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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함받은 자와 택함받은 자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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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일전에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중국사람들의 결혼식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결혼식 자체가 하나의 축제요 또한 예술과 같았습니다. 결혼식 순서 중에 특별히 감명을 받은 것은 자녀들이 부모님에게 편지를 써서 읽는 순서였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들을 이렇게 성장시켜주고 키워주셔서 이렇게 좋은 신랑과 신부를 만나게 된 것은 부모님의 한없는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하고 눈물겨운 인사의 편지를 읽고 부모님의 무릎 앞에 머리를 숙이면 부모님은 자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아라고 덕담도 해 줍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그 넓은 예식장 홀에서 마음껏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식을 하는 장소가 다르고 음식을 먹는 장소가 다르고 폐백을 하는 장소가 다르지마는 거기서는 한 장소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무대와 같은 단상에 신랑과 신부, 그리고 양가(兩家)의 부모님이 서 있으면 식사를 하던 축하객들이 한 사람 씩 올라와서 선물을 주고, 축복하고, 신랑과 신부가 음료수를 딸아주면 먹고 한사람 한사람 축복의 말을 하고 내려갑니다.
축가(祝歌)를 맡은 사람들이 나와서 계속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결혼식이 진행되는데 결혼식 시간이 한 네 시간 정도 진행되는 것 같았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결혼식 시간이 아주 짧습니다. 물론 페백이나 피로연시간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짧습니다마는 우리 교회에서는 30분 정도 결혼식을 진행하는데 예식장에서 하는 사람들은 5분 안에 예식을 마치는 경우도 있더라고요. 결혼식을 말 그대로 해 치워버립니다.

그리고 한 시간 안에 예식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퇴장 할 때에 끝까지도 안보냅니다. 안내하는 사람이 중간에 신랑신부를 돌려서 시간 줄인다고 앞으로 안내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도 여유가 좀 있고하면 좀 성대한 결혼식, 정말 결혼식다운 결혼식, 기쁨의 결혼식을 준비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보면 시골에서는 하루종일 결혼식 피로연을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결혼식을 7일 동안 했습니다. 요즘도 서너시간 씩 하는 예식처럼 해가 져 가는 시간부터 결혼식을 시작해서 밤 늦게까지 즐겁고 흥겹게 결혼식을 진행하곤 합니다.

1. 신앙생활은 천국과 같이 기쁨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 천국은 마치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까?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혼인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니까 얼마나 호화롭고 얼마나 성대한 잔치였겠습니까? 혼인집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즐거움입니다. 풍성함이 있습니다. 웬만한 짜증나는 일들도 잘 넘어갈 수 있고 좀 더 달라면 한 그릇 더 주는 여유가 있는 곳이 잔치집의 인심입니다.
천국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누가복음 17장 21절에 보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 너희 마음 속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이 천국이요, 우리의 교회가 천국이요, 우리의 가정이 천국이요, 우리 마음 속에 천국같은 기쁨과 즐거움과 풍성함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 가운데서는 이런 즐거움과 기쁨을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죄를 한 몸에 다 걺어진 것같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지고 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근엄하고 굳은 얼굴 모습이 마치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웃고 즐거워하는 것은 천박하고 경거망동한 짓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예 예수 믿으면 뭣도 하지말라, 뭣도 하지 말라해서 재미없이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믿자고 하면 ‘나는 죽기 1년 전에 예수 믿겠다. 예수 믿기 전에 세상의 즐거운 일 다 해보고, 하고 싶은 일 다 해보고 죽기 1년 전에 예수믿고 구원받아서 천국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머릿 속에는 예수 믿는 것은 곧 ‘재미없는 생활’이라고 입력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잔치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결혼잔치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창세기 첫장을 들추면 거기에 아담과 하와가 부부가 되는 이야기가 나오고 2장에는 어떻게 해서 부부가 되어졌는지 그 결혼이야기가 죽 설명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2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신랑신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례자가 되십니다. 첫번째 주례사가 거기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자연만물이 다 하객(賀客)들이 되어서 축하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신부되는 성도들의 결혼식이 나오는데 20장에도, 21장에도 계속해서 신랑신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첫장부터 계시록 마지막까지 신랑신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은 남편이 되고 이스라엘은 신부가 되어서 아름다운 결혼생활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신랑이 되고 우리 성도들은 신부가 되어서 아직 결혼식은 안했지만 약혼한 사이라서 앞으로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혼인잔치에 들어갈 신부가 될 준비를 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시니 신랑이 사모(紗帽)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같이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즐거움을 입혀주시고 어떻게 우리에게 기쁨을 입혀주시는가하면 마치 신랑과 신부가 결혼에 예복을 입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단장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62장 5절에 보면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같이 내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가, 마치 청년이 처녀를, 신랑이 신부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좋아하고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신부로 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처음 이적을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로 만드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할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예수님이 포도주 떨어진 집집마다 찾아 다니면서 그런 일을 하셨겠습니까? 왜 하고 많은 일 가운데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일을 하셨겠습니까? 설교나 이야기하는 중에 제일 첫마디가 그 전체를 끌어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첫 번째 이적을 혼인잔치에 포도주 만드는 사건으로 하셨을까.

