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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약 1:2-4, 약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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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우리는 흔히 “아무개 성도가 시험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또는 무슨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시험거리가 생겼다”고 말합니다. 은혜, 축복, 사랑과 같은 단어와 더불어 시험 역시 기독교인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시험에 대하여 피상적으로 알 뿐이지, 성경적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적습니다. 따라서 시험을 당했을 때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신앙에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저는 ‘시험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는 제목으로 설교함으로써 시험을 신앙 성숙을 위한 유익한 기회로 선용하는 방법을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시험의 종류에 관해서 알아봅시다.

성경은 여러 종류의 시험에 관해서 말씀합니다. 먼저, 시련으로서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연단시키시려고 주시는 시험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받았던 시험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장 1절에는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그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대할 때 우리는 의아한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야고보서 1장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오는 ‘시험’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죄를 범케 만들기 위한 목적의 시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가하시는 시험은 악한 의도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선한 목적을 갖고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예를 들면, 학교에 가면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수시로 시험을 치르게 합니다. 학생들은 시험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시험 기간이 되면 긴장을 합니다. 몇 몇 공부를 잘하는 학생을 제외하고는 시험을 좋아하는 학생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험이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시행하는 것임을 알기 때문에 군말 없이 시험을 치릅니다.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시험의 성격이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든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기를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그것도 삼일 길을 걸어갔습니다. 산 아래 이르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산을 올랐습니다. 이삭이 입을 열어 “아버지!”하고 불렀습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자, 한번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었다면 무어라고 대답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의 조상답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에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습니다.

산을 올라오면서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물었을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한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훌륭하게 통과했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증하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받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믿음을 지켜나가는 과정에서 당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때로 불신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핍박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서 옵니다. 불신 남편이나 아내가 핍박자가 되기도 하고, 불신 부모가 핍박자가 되기도 합니다.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볼 때 자기가 땀 흘려 일해서 돈을 벌어다 주었더니 밥상을 대할 때마다 자기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일용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도하니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또는 주일이 되면 가족이 함께 지내면 좋겠는데 교회 간다고 하니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더구나 힘들게 일해서 벌어다 주었더니 교회에다 헌금으로 바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인 가부장적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어서 남편이 아내나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통제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남편의 핍박을 당하는 여 성도님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남편은 믿는 아내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나를 사랑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윽박지릅니다. 다른 일로는 가정이 불화할 이유가 없는데, 신앙 때문에 자주 불화하니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불신 가족에게서 핍박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생명의 도를 알지 못하는 불신 가족이 핍박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사랑하는 사람을 기독교에 빼앗겼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의 핍박이 있다고 신앙생활을 그만 두면 안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구원 뿐 아니라 불신 가족의 구원도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신자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핍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직장에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셋째로, 유혹으로서의 시험이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우리의 믿음을 파선시키고, 죄를 짓게 만들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마귀가 주는 시험이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마귀는 악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시험하시지만, 마귀는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죄로 유혹합니다. 마귀는 에덴동산에서 인류의 어머니인 하와를 시험하여 범죄케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말씀하시기를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고 하셨으나, 마귀는 하와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감히 지음 받은 존재가 하나님이 될 수 있다고 거짓말로 꾀였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마음에 욕심을 품고 그 나무의 실과가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그 실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러자 그만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나자 양심에 가책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이 겁이 나서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마귀의 전략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마귀는 항상 성도들의 틈을 엿보며 하나님을 의심하도록 부추깁니다. 또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심어주었듯이, 우리에게도 교만한 생각을 갖게 만들려고 합니다. 일단 교만한 마음을 품게 하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 죄를 짓고 신앙의 길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 다음, 우리의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모든 시험을 마귀가 가져다준다고 하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시험의 대부분은 우리의 욕심이 그 원인입니다. 다시 말씀하면, 우리가 욕심을 품을 때 마귀가 틈타서 우리로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돈궤를 맡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제자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의 살림살이를 맡은 셈입니다. 유다는 돈을 만지다가 그만 욕심이 발동했습니다. 돈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유다의 마음은 돈에 대한 욕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마귀가 유다의 마음의 틈을 발견하고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에 보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유다는 마귀의 하수인이 되어 마귀의 생각을 제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행동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신자 중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성령 충만한 성도들 가운데는 자기의 땅이나 집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그 돈을 가지고 교회에서 필요한 경비로 쓰거나 가난한 형제들을 구제하는데 사용했습니다. 자연히 재산을 바친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형제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 때, 아나니아가 자기 아내 삽비라와 의논하고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나머지를 가져와서 ‘이것이 땅 판 값 전부’라고 하면서 사도들에게 바쳤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났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했습니다.

