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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라 (잠 23: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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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이용호 목사

  얼마 전 어버이날 일간지 신문에는 많은 효행기사가 소개되었습니다. 감동적인 효행기사들이 많이 나와 있었습니다. 그 중에 25살의 이원식씨의 효행은 우리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대학을 포기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사는 노점상을 하는 젊은이였습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아버지, 또 지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 아직도 미성년자로 자라고 있는 여동생을 두고 차마 그는 대학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노점상을 하면서 가정을 돌보고 있는데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 대학을 포기한 그것은 결코 후회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모님을 모시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몸이 불편한 부모님을 모시면서 효의 의미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제일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것은 매일 한 번씩 아버지를 업고 산책을 해 드리는 그 자체가 부자유한 아버지에게 최고의 대접이고,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는 일인 줄 알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효의 의미

  효가 무엇입니까? 동양은 효에 대한 가르침이 굉장히 많습니다. 효경이 있는가 하면, 공자와 노자와 맹자가 효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효에 대해서 구체적인 교훈을 줍니다. 22절에 보면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너 낳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했습니다. 효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요즘 부모공경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두 가지 추이가 있는데 이것을 미래학자들이나 경영가들이 걱정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그것은 비혼과 불임, 이 두 가지 현상이 지구촌에 점점 비율이 높아간다고 합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경향입니다. 동거는 하더라도 가정을 정식으로 꾸미기를 거부합니다. 동거는 하면서도 자녀 두기를 거부합니다. 신체적인 불임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불임 추이가 점점 높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지구촌에 큰 위기로 닥쳐올 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가정의 위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첫 번째 희생자는 아이들입니다. 두 번째 희생자는 노인들입니다. 그래서 아이들과 노인들 문제는 우리 사회의 가정문제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여기 노인들이 우리 앞에 들려주는 마음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 노인들을 향하여 연구를 한 결과입니다. 부모가 자식 앞에 하고 싶지 않은 말, 하기에 부담스러운 말이 여러 가지가 있는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몸이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몸이 아프다 약을 좀 지어 달라. 병원에 가서 치료를 좀 받자”라고 하는 이런 말을 하기가 너무 부담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가 아파도 한참동안 참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외롭다’는 말을 하기가 그렇게 힘들답니다. 노인들이 정신적으로 외로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들 앞에 “얘들아, 내가 외롭다. 어디 바람 좀 쐬러 가자. 내가 기분전환을 할 필요가 있다. 여행을 한번 가자” 차마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배고프다’ 는 말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배고프다는 말은 실제로 끼니를 거르는 노인들도 더러 계시지만 여기에는 용돈이 궁한 것도 포함시켜서 통계를 내었습니다. “얘들아, 내가 지금 용돈이 궁하다. 용돈을 좀 달라” 이 말을 하기가 어렵답니다.

  먼저 배려하자

  이렇게 노인들이 들려준 이 이야기 속에 자식된 우리들은 효의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식들이 먼저 다가가야 되는 일입니다. “아버지, 몸이 불편하시지요. 오늘 병원에 가십시다.” “어머니, 약을 이렇게 지어 왔습니다. 이것 잡수시고 기운 좀 돋우십시오.” 이렇게 자식 편에서 다가가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님, 이번 봄에  나들이 좀 하고 오십시오.” 이렇게 다가가야 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하기 어려워하는 그 말을 자식들이 먼저 다가가고 표현해야 하는데 그게 안된다는 것입니다. “아버님, 용돈이 모자라시지요. 걱정하지 마시고 이것 가지고 쓰십시오.” 이렇게 다가갈 수 있는 자식들이 되어야 합니다. 효는 위로 한계가 없습니다. 불효는 한계가 있습니다. 효가 모자라면 문제가 되지만 효행이 아무리 지나쳐도 그것은 무리가 안됩니다. 부모공경은 아무리 해 드려도, 하고 또 해도 한계가 없습니다.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십계명에 주어진 이 계명은 매우 무게가 있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약속있는 첫 계명입니다. 부모공경 하라는 계명 다음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부모공경이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이 계명은 불효는 살인보다 더 중죄라는 개념입니다. 불효는 간음보다 더 부도덕하며, 불효는 도적질보다 더 사악하다는 개념입니다. 첫 계명입니다. 이 부모공경이 안 되는 죄는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증거보다도 더 중한 죄라는 개념입니다.

