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강한자를 이기는 더 강한자 (눅 11:21-26)

  • 잡초 잡초
  • 953
  • 0

첨부 1


- 설교자 : 피영민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서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지 안 믿든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것은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단지 그 사람의 경험 세계가 좁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아무리 영적인 존재가 많다고 할지라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강한 자요 다른 하나는 더 강한 자 입니다. 강한 자는 마귀와 그 수하에 있는 귀신들입니다. 더 강한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마음을 세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강한 자가 지배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강한 자도 더 강한 자도 없는 빈집이고 마지막 하나는 더 강한 자가 지배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이 세 종류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며 내 마음을 점검하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21절로 26절에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은 예수님은 더 강한 자로서 강한 자를 지배하고, 강한 자를 축출하며, 강한 자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더 강한 자로서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귀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와 귀신들도 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더 강한 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때에 우리가 마귀와 귀신의 세력을 이길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14절에서 20절 까지 나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귀신들렸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벙어리가 되고 귀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청력이 상실됐고 시력이 상실됐습니다. 여기 누가복음에는 단지 ‘벙어리’로만 기록되어 있지만 똑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2장 24절의 내용에는 “이 사람이 눈멀고 벙어리 됐다.” 즉, 시각과 청각 두 가지가 다 마비가 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시니 이 사람이 보며 들을 수 있게 됐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큰 기적입니까! 어떤 사람이 보지 못하는 눈을 보게 했다고 하면 그 앞에 엎드려서 “이런 분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런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인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아니시냐. 소경을 눈뜨게 한일은 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 이분이야 말로 구약의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하고 엎드려 절해야 마땅할 터인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14절 이하에 보면 사람들의 반응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반응은 14절에 깜짝 놀라서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일부가 “아이쿠, 이런 일도 다 있나” 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또 두 번째 일부는 예수님을 시험해서 말하기를 “당신이 소경을 눈뜨게 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고 이런 표적으로 부족하니까 하늘로부터 온 다른 표적, 도수가 좀 센 것으로 보여주시오.” 라고 요구하자 예수님은 “악하고 불신하는 세대에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없다” 아니, 소경이 눈뜬 것 외에 더 큰 기적이라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나의 표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에 대한 예표인 것이니 맹인이 눈 뜬 사건보다 더 큰 기적은 사람이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하는 그런 기적 밖에는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줄로 믿습니다. 부활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습니다. 죄악은 그렇게 강한 것입니다. 기적 위의 기적을 요구하고, 죽었다가 살아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 사람들이 갖고 있는 원죄로부터 내려온 강한 불신앙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
을 비난했습니다. “아, 예수여 당신이 귀신을 내쫓는 것 보니까 당신은 귀신의 왕하고 친구관계요? 혹시 귀신의 왕 바알세불하고 동창 아니오?” 마귀와 한패거리고 마귀와 결탁됐지 않느냐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비난의 생각을 예수님은 다 아시고 세 가지의 논리로 그들을 대적하십니다. 첫째로는, “만약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고 그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이라고 한다면 왕이 어떻게 신하를 쫓아내는 일이 있느냐. 그러고서 그 나라가 제대로 설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이 말하는 것은 망하는 나라의 이야기지 정상적인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 자녀 가운데에도 귀신을 내쫓는 사람이 있다는데 그러면 너희는 내가 귀신을 내쫓을 때는 마귀의 왕과 동창이라 비난하면서 너희 자녀가 내쫓을 때에도 마귀의 왕과 결탁되었다 비난하겠느냐? 그러면 너희가 나를 비난한 비난으로 너희 자녀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어리석은 사람들아” 그리고 “내가 마귀하고 결탁된 것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낸 것이니라. 내가 결탁되고 함께하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마귀가 아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키시는데 있어서 마귀와 타협도 결탁도 없으십니다. 마귀를 그 발아래 깔아뭉개고 영원한 불 못에 던져버리는 목적을 결코 철회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신들린 자나 귀신이나, 혹은 꿈속에서나 생시에서 악한 영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귀신아 나는 너의 운명을 알고 있다. 너희는 뜨거운 불 못, 영원히 타는 불 못에 던져질 존재니라” 자꾸 그렇게 말하면 귀신이 듣기 싫어서라도 도망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마치시고 인간의 마음을 세 종류로 나누셨습니다.