이사야 25장 6절에 보면 그 이유가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며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백성의 수치를 제하시리라>.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오래 저장했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다른 집에는 처음에는 좋은 포도주를 내다가 마지막에는 좋지 못한 포도주를 내는데 이 집에는 왜 갈수록 좋은 포도주가 생기는가?”라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또 이사야 25장에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 더 좋은 포도주를 낼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내가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 낸다, 그러니까 내가 바로 메시야다>는 말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5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물론 5천 명을 먹이신 이유는 거기있는 배고픈 사람들을 먹이기 위한 것도 있지만 이사야 25장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했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풀겠다>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그 5천 명을 오병이어(五餠二魚)로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 광야에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내가 바로 구약시대에 예언해 놓은 그 잔치를 여기서 베푼다, 내가 메시야다>하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술먹은 사람들 얼마나 기분좋아 하던가요.  술먹고 나면 내성적인 사람이 말을 술술 하고요, 노래 안부르던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인색한 사람이 지갑을 열어서 막 쓰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성령의 새 술에 취하면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예수 제대로 믿는 사람은 마음 속에 술취한 사람보다 훨씬 더한 기쁨과 감격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을 영원히 제한다>고 했는데 병들어서 죽게 된 사람, 혹은 사형집행될 사람에게 ‘영원히 산다’고 했을 때 얼마나 기쁘겠어요? <눈물을 씻긴다>고 했는데 눈물흘리는 사람에게 ‘눈물흘릴 원인을 제거해 주었다’는 말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것보다도 더한 기쁨을 주님께서는 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신앙생활하는 그 자체가 잔치집의 기쁨과 즐거움과 풍성함을 누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리문답(要理問答)이라고 하는 성경을 잘 요약해 놓은 107가지의 문답책이 있습니다. 1600년도에 영국에서 100명이 넘는 목사님과 장로님과 신학자들이 모여서 요리문답을 만들었습니다. 성경의 전체를 요약한 질문과 대답인데  그 첫 번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위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아래로 우리들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돈 벌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병들었다가 건강해져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출세해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 기쁘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 자체가 그렇게 말하고 신학자들도 그렇게 뽑아내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도 즐겁게 살아가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즐겁게 살아야만 엔돌핀이 나와서 건강하게 산다고 하여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많은 노력을 합니다. 그래서 웃기 싫어도 좀 웃자고 하여  웃는 날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월요일에는 어떻게 웃습니까? 원래 웃고, 화요일에는 어떻게 웃고요? 화사하게 웃고, 수요일에는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에는 목청껏 웃고, 금요일에는 금새 웃고 또 웃고, 토요일에는 토실토실 웃고...그렇게 해서라도 웃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우리 건강에도 좋고 우리의 삶이 풍성해지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는 어떻게 웃는다고요? 원래 웃고, 화요일에는 화사하게 웃고, 수요일에는 수수하게 웃고, 목요일에는 목청껏 웃고, 금요일에는 금새 웃고 또 웃고, 토요일에는 토실토실 웃고, 하여튼 세상사람들도 웃는 곳에 얼마나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도 웃으라고 하시고, 세상사람들도 웃는 것을  이렇게 좋아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은 기쁨에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보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으로 충만케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는데 왜 주셨느냐하면 우리가 예수님 속에 있는 그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말씀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 마음 속에 기쁨이 막 넘쳐야 될 것입니다.
이사야서 6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슬픈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신을 대신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쁨의 모자를 쓰고 희락의 기름을 바르고 찬송의 옷을 갈아입고 그렇게 살아가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에 보면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편 97편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시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고 했습니다. 의인들이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의인인데 그들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뿌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말 죄사함 받아서 의롭게 된 사람의 마음 속에는 진정한 기쁨이 넘치도록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기쁘지 않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쁨을 뿌리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사람은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넘치도록 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기쁨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쁨을 뿌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면 예수 잘 못믿는 사람인줄 알고 이제 정말 구원의 감격, 구원의 잔을 들고 하나님을 늘 기뻐하는 이런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노래하고 기뻐하며 발랄하게 생활하는 것을 부모님들이 다 원하지 않습니까? 마치 싱싱한 나무처럼 자라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녀가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눈치나 보고, 말도 잘 못하는 자폐증이 있다면 그 자녀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교회에서는 발랄하게 노래하고 찬송하고 춤추는 사람은 날라리같고 자폐증 환자와 같이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은 아주 경건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그 생각을 좀 바꾸어서 찬송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주님 주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기쁨은 처음에는 좀 좋은 것 같은데 나중에는 그 기쁨이 슬픔으로, 짜증으로, 불평으로, 분쟁으로 변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집사님이 계시는데 떠나시기 전에 심방을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신앙생활 하기가 참 힘든 분이었습니다. 대대로 유교집안이었고 장자(長子)였습니다. 그분이 예수 믿기 전에 19대 전의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19대 전의 할아버지니까 그 사이에 제사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런데 자녀 중에 명문대학을 나온 귀한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이 미국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유학 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마쳐갈 즈음에 미국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대우하는 취직자리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마 한국으로 나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놀래서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요즘같으면 구역예배 드리는 것 같은 데에 함께 가자고 초대를 받아 가 보았습니다.

