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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잃어버린 인물, 요셉 (창 50: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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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은호 목사 (동안교회) 

요즘은, 장수시대이기 때문에 환갑하시는 것이 좀 쑥스럽기도 하지만, 제가 자라던 어린 시절만 해도 동네에서 환갑을 넘기신 어른이 그리 많지 않으셨습니다. 몇 해 전, 칠순 가까우시지만, 젊은이 보다 더 바쁘게 일하시는 어느 장로님 생신축하연에 가서 드렸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장로님, 장로님께서는 시편 92편 14절 말씀처럼,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한 의인의 복”을 받으셔서 젊은 사람 못지않게 강건하시고 오히려 젊은이보다 더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시고 계시지만, 장로님은 칠순 가까운 연세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을 드렸습니다. 제가 질문을 드리고 제가 답을 드리긴 했지만, 그 때 장로님께 드렸던 저의 답은 ‘섬김(디아코니아)’이었습니다. 장로님께서 환갑을 퍽 넘기신 연세이지만, 젊은이 보다 오히려 더 많이 일하시고, 더 풍족한 삶의 결실을 거두시는데, 그러나 그 분주한 일과 거둠의 의미는, ‘섬김(디아코니아)’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년의 의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거두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서 땀 흘리고 수고하는 때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분복分福이 무엇인가를 정산하는 때이고, 지금까지 내가 받은 삶의 모든 분복分福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고민하고 애쓰는 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전에, 원거리에서 출석하시는 어느 권사님(부군 안수집사님) 댁 심방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권사님은 환갑이 가까운 분이셨는데, 3남매 자녀들이 다 장성하여 가정도 이루고, 나름대로 꽤 안정적인 노년의 삶을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권사님 가정에도 자녀들과 손자가 있지만, 자녀 외에도 시가와 친가의 많은 형제들도 계시는데, 여느 가정들처럼 많은 가족들 관계 속에서 사시는 분이셨습니다.

권사님 가정에 심방을 하면서 드리고 싶었던 말씀 또한 권사님 내외분의 노년의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 말씀만이 노년의 삶의 의미意味라는 것은 아니지만, 권사님 댁 심방 전에 기도하면서 준비한 그 말씀을 읽고 함께 나누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나눈 말씀이 두 곳의 말씀인데, 하나는 창세기 17장 5절 말씀과 15, 16절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오늘 본문 말씀인 창세기 50장 19절, 20절 말씀이었습니다. …….

창세기 17장 5절과 15, 16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실 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사라를 부르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를 부르신 뜻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 곧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부르셨고, 사라를 ‘열국의 어머니’ 곧 ‘여러 민족의 어머니’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들의 과거 수천 년 동안의 역사 속에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아브라함을 이삭의 후예인 선민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만의 조상’으로 여겼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조상쯤’으로 여겼습니다. ‘사라’ 역시, ‘열국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삭의 후예인 ‘유대인 자기들’만의 어머니로 여겼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매우 크게 왜곡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일차적으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잘못이 매우 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 말씀하신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가 되라는 그 소명에 응답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는 고사하고, 자신의 가정조차도 복음적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 불과했습니다. 아브라함 부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가정에서 쫓아낸 후, ‘이삭’의 아버지와 어머니 노릇밖에 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삭의 후예들은 잘못된 선민사상에 빠져 배타적이고 편협 된 하나님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만 섬기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깊은 역사적인 갈등의 뿌리가 되어서, 오늘까지도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반목과 대립과 싸움이 그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의 과제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갈등의 뿌리가 된 ‘그릇된 유대인들의 신앙과 삶의 고리’를 끊어내는 ‘복음적인 고뇌와 삶의 전환’입니다. 그런, 아브라함과 사라의 삶을 긍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묻혀 버린 인물, 요셉’의 삶을 긍정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요셉의 삶을 이야기 할 때, 그의 삶의 의미를 ‘고난을 이기고 성공한 애굽의 국무총리 요셉’이라는 관점에서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던 그가,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으면서 자란 것이 화근이 되어,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 온갖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고난을 견디어 내었고, 마침내 애굽의 국무총리라는 자리까지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갈등의 전개과정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결코 하찮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온갖 고난을 겪고 난 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이,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의 고난과 눈물의 뿌리가 되었던 형들의 미움과 버림에 대한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풀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인생을 통해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요 뜻입니다.

