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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 (막 1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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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주철 목사 (영신교회)

유명한 팝 가수인 엘튼 존이 부른 노래 가운데 “바람 속의 촛불”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는 이 노래를 우리 시대의 여성 가운데 최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살았던 두 명의 여성의 죽음을 추도하기 위해서 이 노래를 바쳤습니다.  한 여인은 영화 배우인 마를린 몬로였고, 또 한 여인은 찰스 황태자비였던 프린세스 다이애나였습니다.  1973년에 처음 이 노래가 탄생했을 때 이 노래의 두 번째 단락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살았어요.  비가 내려도 누구에게 갈 수 없었던 당신.  그때 내가 당신을 알았더라면.  하지만 나는 어린애였죠.  이제 당신이 전설이 되기 전 당신의 촛불은 벌써 타버린 것을.”
그는 이 노래로 불행한 인기 여배우 마를린 몬로의 죽음을 애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1997년 9월에 다이애나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갔을 때 그는 유명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장례식장에서 다시 이 노래의 가사를 조금만 개작하여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보기에 당신은 바람 속의 촛불처럼 살았어요.  비가 내려도 석양과 함께 사라지지 않는 당신은 지금.  여기 영국의 푸른 언덕길마다 당신의 발자국은 남아.  하지만 이제 당신이 전설이 되기 전 당신의 촛불은 벌써 타버린 것을.”
엘튼의 이 노래가 사상 최대의 앨범 기록을 세우고 이 두 여인을 향한 추모의 발걸음이 지금도 그치지 않고 이 두 여인의 사진이 세계도처에서 계속 재생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는 가히 이 두 여인의 인기를 실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두 여인보다 더 유명한 여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 여인은 마를린 몬로나 다이애나가 등장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이미 유명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몬로나 다이애나의 전설이 사라진 먼 훗날에도 여전히 그 인기를 계속 유지할 것입니다.  이 여인은 성경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 여인의 인기는 예수님에 의해서 이렇게 예언된 바가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그렇습니다.  소위 설교자들이 이 땅에 존재하는 한, 그리고 성경을 읽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아마도 이 여인은 계속해서 언급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여인은 주님에 의해서 인정되고 기억된 사람이 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이 여인은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기억될 수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신기한 것은 이 여인이 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옥합을 깨뜨려 죽음을 앞두고 계셨던 예수님의 머리에 그 향유를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은 마리아라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마리아는 이날 옥합을 깨뜨렸을까요?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의 심정, 이것이 궁금합니다.  이것이 알고 싶다 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의 마음을 알고 싶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으로부터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해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여인으로부터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첫째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이 사건의 발단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그러나 저는 이 식사가 평범한 초대의 식사 정도가 아닌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보은 잔치 성격이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2장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요한복음 12장 1절과 2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그러니까 이 잔치가 그냥 잔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다가 부활한 후에 이것이 너무나 큰 충격이고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은의 잔치가 열렸던 것입니다.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 이렇게 세 오누이가 살던 가정에 나사로가 가장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절망이었겠습니까?  그런데 그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또 얼마나 크다란 충격이었을까요?  감격이었을까요?  그래서 잔치가 열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문둥이로 소개된 시몬은 아마도 문둥이였다가 주님의 기적의 만지심으로 치유를 경험했던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잔치가 나사로의 집이 아니고, 시몬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가난했던 나사로의 집안보다는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이 훨씬 공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집이였었기 때문이라고 추정이 됩니다.  그래서 시몬의 제안으로 잔치 장소를 시몬의 집으로 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석상에서 갑자기 한 순간 마리아가 옥합을 들고 나오더니 옥합을 깨뜨립니다.  그리고 그 속에 있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반응이었습니다.