  효자의 공은 부모님께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들은 부모에 대한 불효의 가책이 많습니다. 모셔 드렸는데도 그래도 부족하다 이런 마음이 있는데 부모를 모시지 않고 사는 자식들은 불효에 대한 가책도 잃어버리고 있는 세태입니다. 오히려 부모를 모시는 분들이 그런 부담을 느끼면서 더 효도를 합니다. 효는 효자의 덕이 아닙니다. 효자의 공은 부모에게 돌려야 됩니다. 효자가 효행을 했다고 내 공이라고 상을 받고 끝나면 안됩니다. 효자가 효행하는 그 자체도 부모의 공입니다. 부모 때문에 효자는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은 소문난 망나니들입니다. 5일마다 장이 열리는데 장날마다 그 아버지는 사고를 한 건씩 칩니다. 그 부모들은 지탄을 받는 부모들이고 평소에도 이웃들과 불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많이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효자가 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입에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부모님에 대해서는 내세울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못난 부모님이 자꾸 불쌍히 여겨지고 내가 이 부모를 더 잘 모시지 않으면 얼마나 비참한 사람들이 되겠는가? 부모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아버지가 말썽을 부릴수록 더 강렬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진히 모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에 아주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저가 부모님이 측은히 여겨지고 그 부모님을 내가 안 모시면 안된다는 그 마음이 부모로부터 받은 마음입니다.” 그렇게 답을 했습니다. 참 진정한 효자입니다.

  오늘 우리의 효는 여러 면에서 변질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반응따라 효도 반응하는 세태입니다. 부모가 실수하고, 부모가 부족할 때 측은해 지고, 저런 약점있는 부모이기 때문에 내가 더 잘 모셔야 된다는 자세가 아니고 부모가 실망시키고 부모가 자식들 기대에 못 미칠 때 사정없이 내뱉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지 마시오!” 이 말에 상처를 받은 어느 노인은 그 사랑하는 자식의 품을 떠나 시설로 갔습니다. 딸이 그저 매일 내뱉는 말, 우리 앞에 보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딸의 말 앞에 견디지 못하고 시설로 간 어머니의 한이 있습니다. 부모의 반응따라 효도 반응하는 이 변질된 세태, 진정한 효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효자와 불효자

  문화적으로 보면 동양이 효도하기가 더 쉽고 효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보시면 안됩니다. 똑같이 동양에 불효자도 많습니다. 우리나라에 부모님을 잘 모시는 효자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학대하는 불효자도 많습니다. 제가 미국에 잠시 살아보니까 미국에는 효자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처럼 부모님을 모시는 가정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만 보고 효자도 없는 동네, 효자도 없는 사회가 무슨 선진국인가? 그렇게 평가하시면 안됩니다. 반면에 선진국에는 불효자가 적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노인을 학대하고 부모를 학대하는 경우가 없습니다. 사회와 국가가 자식들이 할 효에 한 몫을 책임져 주기 때문에 노인들이 그렇게 처량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동양에는 효자도 많고 불효자도 많고, 서양에는 효자도 적고 불효자도 적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추수감사절기를 통해서 부모를 만나고 찾아가는 좋은 풍습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제 정말 효의 근본이 무엇인가? 효의 진정한 의미와 본질이 무엇인가? 이것을 좀 찾아보아야 합니다.

  통계청에서 자식들에게 학대받고 집을 나온 노인들 1,815명을 조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아들로부터 학대받은 노인이 41%, 745명이 학대를 받았습니다. 다음 순위가 며느리한테 학대받은 노인이 29%입니다. 다음에 딸한테 받은 사람이 9%입니다. 숫자로 따지면 굉장히 많습니다. 요즘 딸은 이렇습니다. 그러면서 케이스를 하나 소개했습니다. 지방에서 사시는 어머니에게 딸이 와서 우리가 엄마를 평생 잘 모실 테니까 여기 있는 논밭을 정리하고 합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위와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수천평이 되는 논밭을 팔아서 딸한테 주고 평생 모시는 약조를 하고 그렇게 딸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조금 흐른 후에 그만 딸의 마음이 변하였습니다. 이 딸이 내뱉는 말이 폭력보다 더 심합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견디지 못하고 시설로 온 사연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효가 수단화됩니다. 부모가 내게 무얼 해주느냐에 따라서 효를 계산합니다. 이것은 오늘의 세태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고의적인 마음 아픈 불효자들도 생겨난 시대라면서 어버이날 제일 고통스런 사람들은 이태백이라고 합니다. 직장을 구하려 해도 취업이 안 되고 돈도 없고, 부모들 앞에 신세지고 사는 처지에 어버이 날이라고 선물을 하나 보내드리고 싶은데도 그 처지도 안 되고, 뵈올 낯도 없고, 취업했다는 전화를 해드려야 되는데 맨날 낙방이나 하고, 내년에는 월급타서 효도하리라고 다짐했던 그게 또 일년이 지나가고 차마 부모님 앞에 전화드릴 얼굴도 안 되는 이 이태백들의 고통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성경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하는게 부모공경의 기본인가를 한번 생각합시다.

