바로 하나님의 정곡을 찌르는 바로 그 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무의식적인 이 말은 나중에 진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이루어지기까지는 스스로, 그리고 절대로 확신도 보장도 할 수 없는 무책임하게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의 모든 조건을 뛰어넘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이 깃들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어떤 것도 예상할 수 없는 “끝까지 가봐야 하는 엄격함과 철저함”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의 논리로, 인간의 지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는 하나님의 영역의 모습입니다. 의심 없이 이 영역 가까이 다가간 자에게만 보여질 수 있는 신앙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 신앙인의 모습을 표현하기를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를 소개하고 있습니다(고후 6:8-10 발췌).

이렇게 아브라함의 신앙은 우리에게 신앙을 제공하는 하나님의 요구가 들어 있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test에 합격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같은 시험 문제를 주십니다. 어떤 시험 문제입니까?  우리들에게 바치라고 하는 이삭을 과연 무엇입니까?  이 test는 우리의 형편에 따라 시험도 될 수 있고 요구도 될 수 있고 또한 명령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너희들은 내 아들 예수를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이렇게 간단히 답변합니다. 우리들의 답변도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아마 모리아 산에서 내려오는 아브라함은 그의 손을 잡은 이삭을 이렇게 보았을 것입니다. 죽을 줄 알았던 이삭을 다시 데리고 산에서 내려오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손을 붙잡고 내려오는 이삭을 보았을 때, 예전에 보던 그 얼굴이었을까요?  아닐 겁니다. 아마 그 이삭이 다르게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겁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가진 자라면 다른 사람을 볼 때 육체대로 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 - 육체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새롭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구원하신 그 모습으로 보아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눈이요, 자세입니다. 우리 주위의 이웃들을 이제부터는 육체대로 보시지 말고 새롭게 보십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test를 통과하여 신앙을 간직한 자의 모습이요, 자세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아브라함을 믿음의 아버지로 모신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앙의 또 한 가지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14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브라함은 이러한 아들 이삭을 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는 여호와이레를 발견합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비하신 풍성하고 충만하고 오묘한 섭리를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러한 신앙을 통해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하신 데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신앙으로만 볼 수 있는 그 하나님의 풍성한 데까지 이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귀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들도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통해서만 신앙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신앙이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표현하고 이끄는 힘이요, 능력이 바로 신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특징이나 자질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힘에 의해서 내가 이끌려지고 내가 표현되어질 수 있게 될 때 바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도다”(고후 5:14)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바른 모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인이 되고자 한다면 바로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택함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결단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을 지닐 수 있도록 우리들도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할 수 있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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