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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感謝)와 의뢰(依賴) (시 9: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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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덱재 목사 (빛과소금의교회)

시편을 설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정서를 touch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1편부터 안하고 9편부터 하는 것은 3년 전에 1편에서부터 8편까지는 우리 교회에서 강해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까지 있는데, 이번에 150편까지 다 하는 것이 아니고 16편까지만 보겠습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부터 동그라미 그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계획 세우는 것, 많이 해 보셨지요? 많이 계획 세워도 제대로 못 지키는 것 많이 경험해 보셨지요? 솔직히 제대로 지켜 본 적이 한번도 없으시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좋은 계획을 알차게 세워놓음에도 불구하고 왜 안 지켜집니까?

그 중의 중요한 한 이유는, 계획을 세울 때에, 사람이 자신의 정서, 감정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성과 의지만으로 움직여지는 존재가 아닌데 계획을 세울 때에 이 정서적인 면을 고려를 안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거든요.

그래서 인간이 이성과 의지로만 움직여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솔로몬을 지혜의 왕이라고 합니다. 솔로몬 스스로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잘 살아가는 데 뭐니뭐니해도 머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혜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구하는 그의 마음의 소원에 응답하여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구나 사람들에게 어떻게 알려졌습니까?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고 지혜의 응답을 받은 바로 그 다음,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왕상3장16절> 이렇게 시작합니다.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때에"라고 접속사를 붙은 것은 앞의 내용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창기가 죽은 아이와 산 아이를 두고 서로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싸우고 우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고고학자들이 한 10여년전에 최근에 이 두 여인의 이름을 발견했다고 하지요?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하나의 이름은 아반테이고 또 하나의 이름은 아벨라 랍니다. "아, 반 떼!"하고 "아, 벨라~"  농담이구요.

솔로몬이 이 두 여인의 분쟁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아를 반절 떼라고 하니까 한 여인은 그래요 아 반 떼요, 하고 또 한 여인은 에궁, 아 벨라 하지요.

둘 중의 한 여인은 분명히 자기 잔머리와 고집으로 거짓을 행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밝혀냅니까? 논리로 따져서 밝혀내지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 정서를 자극합니다.

이 판결이 솔로몬을 지혜의 왕으로 유명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은, 솔로몬이 인간사를 생각할 때, 인간의 정서, 감정을 고려했다는 것입니다. 지혜는 인간이 감정적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험난한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하여, 행복하고 떳떳하게 살기 위하여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측면이 감정, 정서적인 측면입니다. 잘 살기 위해서는 정서를 중요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동양의 사람들, 더욱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반도 기질의 한국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정서를 잘 다스리는 것이 삶이 망가지지 않고 아름답게 사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시험공부, 하고자 했던 일, 큐티와 같은 경건 훈련.. 잘 시작했다가 어디서부터 망가집니까? 막 스트레스가 밀려오는데, "에라, 모르겠다!!" 하고 마음 안에서 정서적으로 포기하는 것에서부터 망가지지요? 마음의 정서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정서를 잘 다스리면 망가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정서를 잘 다스린다고 표현하였는데, 정서를 잘 다스린다는 것이 기계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피도 눈물도 없는 무정한 공산주의자가 된다거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성과 의지로 정서를 묵살하는 것은 인간성을 황폐케 합니다.

정서를 잘 다스린다는 것은 정서를 죽이거나 억누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풍성하게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잘 control, 운전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정서가 메마른 마음은 행복을 모릅니다. 정서가 control이 안되고 마음이 변덕스런 감정에 종속된 인생, 그 삶은 대단히 고통스럽습니다.

인간의 행복 조건이 정서가 성숙하는 것, 풍성해지며 잘 다스려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정서,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습니까?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하는데 있어서 이성적인 영역, 감정적인 영역 둘 다 성숙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영역이라는 것은 가치관, 세계관, 생각하는 틀(framework)이 바로 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정서적인 영역에서의 성숙이라는 것은 느끼는 반응이 바로 잡히는 것을 말합니다. 똑같은 말을 듣고도 삐닥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왕왕 있지요? 그가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서적 반응 틀(mechanism)이 안에서 굽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예) 왜 여러분, 이런 우스개소리 들어보셨습니까?

  마요네즈 뚜껑을 끼웠지...