가 보니까 참석한 사람들이 음식 한 가지씩을 준비해서 왔습니다. 초대한 집에도 음식을 별로 많이는 안했어요.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음식을 나누어 먹고, 돌아갈 때도 얼마나 깨끗하게 가는지 참 분위기 좋다고 생각했는데, 안 믿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 보니까 술을 먹는데 너 한잔 마셔라 너도 한잔 마셔라, 네 것이 내 것이고, 내 것이 네 것이고 그렇게 어울리다가 마지막에 갈 때에는 꼭 싸우고, 다투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그 대조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면서 예수믿는 것이 참 좋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아들이 제안을 합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예수님 믿겠다고 하면 제가 미국에서 파격적으로 대우하는 이 직장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아버지가 안 믿겠다고 하면 여기에 있겠습니다. ” 그러니까 아버지가 “좋다, 나도 믿겠다.”하고 단번에 마치 두부를 자르듯이 결심하고 믿어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잘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아들은 지금도 우리교회에 집사님으로 또, 동아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세상기쁨은 처음에는 좋은 것 같으나 나중에는 슬픔으로 변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기쁨은 날이 갈수록 더 큰 기쁨으로, 더 큰 즐거움으로, 더 큰 만족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미, 재미해도 신앙생활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에 비하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새 발의 피’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성령충만히 받고 난 다음에 주시는 그 기쁨은 말로 표현이 안됩니다. 어제 보았던 그 나무가 흔들리는 그 모습이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어제 내 뺨을 스치던 그 바람의 느낌도 전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렇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이 성령 안서 기뻐하는 기쁨인데 이런 기쁨을 주 안에서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기쁨을 체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기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기쁨을 함께 누리자

오늘 본문의 주제가 <이런 기쁨을 함께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종들을 보내서 언제 언제 우리 집 아들이 결혼을 하니까 오셔서 함께 즐깁시다하고 연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청했던 사람을 내일이니까 오세요하고 재차 초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종들을 보내서 좋은 음식이 잘 준비되었으니까 오찬이나 하십시다하고 보냈는데, 어떤 사람은 돌아보지도 아니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그 종들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왕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다 죽여버리고 동네를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종들을 다시 보내서 사거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는대로 오도록 했습니다. 이 말씀의 요지(要旨)는 뭡니까? 이 기쁨을 함께 누리자,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리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은 사람들을 네 차례나 오라고 했습니다. 왕의 아들의 잔치가 있으니 오세요, 다 준비되었으니까 오세요하고 종들을 재차 보냈습니다. 오지 않으니까 다른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오라고 했습니다. 이런 임금님의 성의있는 초청 때문에 잔치집에 손님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 장소에도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참으로 끈질긴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기 때문에, 종들을 보내고 또 보내고 보내서 우리를 오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앉아있지,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 올려면 오고 말려면 말아라고 했다면 여기에 몇 사람이나 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중에는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의 애를 많이 먹인 사람도 있을 거예요. 보내놓으면 안에 있으면서도 없다고하라는 사람도 있고, 소금뿌리는 사람도 있고, 물 뿌리는 사람도 있고, 문을 닫아서 손을 다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들이 다 있을 거예요.그래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올 때까지 보냈기 때문에 오늘 여기 내발로 찾아올 수 있지, 안그랬으면 참 속썩인 일이 많은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렇게해서라도 오늘 여기까지 왔으니 여기서 머물지 말고 잔치자리의 맛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받은 이 구원의 잔의 맛을 보아야만 택함까지 받을 수 있는데 그저 교회 왔다갔다고만 하지 말고 이 놀라운 기쁨을 맛보아 택함받은 사람까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맛까지 보아서 하나님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오늘 본문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왕이 오라고 했는데 안 온 사람들을 어떻게 했습니까? 진멸해 버리고 불 태워 버렸습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한 것은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죄는 윤리적인 죄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들이 살인했다든지, 간음을 했다든지, 남의 물건을  훔쳤다든지 하는 이런 율법적인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죄는 은혜에 대한 반역이요, 사랑에 대한 거절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처럼 큰 죄가 된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파사의 아하수에로 왕이 왕이 된지 3년에 모든 방백과 신복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푸는데 얼마나 베풀었느냐, 180일 동안 주야로 베풀었습니다.
왜 이렇게 왕이 잔치를 베풀었는가하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부요한 나라다, 이렇게 영화스럽다, 내가 이렇게 위엄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하여서 180일 동안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또 왕이 거기에 만족하지 아니하고 수산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위하여서 수산궁 후원 뜰에서 잔치를 7일동안 베풀었습니다.

