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왕의 초청 (마 22:1~14)

  • 잡초 잡초
  • 460
  • 0

첨부 1


설교 : 강구원 목사 (갈보리교회)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것에 대하여 드러내어 놓고 책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적들의 도전도 만만치 아니했습니다. 대적들이 도전해 올 때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신적 지혜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대적들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여기 본문에 말씀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지목하여 말씀하시는 줄 알고 잡고자 할 때 예수께서 다시 혼인잔치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왕이 잔치를 배설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시일을 정하지 않은 채 많은 손님들을 극진히 청했습니다. 유대 나라에서는 손님을 큰 잔치에 초대할 때 사신이나 사람을 보내 일차적으로 알리고 잔치 당일에 다시 종들을 보내어 모셔오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 초청받은 자들은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두 번째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했습니다. 그러자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일에 바쁘다고 가버렸습니다. 또한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는 적대 행위를 가했습니다. 이에 진노한 왕은 그 곳에 군대를 보내어 그 종들을 죽이고 능욕한 자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르고 말았습니다. 왕은 종들에게 말하기를 혼인 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초청은 사거리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청하여 오라고 했습니다. 종들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와서 자리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 손님들 중에는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것은 왕을 모욕하는 행위였습니다. 결국 예복을 입지 못한 자는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짐을 당하고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왕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왕자입니다. 예수는 천국의 사역을 왕이 아들을 위해 배설한 혼인 잔치로 비유하였습니다. 종들은 이 땅에 보냄을 받은 사자들입니다. 혼인집은 오늘의 교회입니다. 궁극적으로 영원한 잔치 집은 천국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나타내시려고 하는 진리의 교훈은 초청받은 자들은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의도의 말씀입니다.
'왕의 초청'은

Ⅰ. 영광스러운 초청입니다.

본문 22장 2-3절에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왕자를 위한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들입니다. 임금에게 있어서 자기아들은 자신의 모든 것입니다. 그들은 왕이 초청한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의 아들을 위하여 배설하는 잔치에 초대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불 왕자와 관계를 가져야만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사역, 다시 말하면 택자 구원사역을 가리켜 왕이 아들을 위해 베푸는 혼인 잔치를 비유로 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축복의 잔치에 초청을 거부하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라고 하였지만 끝내 오지 아니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극히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왕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이 그 잔치에 가기를 싫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례 요한은 신부를 취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기에게 큰 기쁨이 있다는 비유(요 3:39)에서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끝내 세례 요한의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와 창녀 같은 죄인들에게 회개와 세례를 허용하는 것은 그들의 전통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약속과 초대는 이미 구약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져 오던 것이 때가 되어서 실제로 나타난 것을 예수께서 비유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여 왕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이 끝까지 세례 요한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a fixed idea)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7-10절에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리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니라』고 했습니다.
'왕의 초청'은

Ⅱ. 거듭되는 왕의 초청입니다.

본문 22장 4-6절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상업차로 가고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라고 했습니다.
왕의 초청은 절대적인 초청입니다. 그 명령(command)을 거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비유에서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간청하듯한 왕의 초청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이것은 왕의 자비로서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인내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왕은 초청받은 자들을 위하여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애로운 왕의 초청은 그들로부터 크게 멸시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초청받은 자들은 돌아보지도 아니했습니다. 하나는 밭을 샀기 때문에 밭으로 갔습니다. 또 한 류는 상업이 바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류는 장가들었기 때문에 신혼을 즐겨야 한다고 했습니다(눅 14:16-19). 여기에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한 류는 아예 왕이 보낸 특사를 잡아 능욕하고 죽여 버렸습니다.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들 중에 그 어느 누구하나 가난하거나 환난 중에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두가 호황을 누리고 건강하고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모두가 복을 받아 밭도 사고, 소도 사고, 집도 사고, 회사도 번창하고,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고, 육신적으로 욕심만 부리지 아니하면 태평성대를 누리는 시기입니다. 왕의 아들의 잔치에 큰 선물을 사 가지고 와도 부족할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왕이 선정(善政)을 한 결과 얻은 평화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힘을 쓰고 노력해도 나라가 불안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똑똑하고 잘나서 잘살고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늘 자기 자신에게 속고 사는 인생입니다.

이 행복, 이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감사하고 축하해야 할 사람들이 왕의 초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을 해하는 참혹한 현장이 바로 오늘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자기 백성을 값 주고 사기 위하여 친히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사람들이 먹고서 영원히 사는 생명의 떡이라고 했습니다(요 6:47-51). 또한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했습니다(요 6:52-59).

교회는 날마다 잔치를 배설하는 곳입니다. 이 잔치에는 얼마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영육의 만족을 줄 수 있는 풍성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왕의 간곡한 초청을 거부하고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 죽였으니 왕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끝까지 아들을 영접치 아니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디도(Titus)장군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하고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 죽인 죄의 대가는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잔치를 기뻐할 줄 모르는 오늘 유대인들의 현실은 비참합니다. 지금 중동지역의 긴장과 팔레스틴과의 끝이 보이지 않는 유혈 충돌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의 결과, 저들의 어쩔 수 없는 징계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작게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일입니다.
'왕의 초청'은

Ⅲ. 거부할 수 없는 초청입니다.

