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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김의 도 (요 13: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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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밖히시기 전날 밤
꼭 제자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34절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주님은 이 말씀을 실제 행동으로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준 사건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세족 사건을 통해 성찬의 은혜를 나누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의 배경을 살펴보면
오늘 본문말씀의 요한복음에는 그 배경이 상세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눅22:14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나눕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성만찬 후에 눅22:24절에
[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 고 합니다.
그리고는 26절에
[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
[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 하시고는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얼마나 기가 막혀겠습니까?
3년 동안 자신을 따라다니며 보고 듣고 배우고 한 제자들인데
그것도 예수님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성만찬 직후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고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말보다 행동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것 깨닫지 못하면 당시 제자들이나 우리나 별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겼을 때 아무도 말을 하지 아니했습니다.
다툰 후라서 무안해서 그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유대의 풍습에 유대인들은 <2>
오늘날의 샌달과 같은 신을 신었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 갈 때는 신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항상 주인의 신들메를 풀고,
발을 씻기는 의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 종이 있을 때에는 가장 낮은 종이 이것을 하는 것이 관습이있었습니다.
이 일은 심지어 노예들조차 싫어하여서, 이방인 노예에게 맡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에는
단순히 그들의 발을 씻기는 것 외에 다른 깊은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도대체 무슨 의미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까?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 주시기까지,
제자들은 주님께서 발을 씻기신 이유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진리는 점차적으로 알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밤새도록 어둡다가 갑자기 아침이 오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밝아지고 깨닫게 됩니다.
이런 깨달음은 성령이 우리 마음에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일단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분이 하시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불합리해 보여도 일단 믿고 따라가자,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나의 모든 권리와 자격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예수님의 종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영광 가운데 계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고통을 당할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셔서
영원히 종의 신분을 취하기로 하셨습니다.
히브리 종같이 예수는 자신의 귀를 뚫은 것이 아니라
발을 씻기신 다음날, 자기 두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옆구리를 창에 찔리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함께 노예가 되셨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3>
자기의 모든 권리와 지위를 포기하고 그들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권리와 미래와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진정으로 이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은 서로 높아지려고 경쟁하고 있고
자기가 더 권리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들에게 성령의 깊은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생각하는 수준은 믿지 않는 자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나의 권리가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직도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끝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기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그들이 못하는 것이
내 눈에 들어오고 있다면 아직 멀었습니다.
그들의 결점을 내가 사랑할 수 있을 때,
그것을 마치 나의 면류관인 것처럼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때 이 진리를 깨닫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의 행동이
오늘 본문말씀 속에 너무나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님의 행하심을 살펴보면
1)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2)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습니다.
3)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자세히 살펴보면
1)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실제로 수고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2) 겉옷을 벗은 이유는 유대인들의 옷은 길고 느슨해서
육체적인 일을 할 때에는 언제나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러니 각오를 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3) 수건을 허리에 동인 것은
하인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자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4) 대야에 물을 담아라는 말속에는, <4> 예수님이 이미 이 일을 위해 준비하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5) 발을 물로 씻기신 것만 아니라,
[수건으로 씻기기]까지 수고하시는 섬세함을 말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척 하신 것이 아니라
종의 마음으로 진심으로 준비된 마음으로
아주 자상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섬김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6절에
베드로의 발을 씻기려고 하니 주께서 어떻게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하며 거절을 합니다. 왜? 베드로가 거절을 합니까?

이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
단시 유대 풍습의 관습적인 측면에서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 씻기심에 대해 거부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거부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나,
주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지 못한 부족함이 엿보입니다.
7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
8절에 [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 하니 예수님은 중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지금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만약 지금 예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지 않는다면 그는 신자도 아니요, 예수의 제자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께서는 이처럼 심한 말씀을 하십니까?
우리는 그 깊은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발 씻는 일은
반드시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발 씻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주님께서 그 사람의 발을 씻기고 난 후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야 주님께서 발을 씻기신 일이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셨을 때 우리는 주님께 은혜의 빚진 자가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주님께 은혜의 빚을 젓기 때문에 하는 것이 되어야지,
자기의 의지나 뜻을 따라서 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일은 <5>주님께 사랑과 은혜의 빚을 졌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모든 일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내일 가족 여러분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빚진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내가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할 때
그러니 베드로가 9절에
[ 주여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 라고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사람들이 잔치에 가기 전에 목욕을 먼저 하고 갑니다
따라서, 그들을 초대하는 집에 갔을 때는 다시 목욕을 할 필요가 없이, 발만 씻으면 되는 것으로,
발을 씻는 것은 집에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의식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10절 [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 합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된 사람은
목욕한 사람과 같이 정결함으로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죄악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집에 들어갈 때 발을 씻는 것처럼,
성화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 항상 자신을 성찰하며 깨끗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11절에
1) 자기를 파는 자 가룟 유다까지도 발을 씻기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계셨고, 본문도 계속해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절, 10절 그리고 11절에
[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것 아셨지마는
유다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씀입니다.