  마음과 눈으로

  효는 물질로 하는게 아닙니다. 오늘 성경에 중요한 성구가 하나 있습니다. 26절에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가 나옵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달라” 또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효는 마음으로 하고 눈길로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안 되면 다른 것도 성립이 안됩니다. 형편이 안 되서, 돈이 없어서, 여유가 없어서 효를 못한다는 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모가 우리 자식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식의 마음입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네게 달라.” 오늘 우리 자식들이 부모님께 밥을 한 끼니 드리면서도 그저 아까운 마음이 든다면 그것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님을 섬겨드리면서 뭔가 빼앗기는 것처럼 그저 아까운 마음이 듭니까? 혹시 여러분, 교회 헌금을 드리면서도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까? 헌금할 때마다 아까운 마음, 빼앗기는 마음, 손해보는 마음으로 하는 것은 믿음의 헌금이 아닙니다. 우리의 효에는 자식의 마음을 담아드려야 합니다. 그게 부모를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걸 부모가 읽을 때 무엇을 받았느냐가 아닙니다. 그 선물에 담긴 자식의 마음이 느껴질 때 부모는 마냥 기뻐하고 보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여기 ‘내 길’이란 말은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말합니다. 자녀들아, 내가 사는 내 모습을 네 눈으로 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요즘 자식의 눈길을 피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자식들의 눈길이 너무 무섭습니다. 부모를 보는 눈길이 순수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부모노릇 했다고. 내가 당신같은 부모를 만나서 이 팔자가 된 줄 알기냐 하느냐’ 하는 눈길로 봅니다. 여러분, 그렇게 보는 눈길을 누구보다 부모가 먼저 알아차립니다. 오늘 성경에 뭐라고 했습니까? “네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멸시하는 눈길부터 고치시기 바랍니다. 시선부터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효를 눈길에서부터 먼저 시작해야 됩니다. 마음을 드리고 눈길을 바로 해야 됩니다. 우리 부모님이 자식의 눈길을 보고 또 봐도 부담없는 효심의 눈길로 부모를 대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부모의 약점을 볼 때마다 오히려 측은히 여기고 저 약점을 내가 담당해야 된다는 효심의 마음으로 부모의 약점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니라” 즉  내가 지금 부모답지 못하다. 그러나 부모답지 못한 이걸 즐겁게 보아 달라는 말입니다. 자식의 눈길부터 부담스러우면 그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좋은 침대에 재워드리고 아무리 맛난 것으로 먹여드려도 그 부모의 마음은 즐겁지가 않는 것입니다.

  효는 흉내만 내어도

  조선시대 야사를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임금님이 개성고을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월 몇 일, 임금님이 개성고을을 순방하신다는 방을 붙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한 촌에 사는 어느 노모가 아들에게 요구를 합니다. “얘야, 임금님이 우리 고을에 오신다는데 용안을 한번 뵙고 죽는게 내 소원이다.” “어머니,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어디 천민이 감히 상감마마 앞에 갈 수가 있으며, 임금님 행차에는 우리 같은 사람은 근방에도 못갑니다.” 그래도 이 어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아들을 보챕니다. “얘야, 이번에 나를 업고 용안을 보게 해 달라. 그러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때마다 보채는 이 어머니의 말을 새겨두고 임금님이 오시는 날  이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는 나서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저히 그 행차 근방에 갈 수가 없습니다. 포졸들이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애절한 소원을 담은 이 아들이 임금님의 행차에 그 용안을 한번 보여 드리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이리 뛰며 저리 뛰면서 포졸들과 몸싸움을 하는데 그 광경을 임금님이 보시게 된 것입니다. 황공을 하신 임금님은 도승지를 불렀습니다. “오늘 개성고을 아무 개 지점에서 이런 일이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그 사람을 데리고 오너라.” 그래서 불렀습니다. “네가 오늘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느냐?” “폐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 같은 천민이 소란을 피워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는 사연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저의 노모께서 용안을 한번 뵙고 죽는게 소원이라고 밤낮 일러 보챘기 때문에 제가 어머니를 업고 나온 것입니다.” 그 사연을 들은 임금님은 큰 효자상을 베풀었습니다. 그 소식이 온 고을에 전해지고 그야말로 상놈인데도 임금님의 상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양반대우를 받게 되고 훌륭한 효자로서 세워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습니다.

  몇 년 후에 임금님이 또 행차한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방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수많은 자식들이 부모님을 업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광경을 본 임금님이 도승지를 보고 “여봐라, 저 모든 사람들에게 상을 내리도록 하라.” 이것은 뜻밖의 일입니다. 그래서 임금님의 상을 내리기 위해서 그날 나왔던 사람들을 조사를 해보니까 큰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수많은 민원이 들어왔습니다. “저 아무개 저 사람은 평소에 어머니를 구박하는 불효막심한 놈인데 상 받으려고 일부러 그날 업고 나간 것입니다.” 하는 이런 고발이 들어오는데 상 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대로 보고를 했습니다. “폐하, 이번에는 상을 줄만한 효자가 없는 줄로 아뢰오.” 그런데 임금님은 청천벽력같이 호령을 내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남김없이 상을 내리도록 하라.” 신하들이 안절부절 합니다. “폐하, 다시 한번 통촉하시옵소서. 이번 같은 경우는 다르옵니다.” “어허, 어명대로 할지어다.” “폐하, 무슨 연유이옵니까? 연유라도 설명해 주시옵소서.” 임금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효도란 흉내만 내어도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니까 상을 내리도록 하라.”

  맺는 말

  성도 여러분, 효도는 남 따라 흉내만 내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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