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동안 굼! (막 5:21-24, 35-43)

  • 잡초 잡초
  • 515
  • 0

첨부 1


- 설교자 : 주승중 목사 (동안교회)

  1. 들어가는 말

  아마 오늘 아침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들은 주보를 보면서 질문이 한 가지 생겼을 것입니다. 특별히 설교 제목을 보면서 “동안 쿰? 이게 무슨 말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 하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치 빠른 분들은 그 뜻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향하여 “달리다 굼”(41절)이라고 외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달리다 굼”이라는 말은 두 가지 단어로 되어 있는 말인데, 먼저 “달리다”(ταλιθα)라는 말은 “little girl”(작은 여자아이)이라는 뜻이고, “쿰”(κουμ)이라는 말은 “arise”(일어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달리다 쿰”이라는 말은 41절 하반 절에 번역된 대로 “소녀야,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동안 쿰”이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머리가 좋은 여러분들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그것은 “동안이여, 일어나라” “동안교회 성도들아,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일어나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에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동안 쿰!”이라고 말씀하시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듣고 깨닫게 되기를 원합니다.     

2. 몸 말

1) 믿음의 문제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치유사역을 하실 때에 병자들에게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혹은 “그 믿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고쳐 주셨다” 또는 “네 믿음이 크다”라든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는 등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사이에도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고 있던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34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은 로마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실 때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태 8:10)고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극찬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책망하셨고, 풍랑 때문에 떨고 있던 제자들을 향해서는 “믿음이 적은 자여”라고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안타깝게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믿음이 적은 제자들, 믿음이 없는 선민들, 믿음이 병든 사람들, 믿음이 죽은 사람들을 보실 때에는 그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어떤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보시기에 “네 믿음이 크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소리를 들을 만 합니까? 아니면 “믿음이 적은 자여”라는 안타까운 소리를 듣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은 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우리의 믿음 없음에서 일어나 적은 믿음으로, 적은 믿음에서 일어나 예수님도 칭찬하시는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2) 본문의 배경

  이스라엘 북단에 있는 갈릴리 해변 옆에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여느 곳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의 사건은 바로 그 회당의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은 사건을 배경으로 일어났습니다.

  보통 유대교 회당에는 여덟 명의 장로가 지도를 하는데, 그 장로들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회당장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장은 유대교에 철저히 헌신하고, 율법에도 능통하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회당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야이로가 자기 딸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나 역사를 살펴볼 때 거의 보기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정통랍비 출신도 아니었고, 단지 시골 출신의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상황에서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와 그 발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모든 체면을 뒤로하고, 딸을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왔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야이로의 죽은 딸에게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셔서 그녀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낮은 수준의 야이로의 믿음을 보다 큰 믿음의 경지로 일어나게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야이로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3) 야이로의 적은 믿음: 위대한 의사로 믿는 믿음

    먼저 야이로에게는 적어도 주님께서 자신의 딸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즉 그의 주님께 대한 믿음은 위대한 치유자에 대한 믿음, 위대한 의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믿음의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먼저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왔다고 하는 그 행위 자체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유대교에서 대표적인 위치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가 당시에 유대교로부터 이단자로 낙인찍힌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간청을 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사회적 통념상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오늘의 대학총장이 초등학교도 가지 않았던 시골청년의 발아래 엎드려 간청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장면이었습니다.     