본문 22장 11-13절에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왕은 종들에게 명하여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종들은 사거리에 나가서 약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와서 자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여기에 사거리는 동서남북으로 뻗어 가는 우주적 복음운동입니다. 약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데려 오라는 말은 구원에 초청받은 이 세상의 모든 인류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왕의 잔치에 초대받았으면 의전이 있고 예의를 잘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함부로 궁중에 들어왔습니다. 궁중의 왕의 잔치에 초대받은 자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했습니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통일성과 구별됨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① 예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② 자기 옷이 너무 더러워서 예복과 어울리지 아니했든지 ③ 아니면 자기 옷이 예복보다 너무 좋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어떤 경우에든지 예복을 입지 않은 것은 왕의 잔치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 예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덧입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옷은 요셉의 채색 옷(창 37:31)입니다. 그 옷은 바로 제사장의 거룩한 옷(출 28:2, 4 ; 스 3:10)입니다.
그 옷은 빛의 갑옷(롬 13:22),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롬 13:14)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새 사람이 입어야 할 옷(엡 4:22-24 ; 골 3:10)이라고 했습니다. 흰 옷(계 3:18), 어린 양의 피에 씻은 옷(계 7:14)이라고 했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옷(계 19:8), 세마포 옷(계 15:6), 피 뿌린 옷(계 19:8)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서 복음을 받고 주의 교회에 나오지마는 예복을 갖출 줄 모릅니다. 즉 십자가의 은총을 덧입지 않고 있습니다.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너무 의롭고 자신 만만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총을 덧입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지 어떤 경우에든지 십자가의 의를 덧입지 않는 자들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잔치에 초청 받았지만 그것을 거부한 유대인들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거듭해서 잔치에 초청했으나 이제는 종들을 능욕하고 잡아 죽이는데 이르렀습니다. 이쯤 되고 보면 하나님의 진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살인자들과 동리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사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 집을 가득 채웠으나 예복을 입지 아니한 자들은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짐을 당하고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주 신앙고백에 대해서 자기 점검이 필요합니다. 공적으로 맹세하는 서약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지도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세케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성경구절인 열왕기상 2장 42절에서 『…내가 너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고…』라고 했습니다.
열왕기하 11장 4절에서도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왕이 아들을 위한 혼인잔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의 기쁨이자 구원의 축제입니다. 그 장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대상은 이 땅의 모든 택자입니다. 그 축제의 기간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잔치입니다.
그 잔치의 중심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배는 2가지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의 감각(a sense of awe)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의 감각(a sense of joy)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자를 보수적 예배로, 후자는 이른 바 진보적인 예배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어야 될 것은 전자와 후자는 적당히 균형을 이루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지하는 외적 표현이 기쁨으로 나타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주일 공적 예배(corporate worship)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기뻐하고 그 기쁨의 표현이 행동화되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왕의 초청에 거부하거나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고정관념(a fixed idea)이나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우리에게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는 것을 애써 자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선진국가에 비해 문화적, 학문적 기반이 대단히 열악합니다. 우리나라 대학 중에 적어도 노벨상을 수상한 교수를 확보한 학교가 하나도 없습니다.

서울대를 다니다 하버드를 유학한 학생에게 한국의 교육과 다른 것이 무엇이냐고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하버드는 한국과는 달리 객관성 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예로 하버드는 국제학술발표회에서 발표할 수 있도록 교육시킨다고 했습니다.
스웨덴 왕립학술원장 얀 린슈덴(69)박사는 노벨상을 휩쓰는 비결은 돈보다 지식 존중문화가 정립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 학술원장 나가쿠라 사부로(84)박사도 말하기를 1945년 일본인 최초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를 비롯해서 그 동안 노벨상을 수상한 일본인 과학자 대부분은 취직이나 돈이 문제가 아니라 20-30년 동안 학문을 연구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교육현실은 당장의 취직을 위한 도구적 학문(道具的學問)으로 전락했습니다. 지식기반 산업(知識基盤産業)으로 급선회한 우리의 처지를 감안하면 우리의 인프라(infrastructure)는 저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그 무엇보다도 기독교 문화입니다. 제 16대 국회의원 273명중에 112명이 기독신자였습니다. 정확하게 전체 국회의원 중에 41%가 기독신자입니다. 제 17대 국회의원 299명중 기독교인이 122명입니다. 열린 우리당이 67명, 한나라 당이 46명, 기타 9명입니다. 역시 41%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국가고시는 주일날 응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거두절미하고 입법부에 있는 국회의원들이 주일 성수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인격적으로는 훌륭할지 모르나 통시적 안목으로 볼 때 그들의 신앙적 인격은 결코 훌륭하지 못하다는 결론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이 있고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기준을 교회에 적용시키려고 하면 결과는 갈등과 불평으로 말미암아 자기 파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공동체 전체를 함몰시키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분명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라든지 "그렇게 하도록 노력해 보겠다."라든지 "가능하면 되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라고 하는 외교적용어(外交的用語)는 교회에서 통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언제나 겸손과 절대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잔치에 초청 받은 자는 술과 떡과 고기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영생을 먹고 성령으로 취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잔치에 올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입는 옷입니다(롬 13:14). 바로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을 덧입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우리에게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뜨겁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속죄의 새 옷을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 날에 바깥 어두움에 던짐을 당합니다.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습니다(마 22:13). 이 울음은 슬픔의 울음입니다. 고통 속에 울음입니다. 이 울음은 후회해도 소용없는 울음입니다. 이 울음은 아무도 받아주거나 들어주는 이가 없는 울음입니다.
본문 22장 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누가복음 18장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고 하신 말씀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아 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