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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눅 5: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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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사람들이 아프면 의사를 찾아가게 되기 마련이지만, 그 중에는 자기 병을 스스로 미리 진단 다해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 병은 이러이러해서 생기는 것이니까 당신은 내가 원하는 처방만 해 주시오.'라는 식으로 의사를 대하는 환자들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 스스로 말씀하신대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영혼과 육신을 동시에 고치시는 의사로 오셨습니다. 이 최고의 의사 앞에 나아가면서도, 자신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진단을 미리 스스로 다 내리고 예수님은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치료만 해 주시면 된다는 식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어쩌면 많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당신 앞에 나온 사람들을 자주 만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 사건이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두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육신적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있던 그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들까지 진단해 내시고 그것까지 고쳐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의 영육의 모든 문제들을 가장 깊숙한 것들에 이르기까지 정확하게 찾아내시고 해결해 주시는 우리 예수님의 놀랍고도 자상하신 신적(神的) 의술(醫術)이 아주 뚜렷하게 돋보이고 있는 장면입니다. 오늘 주일 아침에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의원되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베풀어 주시는 영적 치료 사역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를 통하여’ 건강한 지체를 유지하도록 돌보아 주시는 의원이십니다.

본문 12절로부터 15절에 기록하기를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게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어느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어떤 문둥병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우리나라말에 '문둥병'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오늘날의 나병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악성 피부병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었습니다. 이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본래 의사였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라고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의 문둥병이 초기 상태가 아니라 이미 온몸에 퍼져서 만성화된 최악의 상태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앞에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 나를 고쳐 주옵소서"라고 말하는 대신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날 고쳐 줄 의사(意思)만 있으시면 능히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 "문둥병을 치료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대신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말한 까닭은, 문둥병은 그 당시 '더러운 병'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무조건 사회에서 격리되었고 친지들의 후원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이 '더러운 병'이라고 불리는 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받고 있던 온갖 서러움이 맺혀서, 그는 "저를 고쳐 주십시오."란 말 대신, "저를 깨끗케 해 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간청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문둥병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과 신체 접촉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문둥병자로서는 천만뜻밖의 일이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셨다는 말씀을 보면, 어쩌면 그는 의식적으로 예수님에게서 좀 멀리 떨어져서 엎드려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 문둥병자로서는 다른 건강한 사람이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만져 주는 경험은 문둥병 걸린 이후로는 아마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냥 말씀만으로도 능히 고쳐 주실 수 있으셨겠지만, 이처럼 그 손길을 통하여서도 당신의 따뜻한 사랑을 전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그 사랑의 만져 주심과 그 권위 있는 치유의 선포에 그 사람의 문둥병은 당장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통 의사였다면 여기서 다 끝났을 것입니다. 불치의 병을 순식간에 고쳐 주셨으니 여기서 '할렐루야'하고 막을 내리기에 딱 좋은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셨습니다. 그 문둥병 나은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게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레위기 14장에 기록되어 있는 규례로서, 문둥병 환자가 낫게 되었을 때에 행하도록 되어 있는 예식과 제사를 행하도록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문둥병이 나은 후에는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또 일정한 제물을 가지고 제사 드린 후에, 비로소 그 사람은 이전처럼 이스라엘 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의 자격을 다시 정식으로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에 있어서 그것이야말로 문둥병 나은 사람이 누리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이었습니다.

문둥병은 물론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큰 괴로움을 주는 것이었지만, 그보다도 그 자신이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공적 집회에 참석할 수 없게 되며 신앙 공동체의 회원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 더욱 큰 부작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문둥병자가 깨끗함을 받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그는 이제 성전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공적 예배에 자유로이 참석하며 제사장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음껏 교제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것까지 정확히 진단하고 계셨던 까닭에 그에게 이 훨씬 더 중요한 처방까지 잊지 않도록 상기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인생의 진짜 기쁨과 감격은 뭐 돈 몇 푼 더 벌고, 몸 건강하게 오래 살고, 자식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하는 정도, 즉 그냥 문둥병 고침 받는 정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이 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을 마음껏 출입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된 특권을 만끽하며 살 수 있는 여기에 있음을 우리가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예수님께서, ‘그게 네 인생이 진짜로 건강해지는 법이다.’라고 진단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시경 따위 없이도 사람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까지 완전히 투시하고 계시는 최고의 의사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은 교회에 나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고’ 또 ‘모세에게 명하신 규례대로 예물을 드리면서’ 자신이 진정 새로 거듭난 사람인 것을 ‘증거’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처방전을 써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진단하시는 방법과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진단하는 방법의 차이점입니다.