  22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회당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구하여” 그렇다면 회당장 야이로는 왜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 발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게 된 것입니까?  그는 도대체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했기에, 이렇게 체면이고 위신이고 다 제쳐놓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구를 한 것입니까? 그 절박한 상황을 23절은 설명하기를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문제는 그의 딸에게 있었습니다. 그 당시 최고의 지위와 지성을 가지고 있던 그로서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사랑하는 딸의 죽음의 문제가 그로 하여금 이렇게 예수님에게로 나와 엎드리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의 기록(눅 8:40-42, 49-56)에 의하면, 지금 죽어가고 있는 그의 딸은 열두 살 된 외동딸이었습니다. 그 딸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으나, 분명한 것은 그 딸은 지금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그 전날 밤 그는 밤새도록 딸이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죽어가는 딸의 얼굴에는 핏기가 사라지고, 숨소리는 점점 더 작아지고, 그 입술에는 침이 마른 채 점점 파랗게 변해 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침이 되자 만사를 제쳐두고 예수님께 달려와 무릎을 꿇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이렇게 달려 나왔는지는 본문이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 먼 자를 보게 하며,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이시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나아가면 자신의 딸의 병이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나왔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왔던지 간에, 그는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자기의 지위와 체면과 편견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바로 야이로의 믿음이 있습니다. 치유자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 비록 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구세주, 메시아이심을 믿는 믿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예수님께 나아가면 자신의 딸이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그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의 해결함을 받기 위하여 나오는 믿음, 병이 있을 때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주님께 나오는 믿음, 이런 믿음은 그 때도, 오늘도 누구에게나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입니다. 아마 우리 가운데에도 어떤 어려운 문제가 계기가 되거나, 어떤 질병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신 분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런 믿음이라도 절대로 외면치 않으십니다.
 
4) 야이로의 적은 믿음: 모든 것을 포기하는 믿음

  그런데 야이로의 믿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딸의 병고침을 위하여 자신의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그런 믿음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그 동안 용하다는 의사에게도 다 가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약으로도, 어떤 명의로도 딸의 병은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입니다. 딸의 체온은 식어가고 숨이 가빠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는 최고의 지성인으로서의 선입관과 편견을, 그리고 회당 장으로서의 위신과 체면을 다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하고 긴급했는가 하면, 나중에 나오지만 그가 예수님께 가서 엎드려 도움을 요청하는 사이, 그의 딸은 기어코 죽고 말았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교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위치에 있던 그가, 예수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커다란 위험도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이단자요, 죄인으로 낙인을 찍어 놓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딸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상식과 편견으로서는 초라한 30대 목수의 아들인 예수라는 청년 앞에, 위엄 있고 나이도 지긋한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이는 다른 동료들이 그를 크게 비웃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아니 비웃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회당장의 자리를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할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금 이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가서 모든 체면과 위신을 뒤로하고 아예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말로 간구했습니다(23절). 사실 말이 쉽지 그 당시의 사회제도나 모든 환경에 비추어 볼 때 이런 행동은 참으로 발견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는 딸의 나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정도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런 행동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비록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딸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아와, 예수님 앞에 엎드린 그의 그 믿음과 겸손을 주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회당장 야이로의 모습 속에서 배우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들도 우리가 가진 문제가 어떤 것이든, 그 문제를 가지고 생명의 근원되시는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체면이 문제가 아닙니다. 위신이 문제가 아닙니다. 남의 이목이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이 문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고침 받고자 하는 데는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진정 우리의 아픔과 실패와 절망을 고침 받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을 물리치고 주님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생각과 체면과 위신을 뒤로하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그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참된 치유와 회복의 역사는 내가 가진 문제와 영육간의 질병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겸손하게 무릎 꿇는 믿음에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5) 야이로의 믿음: 인간적인 믿음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

  자, 그런데 오늘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보면, 문제가 그렇게 쉽게 끝나지를 않았습니다. 모처럼 큰맘 먹고 자기의 모든 위신과 체면을 무릅쓰고 나아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 공개적으로 엎드려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집에서 연락이 오기를 딸이 벌써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이상 괴롭게 마소서”