“아니, 저 비싼 향유를 저렇게 낭비해도 되는가?”(4절)
아마도 가족들과 당사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동네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말없이 예수님의 머리에서 발까지 흘러내리는 향유를 이제는 다시 그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이 여인의 사랑이었다고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낭비를 결코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낭비는 차라리 특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낭비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돈을 써보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때문에 아까우셨습니까?  그러면 그분은 아직도 진정한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사랑에는 낭비의 본능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시간을 낭비합니다.  생각을 낭비합니다.  주야로 그녀를 생각합니다.  물질을 낭비합니다.  사랑은 사랑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기 전 존재를 낭비해도 오히려 그것을 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낭비할 수 없는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마리아의 심정이 바로 이런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뭐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낭비라 해도,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영혼을 살려주신 주님,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이 내게 소망이었던 바로 그 분, 내 오라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돌려주셨던 그 분, 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바로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옥합을 깨뜨리게 만든 것입니다.

교회 역사가였던 라투렛은 교회 역사를 연구하면서 교회 역사에 나타난 중요한 결론 하나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 그들은 신학자가 아니다.  정치가도 아니다.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다.  교황도 아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아니다.  이름없이 인정받지 못한 채 주의 제단에 사랑을 바쳤던 수없이 많은 성도들, 그들이 바로 교회의 주역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리아와 같은 성도들, 그들이 바로 주님의 교회를 지켜온 주역들이었던 것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마음, 그것은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오늘도 오늘의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마리아의 영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옥합을 깬 마리아의 심정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우리 모두가 마리아처럼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의 사랑으로 주 앞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두 번째로, 그것은 “전부를 드리는 마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방법에는 사실상 세 가지의 가능한 방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옥합의 끝 부분을 열어서 향유를 조금만 붓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헌신의 방법이었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실제로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향유를 준비했다가 향유로 머리에 몇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이 습관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훌륭한 예의로 간주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가능했던 방법은 옥합을 열어서 향유를 전부 부어 드리는 방법입니다.  아마 이 정도면 이것은 최고의 헌신으로 기억될 만 합니다.  이렇게 부은 다음에 그 옥합은 다른 용도로 다시 사용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마리아는 이 방법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택한 세 번째 방법은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옥합의 끝 부분을 연 것이 아닙니다.  옥합은 두 부분으로 열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끝 부분을 열 수가 있었고, 또 하나는 옥합의 모가지 부분을 쳐서 깨뜨리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향유를 아예 다 부어버린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 옥합이나, 이 향유를 다시는 주님 이외에 다른 대상으로는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최소한의 예의있는 헌신, 아니면 최고의 헌신으로도 만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의 헌신, 그것은 전체를 바치는 전부의 헌신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이런 마음의 헌신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저가 힘을 다하여…”

본문 5절에 보면 당시에 마리아가 실제로 드린 향유의 경제적인 평가는 300데나리온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일상적으로 한 노동자가 하루 열심히 일하고 하루에 받는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300데나리온은 거의 1년 봉급에 해당되는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원리는 주님 앞에서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밴스 해브너(Vance Havner)라는 설교가가 ‘전적인 헌신’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설교가 끝난 후에 매우 지적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이 분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왜 가능하지도 않은 전적인 헌신을 설교하시나요? 전적인 헌신이라는 것이 정말 가능하십니까?  목사님, 그냥 80-90%만 헌신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현실적인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밴스 해브너는 이런 반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부인, 부인은 말이지요, 만약 부인의 남편이 부인에게 80-90%만 헌신하고 나머지 10%는 다른 여성에게 헌신해도 만족하시겠습니까?”

