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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고넬료의 가정처럼 ... (행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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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문수 목사 (신반포교회)

5월 가정의 달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을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가정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의 달 행사로 분주합니다. 정신없이 사는 현대인들이기에 이렇게 해서라도 가정을 챙기는 게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행사들이 연례적인 겉치레로 지나간다면,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그 이상의 유익이 없습니다. 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가정에 대한 깊은 성찰입니다. 우리 가정의 형편을 잘 살펴보고 반성하면서 더 좋은 가정으로 만들려는 구체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진정한 가정의 달로서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취지에서 오늘은 성경 안에서 가장 모범적인 가정 중 하나인 ‘고넬료의 가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가정과 우리 가정을 비교해 보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더 좋은 가정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고넬료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제국의 도시인 가이사랴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이달리야대)의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당시 100명의 군인을 통솔하는 군인입니다. 요즘으로 하면 중대장에 해당되지만, 그 지위와 권세는 비교가 되지 않게 컸습니다. 대개 식민지 주둔군이 그렇죠. 옛날 일제 치하에 일개 순사만 되어도 얼마나 세도를 부렸습니까?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백부장은 그 당시 상당한 지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군인들은 아주 잔인했습니다. 정복자로서 횡포를 부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넬료는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유의할 사항입니다. 당시 1세기는 과도기였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넘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이었으므로 개중에는 그 신앙이 아직 구약의 상태로 머물러 있던 신앙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0장 뒷부분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통해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혹시 처음 믿는 초신자인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아직 예수님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이미 경건한 유대인들로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 받고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모범이 될 정도로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가정 중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고넬료의 가정에 앵글을 맞추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본문을 보면 고넬료의 가정이 다음의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가정을 이룬 것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고 저와 여러분의 가정도 고넬료 가정처럼 좋은 가정들로 만들어 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1] 신앙이 있는 가정

2절 보면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혼자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온 가족으로 하여금 다 함께 믿게 했습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정 행복의 기본입니다.
여러분,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교회나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가치관이요, 인생관입니다. 말하자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방향감각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족들이 신앙이 있고 없고 하면 서로 다른 가치관, 인생관을 갖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살아가게 될 텐데 얼마나 피곤한 일입니까? 불화의 요소가 항상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집안에 원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신앙이 통일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불신앙으로 통일하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죠. 그것은 다함께 멸망하는 길입니다. 신앙은 내세의 영원한 운명을 좌우하고 결정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 사실은 현세보다 내세가 더 중요합니다. 현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게 당장은 중요하죠. 그러나 내세에 관해 무지한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인 일입니다. 현세는 잠깐입니다. 반면에 내세는 영원합니다. 아무리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잘 먹고 잘 산다 하더라도 내세에 실패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기서 ‘목숨’은 ‘영혼’을 가리키는데, 영혼이 내세에 지옥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 받으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눅16:19 이하의 말씀을 보면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사로는 비참한 현세의 삶을 살았지만 신앙이 있었기에 천국에 들어가 영생 복락을 누립니다. 반면에 부자는 모든 게 다 있어도 신앙이 없었기에 음부에 들어가 고통을 겪게 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머리 보이는 아브라함에게 요청합니다. 나사로를 시켜서 물 한 방울만이라도 갖다가 혀에 축여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죠. 그러니까 이번에는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들에게 이 비참한 사실을 알려줘서 제발 오지 않도록 전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것마저도 거절당합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나 홀로 신앙은 곤란합니다. 가정 복음화를 위해 수고해야 됩니다. 제일 좋은 것은 가장이 먼저 예수 믿고 그로 인하여 차례차례 믿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다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가족 중에서 위치가 어떠하든지 먼저 믿은 사람이 우선 “내가 가정의 제사장이다” 생각하고 나머지 가족들을 기도하며 인도하면 됩니다. 한 피 나누고 한 지붕 밑에서, 심지어 한 이불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는 천국, 하나는 지옥 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습니까? ‘영원한 이산가족’이 되는 겁니다. 물론 가족을 전도한다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차라리 남을 전도하는 게 쉽죠. 그러나 우리가 뜻을 정하고 기도하며 수고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주실 줄로 믿습니다.