  그는 이제 그의 마지막 소망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딸이 죽어 가는 것을 보고, 마지막 방법으로 모든 체면을 뒤로하고, 예수님 앞에 나아와 호소하여, 모시고 가고 있는데, 도중에 죽었다는 전갈이 온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계속해서 모시고 가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여러분이 이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사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닙니까? 모든 것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이지, 숨이 끊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들의 능력의 한계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의 한계가 바로 죽음인데, 야이로는 지금 바로 그 인생 최대의 절망의 벽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딸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은 야이로는 이제 인간적 생각과 판단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여기서 끝이 났습니다. 인간의 경험에 의한 가능성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사건의 결정적인 순간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야이로는 지금까지는 예수님을 한 위대한 의사로 모시려고 했지만, 이제는 구세주로, 부활의 주님으로 고백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만일에 야이로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믿는 부활신앙을 가졌더라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야이로의 믿음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단지 예수님을 한 유능한 의사로 알고 모셔가려 하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아니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요, 다만 위대한 의사로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예수님을 향해 “죽은 자를 살리시는 구세주”로 고백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주님으로 믿어야 하는 단계에 온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사가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는 분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시는 참 생명의 주인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은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 황당한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당황과 딜레마를 아시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36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의사 누가는 이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눅 8:50)

  복음입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말씀은 인간의 모든 고민과 갈등과 한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이 깊은 절망의 순간에, 이 숨 막히는 갈등의 순간에, 이 엄청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야이로는, 결국 그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지는 못하였지만, 그 순간에 그는 그 약속의 말씀을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죽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병들지 않게 하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부활시키시는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합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그 순간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 깨닫지는 못하였지만,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기기로 결단 하였습니다. “과연 살 수 있겠습니까?” 묻지도 않기로 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모든 것을 예수님께 위탁하기로 결심하지를 않았다면 “예수님, 제 딸이 죽었다는군요. 죽었다는데 이제 더 이상 어쩌겠습니까? 그동안 고마왔습니다.”하고 체념해 버리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그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네 딸이 구원을 받으리라”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 순간에는 다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대로 믿고 따랐습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께서 귀히 보시는 그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그의 딸을 죽음에서 불러 일으켜 세웠습니다. “달리다 굼! 소녀야 일어나라” 말씀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몰아내셨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오늘 본문의 사건이 조금은 황당하게 느껴지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 벌어질 수 있었을까? 생각되십니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죽은 아이를 보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셨을 때 비웃었던 것입니다(40절). 상식적으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죽은 것을 잔다고 하니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지요. 그러나 이제 야이로는 이런 인간의 생각과 상식과 이성을 넘어서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주님의 말씀을 믿기로 결단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의 이런 순박한 믿음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부활의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직도 이런 사실이 먼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위에 계셨을 때에나 있었던 사건으로 생각되십니까?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6) 20세기의 사도행전

  저는 언젠가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이라는 한 인도네시아 평신도 선교사가 쓴 간증서적을 읽고 많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에 나타난 놀라운 역사들을 성경말씀과 대조해 보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저의 불신앙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한 평신도 선교팀이 선교활동을 하면서 겪은 수많은 죽음의 위협과, 강의 위험과 독과 맹수와 정글, 미개인들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 하신 20세기의 기적들, 20세기의 사도행전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많은 역사(독초 사건, 강을 건넌 사건, 물이 포도주가 되는 사건 등)가 일어났지만, 그 중에서 대표적인 한 사건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한 번은 이 전도팀이 어느 한 마을에 가서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찬송을 부르는 동안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 때문에 그 지방의 2만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도팀이 한 마을에 갔었는데, 그 마을에 초상집이 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은 이틀 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유가족들이 장례식에 그들을 초청했는데, 이미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초청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시체는 죽은지가 이틀이 지났으므로 매우 부패해 있었습니다. 열대 지방에서는 사람이 죽고 여섯 시간이 지나면 썩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이틀이면 구역질이 날 정도이고, 죽은 후 이들이 지난 시신들은 보기에도 참혹할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그 집에 도착해서 조객들 앞에 서 있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한 형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저 관 곁에 가서 죽은 사람 주위에 둘러서서 찬송하여라. 내가 그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길 것이다.”

  한 형제를 통해 말씀이 떨어지지 그들은 한숨을 쉬었습니다.

