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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식농사②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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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이용호 목사

  요즘 아이들이 영리하고 또 어른들이 생각 못하는 사고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 것을 표현하는 유모어가 하나 있는데 아이가 엄마보고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 아이스크림 좀 사줘.” “그건 해로워. 많이 먹으면 안 좋아. 오늘은 안 먹는 게 좋아.” 하고 안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그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것입니다. 엄마가 안 사주니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엄마, 하나님은 어디든 계셔?” “그럼, 하나님은 어디든 계시지.” “사람 뱃속에도 계셔?” “그럼 계시지.” “엄마, 하나님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데.” 엄마가 아무리 안 사주려고 꾀를 부려도 애들은 그 정도로 영리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과 틀린 것

  우리가 아이들을 볼 때 제일 먼저 어른 시각에 다가오는 게 애들은 어른보다 유치하다는 것입니다. 판단력이나 생각하는 게 단순하고 유치합니다. 유치하다는 것은 어른과 아이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다르다고 하는 그것은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아이와 어른이 같은 게 오히려 문제일 수 있습니다. 어른의 생각에 못 미치고, 어른의 기대에 못 미치고, 어른의 행동에 못 미치는 아이들의 미숙함을 보고 우리가 절망할 때가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different’와 ‘wrong'은 다릅니다. 다르다고 하는 것 때문에 희망이 없고 애들은 안 되겠다가 아닙니다. 우리 애들이 비록 미숙하고 어른의 생각에 못 미치지만 틀린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이들이 미숙한 그것은 얼마든지 성숙해 갈 수 있고, 얼마든지 우리에게 희망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육현장에서 우려하는 것은 이것을 위해서 이것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얻고 저것도 얻는 게 필요한데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버려도 좋다는 이런 방법론이 오늘 우리 입시제도에도 있고 교육에도 있습니다. 하나의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결과를 얻기 위해서 취하는 태도인데 성경에는 이것을 배격합니다.
  예수님의 교훈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와서 “우리는 십일조합니다, 금식합니다” 하는 자랑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된다, 즉 십일조도 하고 금식기도도 하고 의와 인애도 행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 형식도 가지고 의미도 가지라, 틀도 가지고 내용도 가지라는 것을 가지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언제나 원칙은 지키면서 이해해줄 건 이해해주는 이런 교육의 한계가 필요합니다. 원칙을 양보하든지, 원칙을 타협해 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해는 해주어도 원칙에는 엄격한 것, 기를 살려 주면서도 무례한 것은 책망하고, 게으른 것은 엄중히 경고해 주어 고쳐주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방법과 과정을 무시한 결과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자녀들을 키우는데도 결과주의로 자꾸만 흘러갑니다.

  부모의 도덕성

  현대의 위기는 아이들에게 있지 않습니다. 교사와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교사와 부모는 권위와 존경을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핵심요건으로 다가오는 게 바로 이 문제입니다. 만약에 교사가 권위와 존경을 잃어버리면 교육은 끝난 것입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지속이 될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권위와 존경을 잃어버렸다면 그것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천하게 여기기 쉬운 핵심요건이 교사로서의, 부모로서의 권위와 존경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오늘 설교를 통해서 몇 가지를 논해 보고자 합니다.

  교사와 부모의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우리 학생들이나 우리 자녀 세대들이 볼 때 위의 세대가 가지는 그 권위와 존경은 어디에서 오느냐? 몇 가지 접근을 해보면, 첫째는 깨끗한 도덕성에서 옵니다. 지금 우리가 어느 분야든 보면, 도덕성에 있어서 점수가 안 매겨집니다. 정치가들, 기업가들, 혹은 교육계, 종교계 등 모든 면에서 도덕성에 점수가 잘 안 나옵니다. 지금 비극중의 비극은 교회 지도자인 목사님에게까지 도덕성이라는 점수가 만족하게 평가를 못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목사님보다도, 신부나 승려들이 더 존경스럽다는 서열이 나옵니다. 목사님의 존경도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가지려고 할 때 기독교가 1위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3위로 떨어져 있습니다. 불교보다 천주교보다 떨어져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달라, 무엇을 해주라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제발 교회다워라, 목사는 목사다워라 그 정도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우리한테 제발 교회가 우리 사회에 누가 되지 말라,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 앞에 부덕한 짓을 하지 말라는 그 정도입니다. 가장 기본적으로 이 도덕성에 점수를 못 받고 있는 이것은 오늘 우리의 권위와 존경심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도덕성이라고 하는 여기에는 그냥 하나의 선행개념이나 어떤 덕망의 차원이 아닙니다. 도덕성은 관계성과 연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도덕성이 무너지면 관계성이 다 무너집니다. 얼마 전에 우리가 총선을 치렀지만 기존정당이 무슨 실력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도덕성 문제입니다. 이 도덕성에서 평가를 못 받으면 다른 것도 다 무너집니다.