대리석 기둥기둥에다가 휘황찬란한 실들로, 요즘 말하면 만국기같은 것을 달아서 휘황찬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각기 색이 다른 대리석이 바닥에 좍 깔려 있었습니다. 거기는 의자가 금의자, 은의자였습니다. 지금도 왕궁같은데를 가보면 금의자가 있는 곳이 있는데 그런 것들은 다 도금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수산궁에는 진짜 금과 은으로 의자를 만들었는데 수산궁에 있는 사람들이 다 와서 앉을만한 자리였습니다.

또한 금잔(金盞)이었습니다. 어주를 받는데 전부 잔이 금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하수에로 왕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7일째 쯤 되었을 때 자기 아내, 왕후를 데리고 나와서 면류관을 씌워주고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 왕후 와스디는 나오라.”고 했는데 왕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마음에 진노가 불붙는 것 같아서 바로 그 장소에서 왕후를 폐위시켜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 간택된 왕비가 에스더 아닙니까?     

왕의 호의를 무시한 것이 이렇게 큰 죄라는 것입니다. 와스디가 간음을 한 것이 아닙니다. 딴 짓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 이게 그와같은 큰 죄였습니다. 왕후니까 그 정도로 끝났지 일반백성이었다면 아마 죽여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왕의 호의를 거절한 것이 죽음과 직결됩니다.

옛날 에스키모인들은 북극에서 얼음집을 짓고 살지 않았습니까? 북극을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들어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음에 들면 그 에스키모인들은 잘 때 누구를 주는지 아십니까? 자기 아내를 준다고요, 자기 아내를 빌려주면서 추우니까 안고 자라고 합니다.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이 와서 그럴 수 없다고 하면 나의 호의를 거절하는 자는 나의 원수라고하고 죽여버렸다고요. 그래서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는지 모릅니다. 아프리카 같은데의 추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제일 좋은 아내, 최근에 얻은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데 그것을 만약 거절하면 그것도 죽입니다. 하나님의 초청과 호의를 거절하는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죽음인데 만왕의 왕되시는 이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호의와 초청을 거절하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잔치의 맛을 봅시다

오늘 본문의 왕은 아들의 잔치를 위해서 소집아, 양 잡아서 모든 것을 다 갖추었으니 오소서 했는데 하나님은 양잡아서, 소잡아서가 아니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못박아 죽게 하시고 그 피로 인하여서 모든구원의 잔치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다 준비되었다 여기와서 구원의 잔을 먹고 마시자, 기쁨의 잔치를 하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초대하셨는데 이런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런 자들을 진멸해 버리고 불에 태워버렸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자를 지옥의 영원한 형벌로 다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호의를 여러분들은 절대 무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호의에 와서 그저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의 잔치, 구원의 잔>을 들고 구원의 기쁨을 누려야만 그 사람이 진짜 택함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잔치집은 기뻐야 합니다. 천국생활은 기쁨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잔치에 참여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이 기쁨을 함께 누리자하고 우리를 초청했는데 그 호의를 거절하는 우리가 되지 않도록, 그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최고의 죄임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입니다. 이 초대에 여러분들은 왔으니까 그저 왔다갔다 하지말고 이 구원의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잔을 들고서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하고 이 진정한 구원을 뼈속까지 사무치는 기쁨을 여러분들이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누리는 이 기쁨은 맛보기입니다. 백화점이나 큰 마트에 가보면 맛보기 음식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배부르지는 않아요. 여기서 맛보는 기쁨도 대단한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은 상상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런 기쁨을 맛보기로 누리다가 주님께서 오라고 하는 날 천국에서 영원한 참된 기쁨을 다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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