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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라 (삼상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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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요한 목사 (평안의교회)

5월 가정의 달의 중심이랄 수 있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모든 성도들과, 부모님 위치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하시면서 다신 카네이션은 우리 젊은이들이 어제 오후 늦도록 만든 것이어서 더욱 뜻깊은 어버이주일이 된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의 기능을 네 가지로 정의하는데, 첫째는 출산입니다. 자녀를 낳음으로 인하여 가문의 대를 이어갈 수 있고, 농경사회에서는 집안 여러일들을 나누어 할 수 있기에 자녀를 낳는 일을 매우 중히 여겼습니다. 요즘은 출산율이 너무 떨어져 국방의 의무를 담당할 젊은이들이 현격히 줄어들어 군 병력 운용에 큰 차질이 있다고 염려할 정도입니다.

가정의 두 번째 기능은 경제적인 측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산업 현장에서 일하여 수입을 얻어야만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국가 경제는 가정경제가 기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 경제가 든든하면 국가경제도 든든하기 마련이어서 오늘날은 더욱 더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가정마다 빚이 너무나 많아서 국가 경제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가정의 기능은 휴식입니다. 가정에서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정이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능 중에 하나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고 있는데, 그런한 정신적, 육체적 부담을 가정에서 해소시키지 못한다면 언제가는 엉뚱한 방향으로 폭발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사회생활이란 모든 면에 있어서 최고의 언어와 행동가짐을 요구하고 있기에 그 긴장감은 말로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이 그 긴장을 풀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면 다시금 생기를 얻고 활기를 되찾아 사회속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연주를 위해서는 바이올린의 줄을 팽팽하게 당겨주어야 하지만, 연주가 끝나면 미련없이 풀어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네 번째 가정의 기능은 교육입니다. 이 기능을 극대화 시킨 민족이 히브리민족입니다. 그들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정을 철저한 교육적 현장으로 삼고 그곳에서 기본교육, 민족의 자긍심, 나아가 신앙교육까지 담당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아버지라고 하는 페스탈로치도 가정에서 부모의 위치는 어린이에게 있어서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교사이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정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향한 꿈과 비전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가정들은 예수만 섬기는 아름다운 가정으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과 블레셋이 전쟁을 위해 각각 골짜기에 진을 친 장면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블레셋은 원래 BC 12세기 말에 지중해 크레타섬과 에게해 지역에서 팔레스틴으로 이주해 온 민족입니다. 그들은 매우 발달한 무기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 이스라엘을 징계하실때, 그들을 채찍의 도구로써 많은 경우에 사용하셨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첫번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하여 죽임을 당한 군사가 4천명이나 되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군사들이 계속해서 진격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블레셋의 피해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큰 패배를 당하고 큰 인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다시 진영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은 3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그들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도 간혹 착각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두 가지를 착각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에게 대한 저주를 선언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전에서 자신들의 사욕을 채우는 일에만 급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노인이 끊어지게 하리라." 참으로 무서운 선언입니다. 뿐만아니라 "한 날 한시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예고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어처구니 없게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실패의 원인을 하나님에게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낸 것이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지고 오면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법궤가 먼 실로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패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법궤를 전투가 벌어지는 진영으로 가지고 오자고 결정한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에 백성이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국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가 왔으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따라오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들은 두통이 생기면 성경책을 베고 잔다고 합니다. 그러면 두통이 말끔히 사라진다는 것이지요. 성경책이 무슨 부적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마치 부적같은 역할을 할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패배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한 때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서 철저히 회개하는 각성이 필요한 때입니다만 불행하게도 본질적인 문제에는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문제를 위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 법궤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하나님이 이미 3장에서 포기하신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점입니다. 사울왕이 교만함으로 전쟁에 나아가기 앞서 제사를 드리는 일을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지 않고 왕권을 앞세워 행한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버렸노라고 하신것 처럼, 제사를 업신여기며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미 하나님께서 포기하신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법궤를 가지고 왓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꽉 막혀 버렸어요. 이스라엘의 희망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음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4절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승리는 물건너 갔다고 하는 사실을 엿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리석은 백성의 지도자들은 이렇게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서 6절까지 상황은 의외였습니다. 언약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더니 이스라엘 백성들 진영에서 큰 소리고 환화가 일어나고 사기가 충천해져 진동을 했어요. 이제는 우리가 이겼다. 법궤가 우리 가운데 왔으니 이제는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군사들이 사기가 충천했어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착각하니까 세상 사람도 착각합니다.