사람은 ‘교회 나가봤자 별 수 없더라.’는 따위의 엉터리 진단을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 생활하고 살아야 한다.’라고 정확하게 진단하십니다. 사람은 ‘목사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하는 교회에 안 나가도 나 혼자서 얼마든지 착하게 살 수 있다.’라고 지극히 교만한 진단을 스스로 다 내리고 있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목사를 계속 만나고 목사를 통하여 자신의 신앙 상태를 항상 체크하면서 살아야 한다.’라고 영적 건강 유지 비법을 일러주십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님의 몸 되신 교회’라는 이 고귀한 신앙 공동체 안에서 자유롭게 예배드리며 마음껏 봉사하며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누리고 있기에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조금만 따져 보면 이 얼마나 큰 특권이요 은혜요 축복입니까? 교회 생활이란 예수 믿기 전, 과거의 '더러운' 상태에서는 도무지 누릴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더러웠던 우리들은 저 교회 밖에 있을 때에는, 생각하는 것이 다 악하고 말하는 것이 저질스러운 사람들, 같이 더러운 사람들끼리만 어울릴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더럽기만 하던 우리들에게 우리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손을 내밀어" 만져 주시면서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고는, 이 ‘거룩한 공동체’의 회원이 되어 살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체험 때문에, 우리는 이 교회 안에서 항상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고, 서로의 약한 것들을 이해해 주고 오히려 감싸 주는, 실로 아름다운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다른 사람들로부터는 철저히 무시를 당하며 어디를 가도 못난이라는 소리만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에게, 우리 의원께서는 ‘너는 이제부터 깨끗한 사람이다.’라는 이 기가 막히는 치유를 그냥 공짜로 베풀어 주셨습니다. 바로 그 의술 때문에, 이전에는 세상과 짝하여 살던 저와 여러분들이 이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만 모아 놓으신 이 교회의 한 일원이 되어 함께 우리를 고쳐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예배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옛 사람을 깨끗하게 씻겨 주시고 계속해서 우리의 영적 건강을 돌보아 주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세워 놓으신 이 ‘예수 병원’ 안에서 항상 교회의 건강한 지체로 자라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마다 ‘죄를 사해 주시는 의술’을 제일 먼저 베풀어 주십니다.

본문 17절로 26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서, 이제는 당시의 대표적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교법사들까지도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부터 찾아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교법사 즉 율법학자들이 그들의 종교를 얼마나 심각하게 대하는 자들이었는지는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계명들을 한 치라도 어기지 않으려고 제 딴에는 무지무지하게 엄격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 있을 때에 이 사건이 일어났었습니다.