Ⅰ. 강한 자가 마음을 지배한 사람

  “강한 자가 마음을 지배한 사람” 이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귀신의 궁전입니다. 귀신들은 더러운 영입니다. 윤리적이고 정결한 귀신은 없습니다. 불신자의 마음은 귀신이 그 마음에 거주하고 통치하며 무기를 갖고 그 마음을 소유합니다.
그리고 더 강한 자가 빼앗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지킨다 하였습니다. 불신자의 마음은 강한 자인 귀신에게 지배당한 마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이 강한 자로 와서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있으면 나름대로 귀신적인 안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불신자라 해서 다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귀신인 강한 자가 악한 영의 무기로 마음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 무기는 궤술과 권세 즉, 거짓말입니다. 그것으로 마음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너는 재물이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인기가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권력이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지식이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자식들이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학위가 있으니 평안하다.’ ‘너는 건강이 있으니 평안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과연 평안한 것입니까? 사람에게 뛰어난 지식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잊기 마련입니다. 치매 같은 병이 오면 다 잊어먹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보고도 못 알아봅니다. 계단에 서서 올라가던 것인지 내려가던 것인지 잊습니다. 문을 열고 서서 나가던 것인지 들어오던 것인지 잊습니다. 더 심하면 바지를 입다가 벗던 중인지 입던 중인지 까먹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부르는 노래 제목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된 평안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3절의 말씀에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거짓된 평안함을 갖고 있으나 갑자기 홀연히 멸망이 임할 때에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귀신은 불신자의 마음을 자기의 재물로 생각합니다. 자기의 소유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온 지체를 지배합니다. ‘이 사람은 내 것이라 고로 나를 기뻐하는 말을 할 것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말을 할 것이다.’ ‘이 사람의 눈은 내 것이라, 고로 더럽고 추한 것을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사람의 손은 내 것이라, 고로 이 사람은 나를 위해서 일하고 나의 노예가 될 것이다.’ ‘이 사람의 발은 내 것이라, 고로 내가 좋아하는 사악한 쾌락의 장소로 그 발을 돌려갈 것이라’ 이렇게 강한 자인 귀신은 불신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장악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가 값비싼 밍크코트를 하나를 샀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오늘 큰 돈을 썼습니다.” “아니 우리 집에서 큰 돈이 어디서 났소?” “카드 다섯 개를 긁었지요.” “아니 형편도 어려운데 그런 비싼 옷을 사 입었소?” “여보, 내가 쇼핑을 하다가 이 옷 앞에 섰는데 마귀가 내 앞에서더니 나를 유혹하는 것 아니겠어요?” 남편이 말하기를 “마귀가 유혹을 하면 예수님처럼 “사단아 내 뒤로 물러날지어다 하고 명령을 해야지” “내가 그렇게 했지. 그런데 마귀가 뒤로 가더니 이 옷은 뒤에서 보니까 더 예쁘네” 하는 바람에 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불신자의 마음이 이처럼 강한 자가 와서 지배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권력과 지식이 많고 영리하며 출세를 해도 그 사람의 마음이 강한 자인 귀신이 지배하는 마음일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 말씀이 거역되고 더럽고 추한 것을 좋아하고 말씀을 들을 때에 거짓말이라고 생각이 된다면 그 마음은 강한 자인 귀신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산에서 집회를 하는데 한 사람이 뒤에 앉아서 설교를 들으면서도 계속 ‘거짓말, 거짓말’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강한 자에게 속은 것입니다. 귀신이 그 사람마음에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라 해서 다 강자가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Ⅱ. 마음이 빈집이 된 사람

  불신자 중에서 깨끗하고 윤리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강한 자가 그 마음에서 나갔기 때문입니다. 본문 24절을 보면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서 자발적으로 걸어 나간 것입니다. 쫓겨 나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의사로 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서 오래 일하다가 소풍을 간 것입니다. 안식년을 갖기 위해 나간 것입니다. 하도 많이 일을 하다보니 잠시 바깥세상 구경하려고 나간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영이 마음에 있다가 나가면 사람은 잠시 정신이 들게 됩니다. ‘아이고, 내가 왜 그렇
게 살았을까’ 하면서 마음의 먼지를 떨어내고 수리를 합니다. 리모델링을 합니다. 마음을 소제하고 수리하는 것입니다. 불신자 중에서도 마음이 소제되고 수리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잘못 살았던 것도 정리하고 책을 읽어 마음의 양식을 삼고 부패한 과거를 반성해보고 돈도 갚고 잘못한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 인간관계도 개선하고 윤리도 개선하고 술 담배도 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개혁할 수도 있고 수양도 가능한 존재인 것입니다. 남이 봐도 ‘저 사람은 진실로 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소제하고 수리를 해도 마음이 비어있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빈 상태로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을 소제하고 수리해도 빈 상태로 두는 것은 불완전한 개혁입니다. 더 강한 자가 마음의 집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하여 원래 있던 강한 자를 누르고, 강한 자의 무장을 빼앗고 재물을 나누는 역사가 없다면 참된 개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 어떤 이가 잘못을 저지르다가 감옥에 갔다 와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런데 얼마안가 더 큰 도적질을 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시키는 국제 도둑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되겠습니까? 왜 나중에 더 악한 자가 됩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에 더 강한 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들어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잠시 소풍을 갔다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수양하기 위해서 자기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단사설, 박수무당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워서 뭐하겠습니까? 그러면 원래 있던 귀신이 밖에서 소풍 다니다가 만난 선배 동창,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피곤해서 자기 있던 곳으로 와보니 소제되고 수리되고 깨끗해진 것을 보고 리모델링 된 집에 혼자 있기 아까워 자기 선배, 자기보다 악한 것들을 더 데리고 와서 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마음을 비우는 것은 영적으로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은 더 악한 귀신을 초청하는 초청 행위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합니다. 성령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현재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을지라도 계속 교회에서 말씀 듣고 성경을 한 자라도 더 읽어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지배할 때에는 강한 자가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빈 마음은 위험한 것이고 세상적인 수양과 개혁은 불완전한 것이 불과하지 그 것으로 인해 근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Ⅲ. 더 강한 자로 마음이 채워진 사람