7절에서 8절,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가로되 도대체 이게 웬 일이냐. 4천명이나 군사가 죽고 나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이스라엘 진영에 땅이 진동하는 사기가 충천함은 이게 웬 일이냐. 정탐꾼을 보내 봤겠지요? 그리고 돌아와서 하는 보고는 그들 진영에 그들의 신이 도착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가로되 신이 진에 이르렀도다. 그래서 벌벌 떨기 시작했어요. 이스라엘 진영이 막 사기가 올라가는 만큼 비례해서 블레셋 진영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오.

잠깐 동안 착시현상이 생겼어요. 이스라엘은 충만해지고, 블레셋은 땅바닥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한 쪽에서 사기 충만, 한 쪽에서는 사기가 떨어진 가운데 붙어봤는데, 두 번째 전쟁에서는 놀랍게도 이스라엘을 보병에 엎드러진 자가 3만명이나 되었더라. 첫 번째 전쟁보다 더 많이 죽었습니다. 처음에 4천명이 죽었는데, 이번에는 3만명이 죽었어요. 법궤를 가지고 왔는데 웬일입니까? 사기가 충천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블레셋 사람들도 깜짝 놀랐어요. 자기들이 완전히 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첫 번째 전쟁보다 거의 열배나 더 이긴 거예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두 번째 착각이 거기에 있어요. 패배에 대해서 자신들의 회개가 여호와 앞에 깨진 마음으로 무릎을 꿇는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전쟁의 패배의 원인을 삼고, 두 번째는 법궤를 가지고 옴으로써 만군의 여호와, 전쟁에 능한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법궤를 가지고 왔으나, 법궤는 전혀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문제는 내게 있는 줄 믿습니다. 내가 변화되지 않는 한 교회가 무슨 의미가 있구요, 내가 변화되지 않는 한 법궤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변화될 때 교회도 은혜가 되고, 내가 변화될 때 믿음의 공동체도 의미가 있지요. 내가 여전히 저주 받은 인생으로, 내가 여전히 깨지지 않은 심령으로 강팍하면 법궤가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런 이들에게 법궤가 역사를 한다면 우리는 또 착각할 것 아닙니까?

11절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미 수순대로 가는 거예요.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가정들에게 이 말씀에 큰 도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신실함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거룩함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라는 거예요. 우리가 신실하지 않으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 요구만 한다면 하나님은 결코 움직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먼저 내가 신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저는 평안의 가정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가짐으로 세상 어느 가정보다 앞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은 어제 어버이날에 부모님을 위하여 많은 시간과 물질을 기쁨으로 사용했을 줄 믿습니다.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면서 나름대로 많은 수고를 했을 것입니다. 부모공경은 바로 가정의 든든한 배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난 해 통계청이 발표한 "한국 가정에 대한 사회적 통계"를 보면, 작년도에 결혼한 가정이 30만 4천 900가정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혼한 가정이 16만 7천 100가정입니다.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가정이 이혼 할 때 드는 사회적 비용이 평균 3천백71만원입니다. 1년 동안 이혼한 가정들을 합산해 보면, 무려 5,300억원이라는 엄청난 수치가 나왔습니다. 이 비용은 청년 근로자 14만명이 일할 때 얻는 비용과 같다고 통계청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붕괴되는 사회 속에서 믿음의 가정들이 이 사회를 지탱해야 할 마지막 보루가 되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인 희생만 강조해야 하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믿음의 사회가 착각을 하고 지도자들이 잘못된 판단을 계속한다면 이 사회 역시 붕괴의 참상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듯 여겨집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 대책을 세워야합니다. 첫째는 지도자들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백성들의 문제이기보다는 지도자들의 문제가 훨신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됩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서 깨어진 마음으로 여호와 앞에 회개하면서 이 지경이 된것이 바로 나의 책임임을 고백하는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도자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기도하면서 우리 평안의교회가 앞으로 장로를 세우는 기준으로 2가지를 세우고 실천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먼저 세움을 받은 장로님들이 온전히 기도의 생활을 할 때입니다. 두 번째 기준은 먼저 세움을 입은 장로님들에게서 전도의 열매가 있을 때 후임 장로를 추천하겠습니다. 약속한대로 다음 장로 후보는 여성들을 추천하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도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한 문제의 원인은 지도자에게 있었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문제 역시 지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저 자신도 그런 면에서 정말 정신을 차리고 각성하기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평안의 교회가 강건하려면 지도자가 바로 서야 합니다. 기도하는 지도자, 주님의 소원인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 치는 그런 지도자들이 있는 한 이 교회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 속에 든든히 설줄로 믿습니다. 다시한번 신실함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가정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패배가 칼과 창의 수효가 부족해서가 아니며, 실로에 있던 언약궤가 도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임을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시대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임을 고백하면서 이 시대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신실하지 않고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음을 고백하며, 먼저 우리가 무릎을 꿇어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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