  어느 가정에 이런 실화가 있습니다. 남편이 7년 동안 불륜을 숨기고 살았습니다. 6살 난 딸이 있습니다. 그런데 탄로가 났습니다. 이 부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도 없고, 남편은 와서 용서를 빌지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성도가 목사님께 와서 상담을 했습니다. ‘내 남편에게 이런 문제가 있는데 용서를 빌지만 용서를 해주어야 된다고 느끼는데 용서가 안 된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이렇게 권면을 해 주었습니다.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기도해 보십시오. 집사님 힘으로는 용서를 못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야 용서가 안 되겠습니까? 내가 볼 때도 남편을 용서해 주고 서로가 사는 방향으로 정리를 해야지, 극단적으로 가정을 깰 수가 없지 않습니까?”라면서 기도를 하라고 권면을 해 주었습니다. 몇 달이 지난 후 신앙의 힘으로 그 남편을 용서를 해 주고 그 남편은 저쪽을 청산을 하고 그 딸애는 책임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입적을 시켜서 함께 사는 것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잘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고난 다음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본가에 있는 두 아이가 아버지를 바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식사도 같이 안 하려고 합니다. 이 아버지가 애들의 그런 태도에 어떻게 설득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가 애들하고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아침밥도 안 먹고 일찍 출근해 버립니다. 이렇게 점점 가정이 이상한 분위기로 더 악화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괴롭고 힘이 들어가지고 그 두 애를 설득시키고 이해시키는 데에 이 부부가 아무리 해도 방안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이 분들이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를 아직 덜 했다, 부부끼리만 타협하고 부부끼리만 합의해서 정리하면 될 줄 알았는데 가정이라는 게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 아버지가 아이들을 앉혀놓고 회개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회개했지만 아이들 앞에 이 부부가 회개를 한 것입니다. “얘들아, 아버지와 엄마가 정말 너희들 앞에 잘못했다. 너희들이 아버지를 용서해 주어야 된다.” 그 부부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될 줄 알았지만 그 철부지 아이들 앞에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는 회개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부모의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애들 앞에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본 아이들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설마 저렇게 까지 우리 앞에서 용서를 구할 줄은 몰랐는데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하니까 이 아이들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정이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도덕성이 무너지면 관계가 무너집니다. 그것이 더 무서운 것입니다. 단순히 내가 부덕하다가 아닙니다. 도덕성은 모든 관계를 부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답다, 스승답다 라는 부모와 스승의 권위가 도덕성이라는 이 문제에 굉장히 비중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생활도 덕이 신앙은 아닙니다. 덕으로 구원받는 게 아닌데 예수를 믿는 사람은 덕이 없으면 믿음이 무너집니다. 그러니까 바로 사셔야 됩니다. 바로 못 살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내 신앙은 다른 사람이 인정을 안 해 줍니다. 이 관계가 파괴됩니다. 나는 믿음이 있는 것처럼 다가가는데 상대방은 내 믿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도덕성이 평가가 안 되는 사람에게 오는 손실입니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다 인정해주는 것 같은데 벌써 단절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성실함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아이들 앞에 성실함을 가르쳐 주어야 됩니다. ‘성실’하다는 이 말은 동양적인 말에 상당히 무게 있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성실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성경에 성실이라는 말 대신에 정직이라는 말, 또 진실이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실이라는 말은 동양적인 덕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성’(誠)이라는 정성 성자는 아주 재미가 있습니다. 말씀 언(言)변에 이룰 성(成)자가 정성 성(誠)입니다. 한자가 기독교 문화를 배경하고 있지 않지만 정성 성자는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성실은 말씀을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성실함이란 정직과 진실을 말합니다. 이것이 앞의 도덕성하고 물론 연관이 있지만 도덕성은 성실함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져야 도덕성이라는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 부모들이, 우리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인격 속에 성실함을 심어주고 ‘아, 내가 스승으로부터, 부모로부터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는 모습을 배웠다’ 이런 영향력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의 선친이나 자당은 전형적인 촌사람입니다. 산촌에서 사신 농촌 촌부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교육을 못 받은 분입니다. 어머니도 교육을 못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겨우 글을 읽을 정도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아예 글도 모르시고 계산도 할 줄 모르십니다. 그런데 저의 기억에 식사 때나 늘 하시는 말씀이 뭐냐 하면 “사람은 어디서든 정직하게 살아야 돼.” 그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도 많이 듣다보니까 그 때는 별 의미가 없는 것 같았는데 제가 지금까지도 보면 저의 아버지는 정말 진실하게 사신 분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네에서도 덕망이 아주 높았고, 저의 아버지 존함을 대면 그 고을에서는 “아, 그 어른” 그랬고, 저의 할아버지는 매우 까다로운 어른이었는데 그때 82세까지 사신 아주 장수한 어른입니다. 그 고을에서 제일 고령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기력이 좋아서 출입도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할아버지와 한 방에 수년간 같이 살았고 할아버지 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런데 그 까다로운 할아버지를 저의 아버지가 극진히 모셨습니다. 그래서 군수로부터, 도지사로부터 저의 아버지가 효자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 사람은 정직해야 된다는 그 교훈은 우리 형제들에게 상당히 강한 유산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우리 앞에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성실하지 못한 돈, 성실하지 못한 명예, 성실하지 못한 성공,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정직과 진실함이 결여된 어떤 성취도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과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과정과 방법을 하나하나 평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자라는 세대들을 향해서 이제는 무엇을 유산으로 줄 것이냐 라고 할 때 도덕성과 성실을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심어주자