  그러므로 가장 좋은 마음은 더 강한 자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더 강한 자가 누굽니까? 그 사람입니까? 마귑니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이십니다. 성령과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속에 오신다 하였습니다. 본문 22절에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고 하지 않았습니까? 더 강한 자가 올 때에도 주권적인 의지로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오라고 오고 가라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때 전부터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따라서 오신 것이요 주권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오신 것이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 때가 되서 오신 것입니다. 또 중요한 것은 더 강한 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에 오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CBMC(한국기독실업인회)에서 말씀공부를 하는데 어떤 한 분이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택함 받아 구원받은 것을 어
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내 마음에 더 강한 자가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해답은 간단합니다. 더 강한 자가 강한 자와 전쟁을 하면 그것은 더 강한 자가 계시는 증거입니다.

  과거에는 죄를 지어도 ‘나는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던 사람이 예수님이 마음에 찾아오시면 전쟁이 일어납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내가 지금까지 죄를 지으면서 살았구나.’ ‘하나님 아버지 내 마음이 죄로 인해 고통 하니 어쩌면 좋습니까?’라며 갈등과 전쟁이 생기는 것이 더 강한 자가 오신 증거인 것입니다. 더 강한 자가 우리의 마음에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강한 자를 눌러버립니다. 22절에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긴다.”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과거에 우리 마음을 지배하던 강한 자를 이기고 누르며 그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이나 후나 마음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은 거짓된 개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그냥 빈집이 된 것입니다. 거듭 말하건대 빈집은 위험합니다.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죄와 부패에 찌든 영혼에서 귀신의 세력을 추방하고 귀신이 쓰던 영혼과 육신의 모든 지체를 바꾸어 하나님께 쓰이도록 된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요 더 강한 자에게 지배된 사람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모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마음에 모셔서 '더 강한 자 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을 지배해 주옵소서' 하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강한 자와 전쟁을 하신다면 우리 인간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23절에 답이 있습니다. “나와 함께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태입니까? 우리는 강한 자와 더 강한 자, 두 세력 사이에 우리 마음이 끼어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과거에는 강한 자의 지배를 받았지만 이제는 더 강한 자가 오셔서 강한 자를 치고 물리치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 마음은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모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강한 자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은 이제는 이전처럼 단지 마음을 소제하고 수리하고 죄를 안 짓겠다는 마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인격수양과 삶의 개혁으로는 불완전 하다는 것입니다. 예배함에 있어서도 주일만 오고 때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앙생활을 망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을 먹을 때도 일주일에 한번 먹고 끝납니까? 아닙니다. 우리교회에는 수요예배도 목요철야도 금요철야도 있고 개인적인 예배도 있고 얼마든지 있습니다. 주일예배만 드리고 ‘하나님에 대한 나의 책임은 이것으로 됐다’ ‘내가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지’ 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 외적으로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올해 우리는 예수님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양다리 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편이 딱! 되라는 말입니다. 내적으로 예수님과 함께하고 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반대하는 사람이요 예수님과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과 일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사람을 본문 23절에 ‘헤치는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것 소극적으로 사는 것은 주님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반대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적극적으로 예수님 편으로 신앙생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더 강한 자 되신 예수님 편을 들고 내적으로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적극성을 띄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적극적으로 해보시기 바랍니다. 방언받기를 위해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에 적극적인 결심을 갖고, 말씀연구에도 적극성을 갖고, ‘내가 올해는 성령으로 진실로 충만해 봐야겠다.’ ‘귀신의 유혹을 적극적으로 물리쳐 버려야겠다. 주님의 편을 들어야겠다.’ ‘외부적으로도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선교에도 힘써봐야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일주일에 한번 나오고 평생 전도도 한번 안한다면 주님께서 뭐라
하시겠습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나를 헤치는 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해는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모을 때에 우리의 승리를 막을 자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더 강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삶이 강한 자요 더러운 귀신에게 점령되었던 모든 영역에서 더 강한 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하게 점령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