틀의 모양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어떤 자극이 들어가든 그 틀의 모양새로 나옵니다. 환경적 자극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틀이 문제입니다.

이성이든 정서이든 틀(framework) 모양이 어떠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 틀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어떤 외부적 자극이 나에게 입력이 되어도 아름다운 반응을 나타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성이든 정서이든 내면의 틀을 아름답게 만드는 관건은 단연 영적인 영역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내가 생각하는 framework, 느끼는 mechanism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내 안에 정서의 mechanism을 아름다운 틀로 새롭게 하기 위하여, 시편을 묵상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방법입니다. 가히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난 뚜껑이 잘 열려... 근심과 염려에 곧잘 눌리는 사람들, 의심과 두려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시편 약을 좀 드십시오. 조용한 시간에 하루에 3편씩 묵상해 보십시오.

시편의 많은 부분은 다윗이 기록한 것입니다. 저희가 보고자 하는 9편에서 16편까지는 모두가 다윗이 기록한 부분입니다.

사실 다윗만큼 정서적 자극이 날카롭고 맹렬하고 기가 막히게 많이 경험한 사람도 드물지요? 요새 같으면 '이것이 인생이다' 프로그램에 충분히 나올만 하지요?

그렇게 억울한 일 많이 보고 원통한 일 많이 당하고 기가 막힌 일 많이 겪고 했던 다윗이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신앙, 아름다운 삶을 드릴 수 있었을까?

"나를 모욕하는 자가 원수였다면 차라리 견디기 쉬웠을 것을, 나를 업신여기는 자가 적이었다면 그를 비키기라도 했을 것을. 그러나 그것은 내 동료, 내 친구, 서로 가까이 지내던 벗, 성전에서 정답게 어울리던 네가 아니냐. 홀연히들 사라져 버려라."<시55:12-14> 배신,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치사한 꼴 많이 봐야 하고 가슴 놀래게 하는 일 많이 겪고 "사망과 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고 고백하듯이 죽을 고비 많이 넘기고 했던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능력을 그렇게 멋있게 누릴 수 있었을까?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서적 틀, 가치관의 틀을 아름답게, 바르게 지켜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세상이 주는 온갖 자극들에 의하여 굴곡되고 비뚤어지지 않고 아름답고 강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세상이 주는 괴로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비밀의 열쇠가 이 다윗의 시편들에 담겨 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우리에게도 기꺼이, 넉넉히 베풀어 주십니다. 다윗의 삶, 다윗의 마음에서, 세상과 마귀가 가져다준 에이도록 차가운 자극들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믿음과 사랑으로 승화시킨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도 베풀어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 은혜의 비밀을, 치유의 능력을 저희가 이 시편 안에서 캐고자 합니다.

시9,10편은 히브리 성경에는 원래 한 편입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 삼행시, 오행시 하듯이 히브리 시가서에 보면 히브리 알파벳을 따라 그 글자에서부터 시작하여 한 절씩 시를 지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성경 안에서 대표적인 예가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우리 말 같으면 이런 식이지요?

가 - 가시나가 와 이라노?

나 - 나가 미치고 환장하겠는기라

다 - 다 말해뿌라

라 - 라 라랄 라라랄라

마 - 마, 노래 치우고 빨리 말하라카이..

바 - 바보 문드이 자슥 아이가?

사 - 사람이 우짜 꼭 말로 해야 아남?

아 - 아이고, 속터져 죽겠다...
..

그런데 이 히브리어 성경 시9,10편에는 좀 특이한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의 영장이라는 말은 노래 인도자, 앞에서 노래를 선창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뭇랍벤은 히브리 단어 그대로 음표기한 것이고, 영어 성경에 보면, To the tune of The Death of the Son.. 아들의 죽음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자기 아들의 죽음에 맞춘 노래라고 하면, 내용이 잘 안 어울리지요? 아들이 죽었는데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이상하지요.

시편은 시이고 노래이기 때문에 1절에서 몇 절까지는 뭐고, 이런 구분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노래하고 고백하는 다윗의 마음의 정서적 칼라가 어떤 색깔이 나타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시 9,10편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물러가게 하셔서 승리케 하신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정의의 통치가 나타나 자신의 처지에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라는 탄원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감사와 찬송이 이 시를 노래하는 동기라고 보면, 아들의 죽음은 원수의 아들의 죽음이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웬수의 아들이 죽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하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을 죽이러 쫓아오는 원수가 아들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물러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의 아들의 죽음이 기쁜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 상상도 못했던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해 주시고 위경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어찌 감사하지 않겠으며 어찌 찬송하지 않겠습니까?