저는 요셉의 인생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셉이야 말로, 증조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이루지 못한 ‘열국의 아버지’ 사명을 온전하게 이룬 이스라엘의 4대 조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요셉의 용서容恕와 사랑으로 인한 형제들과의 무조건적인 화해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God"s Will)’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역사적인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열국의 아버지’의 삶을 산 요셉과 요셉의 복음적인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배척하고 그들의 역사 뒤편으로 묻어버렸고 감추어버렸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스라엘의 비극이요, 그들이 풀지 못하는 역사적 갈등의 요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들의 역사 속에서 요셉과 요셉의 삶의 방식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요셉과 그의 삶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셉과 그의 용서와 사랑, 화해의 삶을 높인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유대주의적인 목적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와 동일합니다(막 8, 35).

오히려, 그들은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지 못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그릇된 삶을 긍정하고, 자기들만의 조상의 시조요 그 후손이라고 자랑하기만 합니다. 이삭이 블레셋 땅에 거할 때,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이 우물을 팔 때마다 와서 빼앗았습니다. 그 때,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고 그 판 우물을 그들에게 내어 주고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팠습니다. 이삭은 그들과 다투기를 싫어했습니다. 도리어 양보하고 그들에게 우물을 내어주고 또 내어주었습니다. 이삭이 계속해서 그렇게 양보하면서 그들과 다투지 않자,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 하면서 그와 화친을 맺기를 자청하였던 것을 보게 됩니다(창 26, 12-31).

이삭이야 말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 족장 중 그 어느 족장보다 블레셋과 화해하고, 공존을 하면서 하나님의 사람됨을 잘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런 이삭을 우리는 훌륭한 족장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무능한 족장으로 생각했습니다. 이삭은 무찔러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부족사회 속에서, 전쟁을 하지 않았고, 화평을 이루며 블레셋과 공존하는 삶을 실천한 평화적인 매우 훌륭한 족장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우물사건과 그의 평화적인 삶을 귀히 여기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삭의 위대한 복음적인 삶 역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묻혀 버렸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오히려 남편과 장자 ‘에서’를 속인 리브가와 아버지와 형 ‘에서’를 속인 야곱의 길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하고, 따르고 있습니다.

야곱은, 천성적으로 호전적이었고, 전투적이었고, 지고는 못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술수와 거짓으로 아버지와 형을 속였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창 25, 27-34 ; 27, 6-32). 형의 분노를 피해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외삼촌 집에서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정을 이루었고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얍복강씨름에서 이긴 후, 형 에서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끝까지 형의 장자권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만약, 야곱이 형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빼앗았던 장자권을 다시 돌려주었더라면, 이스라엘 역사가 얼마나 복음적인 역사로 새로워지지 않았겠습니까? 아쉽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결국, 야곱의 인생을 보면 네 아내와 그의 열두 아들들로 이루어진 가정은 언제나 대립과 대결, 미움과 반복의 갈등이 소용돌이가 치는 가정이지 않았습니까? 야곱 가정의 분열이 곧 이스라엘 부족과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이었고, 결국은 나라와 민족의 분열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와 같은 족장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갈등과 분열, 다툼의 역사와 문제를 끊어내는 복음적인 삶을 산 위대한 인물입니다. 요셉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의 삶의 이야기가 없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야기의 창세기 는 무의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그 형제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과 용서와 화해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인물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역사 그 어디에는 요셉을 귀히 여기고 그를 역사의 본보기로 중심에 세우는 노력이 없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 가정 속에서, 교회 속에서, 삶의 자리 속에서, 잃어버린 요셉의 ‘복음적인 삶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누군가는, 부모 자식간에 혹은 형제간에 풀지 못하고 얽혀 있는 갈등과 반목과 아픔의 고리를 끊어내고 푸는, 열국의 아버지와 열국의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해 내는 요셉 같은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꼭 나이 많은 어른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는 열국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신 것처럼,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바로 그 사람이 열국의 아비요, 열국의 어미입니다(마 5, 9).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삶 속에서, 갈등과 반목이 일어나는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원인들 중에 ‘오해誤解’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해는, 대게 인간의 교만과 질투, 지혜의 부족, 대화의 부족에서 일어납니다. 정보가 공유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또 서로 간의 가치관價値觀이 다를 때 일어납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에는, 서로의 가치관의 차이에서 일어납니다.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생각이 다르기도 하고 또 일하는 방식方式도 달라집니다. 결국 그와 같은 서로 다른 가치관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가치관의 문제로 갈등이 일어날 때,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예수님의 복음적인 방식인가를 고민하면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십자가를 져야 할 것입니다.