물론 선조로부터 신앙을 자연스럽게 물려받으면 더 좋겠죠. 그러나 초대신앙도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초대신앙의 경우 시험도 많고 갈등도 많지만, 그래도 보람이 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불신앙의 고리를 끊고 나로부터 앞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자자손손 믿음의 가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자녀들에게 신앙을 잘 전수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산 물려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공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앙 물려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조금 주는 것이다. 공부시키는 것은 많이 물려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모든 것을 주는 것이다.” 또 이렇게 비유해 봅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물고기를 주는 것이다. 공부를 시키는 것은 낚시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배와 그물을 주고, 그물질하는 법까지 가르쳐주는 것이다.” 재산을 물려주고 공부를 시키는 게 나쁘다는 말은 아니죠. 우선순위가 뭐냐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분들이 우선순위를 지키지 못합니다.

한번은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 캠퍼스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건물 앞에 설립자 하버드 목사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다 까만데 발등만 반들반들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하버드의 발을 만지면 자녀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겁니다. 저도 만졌죠, 뭐. 그런데 우리 아이들 성적이 안 올라가더군요. 물론 괜한 소리죠. 부모 마음은 다 같은 겁니다. 미국인 부모나 한국인 부모나 자녀가 공부 잘하는 것은 동일한 소원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자녀의 신앙을 위해 더 큰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가정이 고넬료 가정처럼 온 가족이 자자손손 예수 믿고 복을 누리는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사랑이 있는 가정

본문 2절 다시 보면 “온 집으로 더불어 ... ” 그랬습니다. 이 말은 온 가족이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의미이지만 더 나아가 한 마음 한 뜻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가득한 화목한 가정이었을 겁니다. 행10:24 보면 사람을 보내서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까지 다 모여 있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화목한 가정 아니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가정은 하나님의 마지막 창조물이며,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창1:27 보면 인간을 창조하되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가정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모든 창조 세계를 보시며 뭐라고 하셨나요? 창1:31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이 말씀은 창조 세계의 완벽함과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아름다움, 그 중에서도 가정의 아름다운을 의미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행복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면 천국과 같이 아름답고 행복해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살아가면 지옥과 같이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뭐겠습니까? 한 마디로 ‘사랑’이죠. 사랑은 비유컨대 ‘가정의 산소’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식합니다. 지옥 같은 고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사랑이 있으면 편안합니다. 천국 같은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사랑이 있으면 지상 천국이 되고, 사랑이 없으면 지상 지옥이 되는 겁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가정들 가운데서도 과거 지옥 같은 고통 속에 있다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천국 같은 가정으로 변화된 케이스가 적지 않으실 겁니다.

인간은 다 죄인입니다. 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극도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죄성의 기본 특징이 이기심이거든요.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관계가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그 사이에서도 이기심이 발동합니다. 그렇게 되면 여지없이 관계가 깨어지고, 불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일단 가정불화가 생기면 대책이 없습니다. 물질이 있으면 뭐하고, 명예 권세가 있으면 뭐합니까? 인생이 마냥 괴로워지는 겁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런 경우 유일한 치유책은 오직 하나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랑은 다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뜨겁던 부부의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어집니다. 자식은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배은망덕합니다. 가장 고상한 부모의 사랑조차 때로는 변질됩니다. 다 이기심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완전합니다. 사49:15 보면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과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인간사랑 중 최고인 부모 사랑조차 때로는 불완전하다는 겁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아가페 사랑, 이타적인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십자가에 죄인들의 대신해서 피 흘려 희생하신 그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체험하고 배우면 인간관계가 이기적인 관계에서 이타적인 관계로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행복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신 가정은 물론이고, 신앙의 가정에서조차 참 사랑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신앙은 갖고 있으되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성숙하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옛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을 살아가면 참 사랑을 실천하지 못합니다. 오직 성숙한 자, 즉 성령 충만한 자만이 이타적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흔히 성령 충만을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 참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엡5:22~6:4에 보면 부부 사랑, 부모 자식 사랑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는 자식을 오직 하나님 말씀으로만 가르치고 ... 그런데 이게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 그래요? 인간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서로 자기를 위해 달라고만 하므로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됩니다. 그래서 앞에 엡5:18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그럴 때 비로소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예수님이 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사랑이 뭡니까? 말은 많이 하지만 때로는 막연한 느낌이 듭니다.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고, 양보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도 막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 아주 간단한 것을 제안해 봅니다. 우리 가정에 행복과 불행이 말 몇 마디로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말로도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말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나하나 실천해 나아가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부족해서 많은 불화와 문제들이 야기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언어부터 사랑의 언어로 바꾸면 좋겠습니다. 언어를 통해 가정의 행복이 깨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사랑의 언어가 부족합니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엄청나게 큰 문제입니다. 언어에는 하나님이 신비로운 능력이 있습니다. 말 한 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언어에는 사망의 언어와 생명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별로 어려운 게 아닙니다. 아이들도 할 줄 아는 말입니다. 사랑, 용서, 칭찬, 격려, 감사, ...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겁니다. 참 이상하게 이런 게 우리에게 아주 부족합니다. 이런 것들은 표현하지 꼭 화가 나고 미움이 생길 때만 그런 마음을 마구 표출합니다. 그러니까 사소한 일로 엉뚱하게 가정의 화목이 깨지곤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합니다.