그 감사와 찬송의 내용들이 이런 것입니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2,3절> "여호와께서 영영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예비하셨도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7절> "열방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그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알게하사 심판을 행하셨음이여 악인은 그 손으로 행한 일에 스스로 얽혔도다"<16절>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를 노래한 대표적 노래가 "아리랑" 이지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꼬부라진 심성이 잘 배어 있습니다. "나를 버리고 가신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내 맘 아프게 하고 떠난 사람들은 십리도 못가서 교통사고나 나라.. 뭐 이런 심보지요..

참 못된 민족이다 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것입니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 붙잡을 힘이 없는.. 약한 자의 한이 밴 노래입니다. 이렇게라도 노래해야 한이 달래지고 풀려져서 미치지 않고 살겠다 이런 것입니다.

내가 힘이 있는데, 누가 대든다? 가만히 놔 두지 않지요? "어, 9.11 테러를 해? 니들 내가 가만 놔두지 않는다.." 해서 미국이 아프간, 이라크 마구 때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힘이 없으니, 미치겠지요..

뭐도 하고 뭐도 사야하는데 돈이 없으니 한 마디 내뱉어야지요. "사람나고 돈낫지, 돈나고 사람낫냐..에이.. 그 다음 쌍시옷받침 나오는 것은 생략." 그래야 속이라도 풀리지요?

그런데 그렇게 나를 못살게 굴고, 힘들게 하고, 미치게 만들고, 죽이려고 하는 교활하고 오만하고 힘쎈 놈을 나는 어떻게 해 볼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봐 주셨다? 그러면 얼마나 신납니까?

예) 2002년 월드컵 때 우리 나라 사람들이 16강전에서 이탈리아를 이긴 것을 제일 통쾌해 합니다. 축구인들은 더 그렇습니다.

이탈리아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한국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6강전에서 약한 팀을 만나서 행운입니다. 2진을 내보내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몇 골 차이로 이길 수 있을 것같습니까? "이기는데 한 골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오만을 떠는 사람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면 신나지요? 십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가지요.

<10:2-4> 보십시오. 예수님 잘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데, 돈많다고 힘쎄다고 으스대는 사람에게 "너 돈 있냐?", "너 가방끈 짧지?" 확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그래서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목욕을 당하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탄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세상에서 이런 사람 만나면 기죽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꼬지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원통한 사정을 아뢰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스려주시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어떻게 다스려 주십니까? 이 시편의 맨 끝을 보십시오. <10:17-18>

그의 마음에서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래서는 안됩니다.. 마구 탄원하였는데 끝은 어떻습니까?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그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고아와 압박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로 다시는 위협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그의 마음에 확신이 차서 선포합니다.

마음의 정서, 감정이 하나님의 평안으로 다스림을 받은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평안으로 다스림을 받으면, 그 다음에는 반응이 다릅니다.

아파트촌에 사는 어느 부인이 우아하게 "난 이대 나왔는데요.. 실례지만 댁은 대학 어디 나오셨어요? " 묻습니다. 열등의식이 많은 사람들이 비교하기를 잘 합니다. 그러자 이 자매, "아, 그러세요, 이대 나오셨어요, 저는 저대 나왔거든요."

자유해졌지요? 치유해졌지요?

요새 우리 교인들, "어, 성경이 읽어지네" 책 도움을 받아서 성경 많이 읽고 계시지요? 그 가운데, 성경을 꿰뚫는 안경이라고 해서 성경 스토리 나아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 스토리를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이 나옵니다.

관점 1 : 성경은 누가 왕이냐를 다룬 왕 싸움 이야기이다

관점 2 : 셋 계열은 가인 계열과 섞이면 안된다, 정복해야 한다

시편의 다윗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하여, 이 구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누가 왕이냐를 다투는 왕권 쟁탈전,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이 영적 전쟁의 구도로 볼 때, 사람은 세상의 세력보다, 사단보다 약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 사단에게 밀리고 쫓기고 하는 것같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역전 드라마를 펼치십니다.