그로부터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 삽비라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들어왔습니다.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예, 이뿐입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삽비라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우리는 인간적인 욕심에 이끌려서 시험에 드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시험에는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하시는 시련으로서의 시험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당하는 핍박으로서의 시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과 우리의 욕심 때문에 받는 시험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시험을 이기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 가하시는 시련으로서의 시험은 믿음의 순종과 인내로써 이길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으나 철저한 순종을 통해서 그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그가 그토록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명령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어떻게 아들을 죽여서 번제를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이삭은 약속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큰 민족을 이루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들을 아직 장가도 가지 않고 후사도 얻지 못한 때에 제물로 바치라고 하시다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께서 이미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내가 이삭을 번제로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이삭을 다시 살리셔서 그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을 언급하려면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시는데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 2:8). 그런즉 우리는 철저한 순종을 배워서 행함으로 어떠한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능히 이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을 이기는 또 하나의 비결은 믿음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 욥은 이 일에 귀한 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욥기 1장에 의하면, 욥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을만한 악을 행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욥에게 무서운 시련이 들이닥쳤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과 열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나중에는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했습니다.

그래도 욥은 그로 인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는 아내에게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입술로 범죄치 아니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서 5장에는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로 핍박을 당할 때는 어떻게 이겨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로 핍박을 받을 때, 또한 주님을 섬기는 일로 핍박을 받을 때에는 주님께서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기쁨으로 핍박을 견뎌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에는 반드시 핍박이 있기 마련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에 보니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재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으로 인해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도들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자 복음이 힘있게 증거되어 믿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성전의 솔로몬 행각에는 매일같이 예수 믿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을 비롯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또 사도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우리가 예수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사도들은 말하기를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고 했습니다. 화가 난 저들은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석방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협박과 채찍질이 사도들을 주눅 들게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1절로 42절에 보니 “41)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42)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엇이 관대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을 생각할 때 핍박을 받으면서도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혹으로서의 시험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우리의 욕심이 원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마귀가 틈타도록 신앙생활을 게을리 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탐욕, 악의, 교만, 인간적인 자랑, 미움 따위를 내어버려야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도 베드로가 회개할 기회를 주었는데도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가 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것은 범죄하고도 회개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명하시기를 “이스라엘의 원수인 아말렉을 쳐서 그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으나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고 좋고 기름진 우양을 살려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오자 사울은 말하기를 “원컨대 당신은 여호와께 복을 받으소서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양의 소리와 내게 들리는 소의 소리는 어찜이니이까”

그러자 사울은 말하기를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울이 자기의 죄를 감추고 변명한 것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한 결과 사울 왕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다윗 왕은 어떻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 경외했는가는 150편의 시편 가운데 그가 지은 시가 절반이 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믿음 좋고 위대한 다윗 왕이지만 한 때 무서운 죄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충성스런 신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더불어 간음죄를 범한 것입니다. 더구나 다윗은 밧세바가 잉태했다는 말을 듣고는 우리아를 최일선에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살인죄를 더한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신앙인이 어쩌면 그토록 비열한 죄를 지을 수 있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나단 선지자가 찾아와서 죄를 지적하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 아니하고 즉시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기의 죄를 시인하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회개한 다윗을 귀히 여기셔서 용서하시고 다시금 은혜를 내려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시험을 당할 때 책임을 남에게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 때문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악으로 사람을 시험하시는 법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는 가장 무서운 죄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시험하다가 징벌을 받아 죽었습니다. 시험에 든 책임은 순전히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해 드린 대로, 시험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가하시는 시험이 있는가하면, 마귀가 가져다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에 당하는 시험도 있고 신앙을 지키느라 당하는 시험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시험이든 우리는 시험에 지지 말고 끝까지 이겨내야 합니다. 시험을 이길 때 우리는 정금같은 믿음의 소유자가 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게 됩니다. 영어에 "no cross no crown"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 고난 없이 영광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한 시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떠한 시험이 다가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시험이 다가오는 그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준비 여하에 따라서 시험에 드는 것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항상 깨어서 기도하여 시험에 들지 않도록 유의하시고, 혹 시험에 들었을지라도 아브라함과 욥과 다윗과 같은 선진들을 본받아 믿음의 순종과 인내와 회개로써 시험을 이겨내심으로 시험을 믿음의 성숙을 위한 기회로 선용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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