또 제한된 시간과 공간, 재정적財政的인 여건 때문에,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제가 자랄 때, 저희 집은 참 가난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여러분도 잘 이해 못하시겠지만 저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저의 두 가지 별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영국신사’였고 다른 하나는 ‘대나무’였습니다(대나무 같이 성격이 곧다).

제가 자랄 때, 저희 가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밥을 실컷 먹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특히, 큰 ‘양푼’에 밥을 비벼서 먹는 날에는 동생들 생각하느라 거의 제가 가장 먼저 숟가락을 놓아야 했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 이 설교방송을 혹 보실지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동생들보다 조금 먼저 숟가락을 놓고 물러서는 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 큰 놈은 입이 짜르다(입이 짧다)”고 하셨습니다. 저의 속도 모르시고 그러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 앞에서 정말 ‘입이 짧은 큰 아들 노릇’을 해야 할 때도 많았습니다(그러나 지금까지 어머님께는 한 번도 그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없음). 그러나 저는 성장기에 목회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가난하게 살았던 삶이 저와 저의 동생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던 것을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난하였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존경하였고, 그러기 때문에 목사 아들이 또 목사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도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재정적으로 참 많은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전용공간 건물이 단 한 평도 없습니다. 공간적인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많은 교회입니다. 제가 전에 부목사로 사역했던 부산 소정교회가 당시로서는 꽤 훌륭한 ‘최상의 교육관’을 건축했습니다. 연건평 1,080평의 10층 되는 교육관이었는데, 그 때 제 기억은 충격으로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교육관 건축이 완공된 후 입당하게 되었는데, 1,080평의 공간이 없을 때에도 불편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하게 교회생활 했는데, 1,080 평의 공간이 새로 생겨난 지 한 달도 채 못 되어서, 교육관과 모임 장소가 부족하다는 교인들의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모임들이 대부분 주일에 집중되었고 그것도 가장 좋은 시간에 서로가 공간을 쓰겠다고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일 이외에는 그 넓은 교육관이 언제나 텅텅 비어 있는 죽은 공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이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40억 가까운 적지 않은 예산을 집행하고 있지만, 우리의 씀씀이가 어느 부서 누구에게나 넉넉하지 못합니다. 연초에 편성된 제한된 범위 안에서 살림을 살아야 하는 지혜와 양보가 필요합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을 때, 회피하거나 혹은 공격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아브라함의 전철이나 리브가의 전철이나 야곱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서로 간의 대화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화해적인 방식으로 갈등을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브라함 식으로 아내와 자식을 내어 버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리브가처럼 자기가 편애하는 야곱과 공모해서 남편 이삭과 장자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채서도 안 됩니다. 야곱처럼, 그릇된 방법으로 빼앗은 형 ‘에서’의 장자권을 돌려주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화해하는 정도로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특히, 대화를 통해서 관계가 회복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로 남아 있는 재정적인 문제나 부동산이나 재산, 또는 다른 권리와 관계된 실재적인 문제점에 대해서는 서로의 견해차를 좁히는 ‘지혜로운 협상’이 필요합니다. 이 협상 과정에서 타협점을 찾아서 갈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한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虛榮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했습니다(빌 2, 3-4).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요셉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요서를 구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마음이 아파서 통고하는 심정으로 형님들에게 말합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에 던져진 형들과의 갈등의 문제를 용서와 사랑, 화해의 방식을 풀었습니다. 그와 같은 요셉의 갈등해결방식은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셨던 열국의 아비되는 삶을 살아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형들에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代身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 19-21).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있는 갈등 앞에서, 혹 지금 내가 품고 있는 욕심 때문에, 요셉의 용서와 사랑 그리고 화해와 공존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아브라함과 리브가와 야곱과 같은 삶을 살더라도 내 욕심을 채우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요셉과 같은 복음적인 삶이 회복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기대에 응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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