예수님도 사단의 하수인들인 유대인들에게 밀리고 밀려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셨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부활하셔서 역전 드라마를 펼쳐 놓으셨습니다.

이 역전 드라마를 경험하는 순간, 얼마나 신바람나고 통쾌합니까?

이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당신이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고 정직으로 판단을 내리십니다<8절>.

교인들이 야무지게 착각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으로 행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행하면서 하나님은 내 편이겠니 생각하는 것이고 무조건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 링컨의 남북전쟁 예화 -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룰 때에, 처음에는 북군이 많이 밀렸습니다. 패전의 위기감마저 들 때에 링컨의 한 참모가 참모회의에서 제안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그 말을 들은 링컨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달라고 매달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생각을 정의라고 우기는 것이 아니라, 정의에 내 생각을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이 내 경험을 해석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처럼, 이 기가 막히도록 신나는 하나님의 승리의 체험을 위하여, 당신도 하나님 편에 서기를 힘쓰십시오.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온전히 따르십시오. 내 편에 예수님께서 서 주시기를 고집하지 말고 예수님 편에 서십시오.

하나님, 내 소원 좀 들어 주십시오만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소원에 응답해 보십시오.

당신은 하나님 편에 서셨습니까? 왕권 쟁탈전이 치열한 영적 전투의 현실에서 당신의 마음 중심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셨습니까? 당신의 취미생활, 직장, 가정에서 당신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 승리케 하시는 능력을 경험키 위하여 당신이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제일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편에 잘 설 수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10절>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주의 이름을 아는 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자가 주를 의지하고 주님 편에 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관건이 하나님께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지요? 자신이 관심을 기울이는 영역만 잘 보이고 알 수 있습니다.

예) 예배당 찾으로 다닐 때... 한의원 찾을 다닐 때... 안경점 찾으로 다닐 때...

여러분, 주일 예배당에 올 때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나님께 관심이 있으면 듣는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데 중요한 관건이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여러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신 후 가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무슨 뜻입니까? "마음이 닫힌 사람들에게는 내가 아무리 많이 깨우쳐 주어도 안 들린다.  내 말을 듣고자 마음이 열린 사람이 들을 수 있다,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백성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체적 삶의 윤리, 지침으로 주우진 책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에 이런 표현 많이 나오는 것 관찰하셨을 것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으라!!" 듣고자 하는 마음이 관건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관건이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관심을 기울여 들으십시오. 성경에 깨우쳐 주는 바,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흘러 떠내려 보내지 마시고 건성으로 지내치지 마시고 들으십시오.

들을 수 있기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을 알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기도하십시오. 큐티는 듣는 연습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연습입니다.

들을 수 있을 때,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하나님이 연약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며, 하나님께서 인자와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왕이심을,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잘 서기 위하여 주를 찾으십시오.

사람을 찾지 말고 사람을 넘어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으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5-8>

기도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이 기도를 보십시오.

<9:13>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10:12>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10:15> "악인의 팔을 꺽으소서" 얼마나 애절히 하나님을 찾습니까?

<9:19,20> "여호와여 일어나사 인생으로 승리를 얻지 못하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목전에 심판을 받게 하소서 여호와여 저희로 두렵게 하시며 열방으로 자기는 인생뿐인 줄 알게 하소서" 사람의 꾀가 하나님의 뜻을 이기지 못하도록, 하나님을 뜻을 거스리지 못하도록, 인생들이 하나님인 척 하지 않고 인생임을 주제파악하여 알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도록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의 통치를 구합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오늘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아니, 당신은 기도하십니까? 기도는 안하고 사람들에 대한 의존과 원망만 있다면, 돌이키십시오.

당신도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구하는 심령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편에 서는 그 심령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승리의 능력을 베푸십니다. 은혜의 감격에 푸욱 빠지게 하십니다. 정서적 안정감과 강건함이 무엇인지 맛보며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케 합니다.

우리도 승리의 감격을 누리고 싶습니다. 우리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신바람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노래하고 싶습니다.

그 감격스런 구원의 날, 영광의 날을 위하여 오늘 힘있게 하나님을 의뢰합시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며 하나님 편에 서기를 힘써서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누려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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