1절에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끝가지 사랑하셨기에 유다까지도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모두의 발을 씻겨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2) 그러나 세족 사건의 적극적인 교훈은 <6>
예수님은 스승과 주로써,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는 점입니다.
14절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의 의미를 아느냐?"
제자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왜 주님은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일까?"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가 누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이 세상에서는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법이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는 단순한 선생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아들이요, 신성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무한히 낮추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시나 섬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모든 영광과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즉 사랑은 섬김이요, 섬김은 바로 겸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헬라어에서 섬긴다는 말 가운데 한 가지가 <둘로스> 라고 해서 아예 종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3) 세족 사건의 핵심 교훈은 본을 보여 주신 예수님이라는 점입니다.
15절 [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
이것이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우리는 예수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처럼 영광의 주도 아니요, 죄가 없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성껏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긴다고 하더라도
예수께서 씻기신 것과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우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허물투성이인 우리를 받으셔서 용납하시고
우리의 부족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종이 되신 것과 <7> 우리가 종이 되는 것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종이 되실 수 없는 분이고 영원히 영광 중에 계셔야 할 분입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을 싫어하지 않고
기꺼이 그 부족한 부분을 책임지셨다면,
예수에 비하여 아무 것도 아닌 우리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용납하는 것에 문제될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말 낮아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누가 나를 무시하는 것 같으면 무서운 감정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러나 선생 또는 주라고 하는 분이 이렇게 낮아지는 것을 택했다면
제자가 낮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교회가 교회 되기 위하여 필요한 마음 중
하나는 주님께서 이토록 낮아지셨다면 나는 아무리 낮아진다고 해도결코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입니다.
그런 마음은 없이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자랑하려고 한다면
그 모임은 참된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심을 통해
우리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14절에 [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라 ] 는 것입니다.
외모나 학벌로 치장한 것은 주님이 보낸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낸 종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정도 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 발을 씻기지 못하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공동체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교회가 왜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불신을 당합니까?
교회 이미지가 왜 이렇게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까?
내가 발을 씻기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 발을 씻김에 대해서 - <워치만 니>는 - 영적교제라고 합니다.
영적 교제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교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발씻기신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또 한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이미 베드로는 목욕을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새로이 목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8>
그러나 전부 다는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 중에 목욕도 하지 않고 발만 씻고 있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발 씻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죄와의 관계로 발전시키십니다.
죄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런 근본적인 용서 없이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발만 씻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다른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분명히 가룟 유다 한 사람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유다 이야기하다 보면 꼭 생각하는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어요. 518장 5절이 있었서요
유다 처럼 안되기를 참맘으로 참맘으로 -

성도 여러분 자신의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예수를 믿으면
결국은 우리도 유다 처럼 될 수 밖에 없다는 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순간까지 제자들에게 유다를 드러내시지 않았습니다.
왜 예수께서는 유다를 드러내시지 않았을까요?
유다가 회개하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주님은 어느 누구도 모르는 가운데
유다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지적하시고, 그에게 도전하심으로
그로 하여금 스스로 판단해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여지를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주위에서 심리적인 압박을 주기 때문에 회개한다면 그것은 참된 회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기 스스로 내리는 결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는 가운데서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나에게 도전하십니다.
절대로 남이 보는 앞에서 나의 치부를 드러내어 공격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너희 중 나를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실 때 유다는 그 말을 알아들었고 주님이 떡을 주실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습니다.
만약 유다가 그 떡을 받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왜 저를 이처럼 사랑하십니까?
저는 이 떡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요즘 제 머리를 떠나지 않고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돈입니다.
저는 주님을 오늘까지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고백했더라면
그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유다는 버림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9>
그리고 그 순간 사탄이 유다의 마음에 들어갔습니다. 26-27절에 보면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
이스라엘에서 떡을 포도주에 찍어 주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이 애정 표시는 유다가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가 그 순간 마음에 일어나는 갈등을 누르고 돌이키기를 거부했을 때 그의 마음은 사탄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돌이킬 수 없는 외길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유다의 배신에 있어서 결정적인 분기점은
바로 이 떡을 받는 순간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유다가 주님의 마지막 자비와 친절을 거부하고
여전히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눌러 붙어 있을 때
이제 그의 마음은 사탄의 차지가 되어서
사탄이 지시하는 대로 끌려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성찬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떡을 먹고 이 포도주를 마심으로 나를 기념하라
나의 말을 기억하라 -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는 행동으로 서로의 발을 씻어 주라고 합니다.
이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순간 예수의 섬기는 마음으로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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