한 중풍병자를 그 친구들이 둘러메고 예수님 계시던 집에 찾아왔지만 워낙 많은 인파가 빽빽하게 밀집해 있어서 도무지 들어갈 도리가 없었습니다. 궁리 끝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갔습니다. 당시의 집들은 지붕이 평평했고 또 집 바깥벽에 지붕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들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붕을 덮는 재료들이 그렇게 단단하게 고정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를 뜯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그런 아이디어를 제일 처음에 생각해 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는 점에 그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천정에서 중풍병자 한 명이 실린 침상이 내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행위로 나타난 믿음’을 보셨던 것이었습니다. 그 중풍병자나 그의 친구들로부터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지만, 그들이 요청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 무언 중에도 누구에게나 명백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는 또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고 권위있게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겠지만, 그 누구보다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예수님의 선언은 "참람한 말" 즉 신성모독죄에 해당되는 말이라고 속으로들 생각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 의논을 아셨다"라는 말은, 그들의 하는 말을 들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라고 반문하셨습니다. 정말 '어느 것이 쉬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습니다. 바라새인 쪽에서 본다면 죄사함을 선언해 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결과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당장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야만 하는 병고침 선언보다는 더 쉽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풍병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자기보고 그저 "일어나 걸어가라"고 치유를 선언해 주는 말이 훨씬 듣기 쉬울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병 고치는 것이나 죄 사해 주는 것이나 둘 다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이고 오직 하나님께만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선언을 먼저 해 주신 이유는, 바로 예수님께서 이어서 밝히시는 대로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하심이었습니다. 특히 여기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인자 (the Son of man)"라고 칭하신 것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인자'란 명칭은 다니엘서에서 '심판의 권세 있는 자'로 묘사되고 있는 메시야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발휘하시는 권세가 바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며, 제일 마지막에서는 '죄용서 받지 못한 자를 심판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될 것을 바로 이 사건을 통하여 명백히 공포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날 치료해 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예수님, 제 인생 문제는 제가 잘 압니다. 예수님은 그저 내 이 병만 고쳐 주시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자세로 예수님 찾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 뭐 ‘죄 용서’ 같은 복잡한 말씀은 생략하시고 그저 내 사업만 왕창 복 받게 해 주시면 제 인생은 아무 문제없을 텐데요.” - 이렇게 미리 진단이고 처방이고 다 내려놓고서 예수님보고 약만 지어달라고 찾아오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주 잘못 보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런 하찮은 의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그런 ‘육과(肉科)’만 취급하는 의사가 아니라 ‘영과(靈科)’를 특별히 전문하시는 의사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오직 이 전문의 예수님만이 소유하고 계시는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 바로 이 놀라운 완치의 선언은 오직 예수 의사 선생님께서만이 사람에게 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문둥병을 고치고 중풍병을 고치시는 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닌 것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신유 기적의 소문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들었을 때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15, 16절)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육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 것이 주님께서 화육하신 목적이었다면 어찌 그처럼 사람들이 찾아올 때 오히려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적어도 그보다는 훨씬 더 중요한 병을 해결해 주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신 아주 특별한 의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치료 받기 위해서는 역시 일단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나야만 합니다.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꼴들이 영 보기 싫어서 교회 못 나오겠다."라든지, "교회에서 하는 일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수 못 믿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저 예수님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만날 노력도 하지 않고 그만 발걸음을 미리 돌려 버리는 것은, 실로 어리석은 판단이며 옹색한 핑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 교회 나오는 분들은 "지붕을 뚫고 내려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예수님을 직접 한번 만나보고 체험해 보아야 하겠다. 이 예수님이라는 사람을 내가 직접 만나기만 하면 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틀림없이 다 해결될 것이다."라는 이 ‘믿음’을 꼭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게’ 됩니다. 세상의 그 어떤 고명한 목사라 할지라도, 바로 이것보다 더 간단한 죄사함의 길을 가르쳐 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떠하시다’라고 책 몇 십 권을 쓴 신학자라 할지라도, 그저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보다 더 나은 구원의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없습니다. 만일 정말로 사람이 장애가 될 것 같으면 그 사람들을 헤치고, 혹 교회가 시험이 된다면 그 교회라는 집의 지붕을 뚫어서라도, 어찌하든지 그 한 가운데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뵈옴으로써, 내 평생의 모든 죄를 한 순간에 몽땅 다 용서해 주시는 이 엄청난 무료 치료를 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진단하시는 방법은 사람 자신이 사람을 진단하는 것과 얼마나 그 차원과 깊이가 다릅니까? 사람에게 왜 종교가 필요한가, 내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에 대하여,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진단을 미리 내려놓고 시작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돌팔이 진단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저 내가 생각하는 내 인생의 제일 큰 문제만 해결될 수 있으면 내 인생은 더 이상 아무 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예수님 앞에 나오면, 그처럼 자기가 미리 준비해 놓은 처방이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약이나 치료와는 전혀 다르니까, 이 위대한 의원 예수님을 마치 세상의 무능한 의사처럼 여기고 실망하여 돌아서게 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의사를 찾아가는 것은, 적어도 병에 대해서는 의사가 그 병자보다도 훨씬 더 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저도 이가 아프다든지 해서 치과의사를 찾아 가게 될 때면, 제 스스로는 그저 ‘진통제와 항생제 처방만 해주면 될 것 같은데.’하고 나름대로 진단을 하고 갈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치과의사들은 제 이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들을 찾아내곤 하는 것입니다. 그렇 때, 제가 만약 ‘무슨 이따위 치과의사가 있나?’하고 돌아선다면, 진짜 바보는 저 자신일 뿐이며 손해는 저만 보게 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요구하는 그런 ‘쉬워 보이는’ 진통제 몇 알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 되어 거룩한 성도의 신앙생활을 누리는 것이 최고의 보약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내세를, 자기의 영혼 문제를 자기 스스로가 가장 잘 아는 척하는 혼자 못난이가 되지 말고, 그저 예수님의 의술만 믿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내어 놓고 맡김으로써, 자신의 죄를 완전히 제거해 내는 아주 ‘어려운’ 수술,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 완벽하게 행하실 수 있는 이 수술을 받으라고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보내 주신 이 위대한 의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키시는 대로, 교회라는 거룩한 병원 안에서 죄사함이라는 최고의 치료를 받고 건강한 금세와 영생하는 내세를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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