  “오, 주님! 이 사람은 죽은지가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오, 그것은 정말 불가능합니다.”

  전도팀은 이 명령에 순종할 것이냐 말 것이냐 고민하며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당신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단순한 믿음과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옵소서.”

  그리고 마침내 전도팀은 주님께 복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빙 둘러 서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은 그들에게 그 순간 이렇게 속삭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썩은 사람을 두고 찬송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썩는 냄새가 30미터 밖에서도 나지 않느냐? 너희가 시체 곁에 가까이 둘러서면 너희가 입을 열 때마다 악취와 독한 냄새가 너희의 숨을 콱콱 막을 것이다. 이런 짓은 정말 바보짓이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해서 주님께 복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찬송이 끝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들은 다소 동요했습니다.

  “주님, 만일 이 사람을 살리시려거든 빨리 일으켜 주세요. 저희는 이 시체 주위에 서 있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악취 때문에 더 이상 찬송을 부르지 못 하겠습니다.”

  두 번째 찬송도 끝났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섯 번째 찬송이 끝날 때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섯 번째 찬송을 부르는데 시체의 발끝이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왜냐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가끔 죽은 사람이 깨어나서 관 근처의 사람을 껴안고 다시 죽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가까이 가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일곱 번째 찬송을 끝내고, 여덟 번째 찬송을 부르는데 그 형제가 마침내 깨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미소를 지었고, 어느 누구도 껴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저를 살리셨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이 죽는다고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틀 동안 죽어서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천국과 지옥은 실제로 있습니다. 나는 그곳도 체험해 보았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마지막 한 가지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결국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오직 지옥에 가서 죄 값을 받을 것입니다.”

  그가 여기까지 말하고 난 후에 이 전도팀은 성경을 열고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사람은 예수님을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을 하였고, 뿐만 아니라 그의 사역으로 인해서 그 지방의 2만 1천명의 사람들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돌아오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이런 내용들이 너무나 놀라워서 마침 인도네시아에서 8년 동안 선교사로 사역을 하고 있던 저의 막내 매형 목사님에게 확인을 해 본 적도 있습니다. 이런 사건에 대해서 아느냐고, 이런 사람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실제로 그런 사역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요, 기적의 역사요, 오늘도 계속되는 21세기 사도행전의 역사입니다. 사도행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야이로는 비록 놀라운 믿음은 없었지만, 그 절망의 상황에서  권능의 주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자기의 모든 지성과 지위와 체면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자기의 딸이 죽었다는 인간의 한계에 도달하였을 때에도, 체념하고 돌아서지 아니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마지막 소망까지 완전히 사라진 상태에서, 희망이란 전혀 보이지 않는 인류 최대의 원수의 죽음의 벽에 부딪친 상태에서도, 돌아서지 아니하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그는 주님을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의 주님, 생명의 주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나가는 말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믿음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디까지 믿고 있는 것입니까? 문제에 봉착할 때,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고는 절망과 죽음의 소식뿐일 때, 우리는 무엇을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에게 이 능력의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들도 생명의 주님께 대한 참 소망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도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 주님께만 있음을 믿고 이제는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 찬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소식들이 하나같이 “이제는 끝났어.” “이제는 더 이상 소망이 없어.”하는 절망적인 소식만이 들려온다 할지라도, 그런 소리는 듣기를 거부하고,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이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의심과 이성적 생각, 지성적 비판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네가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리라”고,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부활절 여섯 번째 주일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는 “동안 쿰!” “동안교회 성도들아, 일어나라.” “동안교회 성도들아, 두려워 말고 나를 믿으라. 이제는 일어나 내 손을 잡으라. 그리고 함께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동안 교회 교인들아, 너의 그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그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그 불가능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회의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불신앙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의심의 자리에서 일어나라.” “너의 그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음성이 들리십니까? 부활하신 주님의 손을 잡고 가는 우리에게 그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이것을 믿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