그는 이어서 다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전적인 헌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헌신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마음, 그것은 전부를 드리는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마리아의 이 헌신을 본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느 일정 부분은 주님께 헌신하고, 나머지 부분은 세상을 향하는 이중적인 헌신은 헌신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전부를 드리는 마음으로 주 앞에 헌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깨는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 번째로 그것은 “기회를 붙잡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마리아의 헌신을 소개하면서 주목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그녀의 헌신의 때, 시기였습니다.  본문 바로 다음 구절인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다시 말하면, 옥합을 깨뜨린 향유를 부은 사건 직후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한 음모의 계획이 시작됩니다.  때는 바야흐로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이 오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본문 1절은 바로 이 긴박한 상황을 이렇게 보도합니다.  1절을 다함께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일 방책을 구하며”
그러니까 예수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예수님을 둘러싸고 매우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알고 가까이 있었고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러다가 예수님이 체포당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예수님이 이러다가 돌아가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아마도 여성 특유의 직관으로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그분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아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마리아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집으로 달려갑니다.  어느 날 자기 인생의 결정적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서 두었던 그 옥합 속에 있었던 인도산 고급 향유를 꺼집어냈습니다.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옥합을 깨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것입니다.  이때 옥합을 깬 마리아의 마음, 그것은 결정적인 그 기회를 붙잡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옥합을 깨뜨렸던 마리아를 향해서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저가 …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하면서 그것으로 차라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던 이들에게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본문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결코 이 말씀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과소 평가하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나를 위해서 다르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시기라고 하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별의 시간에 중요한 일은 의미있는 작별을 하는 일입니다.  이 중요한 작별의 순간에 “우리 가서 가난한 사람을 도웁시다” 라고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헌신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를 잃어버리면 나는 소중한 헌신의 역사에서 예외자로 남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영신교회가 부흥되어 수많은 영혼들이 이 재단에서 주의 은혜에 동참하는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우리 영신교회가 아름답게 부흥, 성장하는 이 위대한 역사, 이 소중한 역사에 나의 헌신, 나의 눈물, 나의 기도가 있었다 라고 오고 오는 세월동안 간증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녕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본문 6절을 개역 한글 번역에서는 주님이 이 여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우리말 번역에서는 좋은 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더 좋은 번역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저가 내가 아름다운 일을 하였느니라.  She has done a beautiful thing to me.
저는 우리 교회가 부흥하여 가는 이 아름다운 역사에 한 교우도 주변을 맴도는 구경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아름다운 부흥의 역사에 뜨겁게 동참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에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뜨겁게 주님을 섬기는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습니다.  기회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지나가면 다시는 영원히 붙잡을 수가 없는 것, 그것이 기회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성도가 기도할 때마다 늘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조금만 더 제게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정말 헌금을 드릴 수가 있었을 터인데 제게는 그런 여유가 없어요.”  똑 같은 성도가 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시간을 드려 주님과 몸된 교회를 섬길 수가 있었을 터인데 제겐 시간의 여유가 없어요”  똑같은 성도가 또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제게 조금만 더 재능의 여유가 있었더라면 저도 남들처럼 저의 재능으로 주님을 한번 멋지게 섬길 수가 있을 터인데 저에게는 그런 재능의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에게 기도를 응답하셔서 어느 날 ‘조금만 더’의 재물과 ‘조금만 더’의 시간과 ‘조금만 더’의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기다려도 소식이 없습니다.  헌신하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날 그에게 주셨던 조금만 더 의 재물과 조금만 더 의 시간과 조금만 더 의 재능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이번에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다시 한번 옛날처럼 조금만 더 의 재물과 조금만 더 의 시간과 조금만 더 의 재능을 돌려주시면 제가 기꺼이 주님을 다시 섬기겠습니다.”
그때 주님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셨을까요?  “타임 이웃!”
기회는 지나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허락하신 그 기회에 주님이 주신 선물로 다시 몸된 교회와 주님을 섬기는 이 아름다운 역사에 주 앞에 삶을 드려 주 앞에 아름다운 성도로 기억되시는 아름다운 주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십시다.
여러분, 인생에서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 주님께 헌신할 수 있는 기회, 내가 아직도 건강할 때, 내가 아직도 조금은 여유가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우리 주님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후회없이 인생을 드리다가 주 앞에 설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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