  또 하나 우리가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것은 믿음을 심어주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심어주는 교육이라는 말은 우리 학생들이 평생 동안 믿음으로 인생관을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 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로 가진 사람, 이 믿음 안에 사는 사람은 아주 다릅니다.

  다윗과 골리앗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 앞에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고,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다윗의 용기는 바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어떻게 작용해서 그렇게 나타나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믿음을 자꾸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면, 믿으면 다 된다, 믿으면 소원성취 한다는 이런 방법으로 자꾸 믿음을 끌어들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는 그 구절을 앞에 있는 한 단계를 생략하고 문자적으로 바로 내게 적용하니까 믿음에 대해서 오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믿으면 된다” “믿으면 안심해라” “믿는 자는 능치 못할 게 없다” 이 말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또 믿음은 그런 요소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고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는 게 믿음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냐 하면, 믿음을 그렇게만 자꾸 적용하고 그 이상 있는 믿음의 신비를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거기까지만 압니다. 내 억울한 사정, 내 위험한 사정, 내 고통스러운 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우리 안에서 믿음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거기서 머물지 않습니다. 그건 믿음의 한 부분밖에 안됩니다. 믿음을 그런 식으로 해주면 믿음은 미신이 됩니다.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 자꾸 믿음을 추구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믿음을 자꾸 수단화합니다. 내가 믿고 나서 병이 낫다, 믿고 병이 낫는 것은 믿음 안에 포함된 은사입니다. 그러나 믿고 병이 나아야 믿음이라고 하는 거기 머물러 버리는 사람은 이미 믿음이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병 낫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안 가립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안수기도를 받고 병이 나으면 그게 믿음이라고 해석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 병 낫기를 기도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찾아가고, 그 사람의 기도는 성경말씀보다 더 권위가 있는 걸로 기억을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고난당할 때, 어려울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게 믿음인데 우리가 자꾸 믿음을 그렇게만 응용하고 끝나기 때문에 우리 믿음 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믿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됩니다. 돌아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열 문둥이가 와서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열 사람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의 규례입니다. 율법은 제사장에게 가서 병 나은 것을 확인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야 성한 사람이라는 증거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믿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가라 할 때, 병 나을 줄 믿고 제사장에게 갔는데 가다가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핵심적인 한 말씀만 드리면 예수님이 돌아온 한 사람을 보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은 돌아오지 않는 아홉 명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못 가졌다는 말입니다. 돌아오지 않는 아홉 명의 믿음은 예수님이 인정을 안 하는 믿음으로 떨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보십시오. 믿음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가다가 병이 다 나았습니다. 그것도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영광을 돌린 그 사람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는 바로 그 믿음을 오늘 우리가 가져야 되고, 우리 아이들 앞에 전수해야 됩니다. 답답할 때 와서 부르짖고 예수님 앞에 병 고친 그것으로 믿음이다 하고 예수님과 아무 관계도 없이 살아가는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믿음이 급할 때는 주님 앞에 부르짖다가 예수님 은혜 입고는 예수님하고 멀어집니다. 신앙생활에서 그런 흔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됩니다. 그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이 싸움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싸움인 줄로 다윗이 믿었습니다.