어느 가정에서 딸아이가 휴대폰을 갖고 문자 메시지를 합니다. 옆에 있던 엄마가 신기하게 바라봅니다. 딸이 가르쳐주니까 더듬 더듬 따라합니다. 처음 배워서 누구에게 제일 먼저 보낼까 하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금세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 지금 뭐 하는 거야?” “뭐긴요, 나도 문자 배웠지.” “근데 왜 ‘여보 사망해’라고 보낸 거야?” “예? 나는 ‘여보 사랑해’라고 했는데 ... ” ㄹ 자판 누를 걸 옆에 있는 ㅁ 자판을 잘못 눌렀던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한 실수였습니다. 이처럼 어색하고 서툴더라도 자꾸 표현해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에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사실은 생명의 언어가 별 게 아닙니다. 몇 가지 말만 잘 해도 충분합니다. 고마워, 미안해, 괜찮아, 사랑해 이 정도만 해도 됩니다. 외국어도 그렇잖아요. 이 몇 가지만 배워 놓으면 대충 통합니다. 가정에서 이렇게 쉬운 말들만 잘 표현해도 분위기가 확 달라질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가정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해져서 지상의 작은 천국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3] 사명이 있는 가정

본문 2절을 다시 보면 후반 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 ...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 그랬습니다. 그의 가정은 받은 축복을 이웃과 나누는 가정이었습니다. 행10:24에는 베드로를 청해 놓고 일가친척들은 물론이고 친구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이웃과 복음을 나눈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고넬료의 아름다운 인격은 유대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행10:22) 이런 가정이었기에 하나님은 고넬료 가정을 사용해서 베드로의 편견(이방인을 배제하고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벗겨 주는 역할을 감당하게 합니다. 안디옥 교회가 선교하는 교회로 성장한 것, 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 등의 배경에 고넬료 가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가정에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족들끼리 말 먹고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복을 나누는 사명을 감당해야 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의 목적이 바로 복의 근원(=복의 통로)이 되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과 가정은 축복의 웅덩이가 아닙니다. 흘려보내는 축복의 시냇물입니다.

이렇게 사명을 감당할 때 그 가정을 하나님이 더욱 풍성하게 축복하십니다. 잠11:24~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고 나누는데 신기하게 더욱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교회에서 에바브로 디도 집사를 통해 선교비를 전달받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감사하면서 하나의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빌4:17~19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복의 통로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물의 원리와 같습니다. 물을 퍼내면 밑에서 새 물이 솟아올라옵니다. 그러나 우물에서 물을 퍼내지 않으면 서서히 썩어가는 것입니다. 축복을 나눌 때 더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이 있는 가정은 늘 하나님의 축복으로 풍성합니다. 꼭 이런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고넬료의 가정은 이처럼 신앙이 있고 사랑이 있고 사명이 있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행복이 있고, 영광이 가득한 가정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고넬료의 가정과 비교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디 고넬료의 가정 같이 지상의 작은 천국 만드시고, 행복한 인생 의미 있는 인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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