  당당한 자녀로

  제가 클 때 위의 형들한테 구박을 받고 매도 맞은 적도 있었는데 비율을 따지면 내가 어린 애들 구박한 게 80%입니다. 제가 동네 애들을 너무 많이 괴롭혔습니다. 저의 부모님들은 나 때문에 상당히 고민한 게 그 때문입니다. 그만큼 장난을 많이 쳤고 개구쟁이였고 골목대장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정말 비참한 날이 있었습니다. 내게 꿀밤을 먹은 애가 큰 형님을 데리고 왔습니다. 데리고 와서는 이 형이 날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덩치 큰 형이 “야, 너 우리 동생 때렸어?” 동생보고 그럽니다. “너 몇 대 맞았지?” “다섯 대 맞았다” “그럼, 너 다섯 대 때리라”고 합니다. 이 다섯 살 박이 꼬마가 형이 옆에 서 있으니까 나를 다섯 대 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맞으려 하니까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나 그 다섯 살 짜리 꼬마는 당당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는 그때 4학년으로 기억이 되는데 근 50㎏쯤 되는 형이 옆에서 버티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님이 어느 정도 강한 분입니까? 다윗이 믿은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그 믿음을 가진 다윗이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그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에 그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 하나님으로 내게 다가오시느냐 하는 믿음은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때 그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인데 내가 급한 그 현장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의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의지하는 믿음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아이들에게 심어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들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많이 합니다만 그 핵심은 믿음을 심어주는 교육으로 가야 됩니다. 영천교회에서 어떤 좋은 것을 배웠다는 것도 좋겠지만 내가 영천교회에서는 믿음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 자부심 가지고 영천교회를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요즘 또 한 가지 과제가 있는데 컴퓨터가 우리 세대와 전혀 다른 생활환경으로 다가왔는데 지금 여기에 대해서 조정이 일어나지 않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다시 말하면 컴퓨터를 만든 것은 우리의 생활을 풍요하게 하고, 편리하게 하고, 인간이 도움을 받고자 컴퓨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컴퓨터 속에 인간이 끌려 들어가고, 컴퓨터 속에 우리 생활이 매여 가지고는 우리 생활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생활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컴퓨터를 활용해야 되는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의 어느 대학에서는 한 주간 동안에 컴퓨터 없는 날을 만들자는 제안을 한 여학생이 해서 지금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서 공부해야 되고, 공부하는 학습도 컴퓨터 없이는 공부가 안 되는 체계가 되어 있으니까 이래 가지고는 안 되겠다 해서 컴퓨터 없는 날로 한 주에 두 번 만들어서 끼리끼리 모이기도 하고 컴퓨터 없이 강의도 듣고 일부러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서, 균형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편향성이라는 게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보다 우리 자녀 세대들은 컴퓨터가 밀접한 환경 속에서 지금 자라갑니다. 여기에 대한 조정능력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제가 요즘 KTX 열차를 자주 탑니다. 대부분 예약을 컴퓨터로 하는데 내가 봐도 그것은 삭막합니다. 왜냐 하면 전화로 예약을 해보면 예쁜 여성의 음성이 들립니다. 다음에 이것을 하세요, 또 이것을 해 주세요 등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예약을 하는 것과, 컴퓨터 앞에서 나 혼자 하는 것을 하고 나면 감정이 다릅니다. 내가 많이 느낍니다. 편리하지만 컴퓨터가 그렇게 삭막합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보면 사람 목소리가 들리고 내가 실수를 하면 다시 하라고 가르쳐 주는 목소리로 다가오는 게 또 다른 감정을 줍니다.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직접 가서 하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환경은 편리주의만 따라가다 보면 사는 맛을 잃어버립니다. 인간과의 교제의 맛을 잃어버리고, 공동체가 주는 어떤 삶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세대들은 너무 편리하고 좋은 거기에만 취해서 컴퓨터에 일방적으로 심취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어른들이, 교사들이 치우치는 것을 조정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우리 부모가 컴퓨터를 기능상으로는 같이 못 하더라도 아이들이 집중하는 것을 예방해주는 조정역할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컴퓨터를 방치하면 그 컴퓨터가 우리 애들의 인간성을 다 잡아 먹어버리는 위험성이 오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세상이 발전할지 모르지만, 아무리 세상이 발전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성이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것도 대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이버 예배라든지, 온갖 사이버들이 있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주일이라야 되느냐, 왜 주일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되느냐, 예배드리는 이 현장에, 이 시간에 예수 믿는 사람끼리 함께 만나서 예배드리는 이 예배라야 산 예배이지, 사이버 앞에서 나 혼자 예배드리는 데에는 인격성이 거기에 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예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 사람과 사람, 믿는 사람끼리 서로 만나고 인사하고 뒹굴고 함께 일하는 이 교회공동체가 주일날이라는 이 약속된 시간에 함께 모여야 하는 것 때문에 주일은 양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도전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맺는 말

  이 모든 것들을 가리켜서 우리가 뭐라고 말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표현을 하면 ‘실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제는 영적인 면에서 실력이 있어야 됩니다. 내실을 갖추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세상적인 실력은 지식이고 숫자가 맞아야 되지만 영적인 실력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는 이것이 우리가 가진 실력입니다. 이런 실력을 가진 부모, 교사가 되어야만 우리 후세대들 앞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 기존세대가 우리의 영적실력을 한번 평가하고 점검하는 그런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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