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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로 기도를 하면 (출 32: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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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종화 목사 (경동교회)

<구약의 말씀: 출애굽기 32: 7 ~ 14>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어서 내려가 보아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의 백성이 타락하였다. 그들은,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이렇게 빨리 벗어나서, 그들 스스로 수송아지 모양을 만들어 놓고서 절하고, 제사를 드리며 '이스라엘아! 이 신이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너희의 신이다' 하고 외치고 있다." 주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이 백성을 살펴 보았다. 이 얼마나 고집이 센 백성이냐?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말아라. 내가 노하였다. 내가 그들을 쳐서 완전히 없애 버리겠다. 그러나 너는, 내가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모세는 주 하나님께 애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주께서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주신 주의 백성에게 이와 같이 노하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 사람이 '주가 자기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그들을 이끌어 내어, 산에서 죽게 하고, 땅 위에서 완전히 없애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려 하십니까? 제발, 진노를 거두시고, 뜻을 돌이키시어, 주의 백성에게서 이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모든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어서, 영원한 유산으로 삼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이렇게 간구하니, 주께서는 뜻을 돌이키시고, 주의 백성에게 내리시겠다던 재앙을 거두셨다.

<서신서의 말씀: 골로새서 4:2 ~ 4 >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게 하시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로, 이 비밀을 분명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서 11:5 ~ 13 >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할 때에, 그 사람이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친구라는 이유로서는, 그가 일어나서 청을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여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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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누가복음 말씀에 보면, 예수께서는 진실하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매달리면 그 요구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당시 백성들의 생활상을 실례로 들어 설명하십니다.

유대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아서 단칸방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방이 하나에 부엌이 하나 있습니다. 낮에는 이불을 개고 방을 활동공간으로 쓰고, 밤이 되면 3대가 되든 4대가 되든 온 식구가 한 방에 모여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막 잠들 시간인데, 친구 하나가 문을 두드리면서, “갑자기 친구가 찾아왔는데 먹을 게 없으니 먹을 것 좀 꿔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예를 들면서 그럴 경우 친구 때문에는 주지 않더라도 너무나 조르면 귀찮아서라도 할 수 없이 먹을 것을 꿔주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그러면서 자식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부모가 없듯이, 사람이 조르는데 하나님께서 왜 좋은 것으로 주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려면 조르라는 뜻입니다. 한번만 하지 말고 여러 번 요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얻고 싶으면 기도로 조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조르면 되는지, 무슨 내용을 가지고 졸라야 하는지에 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라고 하는 것은 혼잣말이 아니고 대화입니다. 누구와 대화하는 것입니까? 하나님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응답을 하시든지 거부하시든지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뭔가 간절히 바라는 걸 놓고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 조르면서 대화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은 대화의 필요성도 없을 뿐더러 조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였습니다만, 왜 모여서 공동기도를 하고 대표기도를 하고 중보기도를 하고 혹은 각자 기도를 합니까? 기도를 들어줄 분, 대화할 분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고 그분이 바로 제가 간절히 조르는 것을 주시리라고 믿기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있지도 않은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시기에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서를 읽으면서 두 가지를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 가운데 한 가지는 모세한테 스스로를 밝히신 방식입니다. 모세가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해방시키라고 하시는데,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당신의 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당신은 누구냐는 물음입니다.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사람이다. 이게 모세에게 주신 답변입니다. 좀 전문용어를 쓰면 ”나는 자존(自存)하는 신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과 상관없이, 이스라엘과도 상관없이, 자연과도 상관없이, 아니 우주 삼라만상과 아무 상관없이, 혹은 너희들이 원하고 아니 하고와 상관없이, 욕하든 칭송하든 상관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모든 것과 무관하게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로소 이스라엘은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누구한테 해야 합니까? 우리와 상관없이 홀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는 기도가 무의미합니다. 기도를 들으실 필요도 없고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할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와 무관하게 스스로, 홀로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기도하느냐 하면, 스스로 홀로 존재하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자존하시면서도 동시에 당신이 만드신 인간과 스스로 창조한 세계와 함께 공존, 공생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모든 역사를 끌어안고 인간과 함께 고민하고 즐거워하고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에게 의문이 생겼습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와 함께하신다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내가 자유를 원했건만 나에게 왜 이렇게 속박을 주십니까? 풍요롭기를 원했는데, 왜 이렇게 가난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까? 그래서 분노하고 좌절한 사람들은 우리가 기도할 그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신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없다.” 그것을 우리는 무신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무신론을 믿던지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스스로의 방식대로 존재하십니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주시고, 고난에 처할 때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시기에 너무 기뻐서 매일 찬송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늘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유신론입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별 관심도 없다는 입장은 불가지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여튼 뭐라고 이야기하든지,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든지 안 계신다고 하든지,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하든지 아니라고 하든지,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계시기도 하고 안 계시기도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분은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과 함께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이야기의 출발입니다.

우리와 함께하려하시는 하나님, 공생하고 공존하시려는 하나님,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그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를 신앙적인 용어로는 기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기도하여라. 너와 대화하고 싶다.” 그것이 하나님의 제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대화를 합니다. 조르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찬양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평불만을 쏟아내기도 합니다. 다 대화입니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신뢰입니다. 비즈니스를 하는 분들이, 무역을 하든지 국내에서 도매, 소매를 하든지, 어떤 경우에도 제일차 조건은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거래하는 두 사람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뢰관계가 없이는 구매나 판매 상담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신뢰관계가 없이는 제자와 스승, 부모와 자식, 이웃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남북 회담을 아무리 해본들 상호간의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끌어낼 수 없습니다. 6자회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뢰라는 말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 기도를 제가 믿는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하나님도 제게 신뢰를 보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신하면 제가 아무리 장광설을 늘어놓은들 하나님이 들어주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믿는 만큼 하나님도 저를 믿어주십니다. 믿음이 있을 때, 신뢰가 전제될 때 진실한 대화가 가능하게 됩니다.

이런 진실한 대화가 없이,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불평할 필요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진실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공존하시려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반드시 들어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아니 공존하시는 두 번째 방식은 말씀으로 공존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인간 역사의 시작 전부터 하나님, 곧 공존하시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셨다는 뜻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 하나님은 말씀!

말씀이 뭡니까? 입에서 나오는 언어가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말씀은 역사입니다. 말씀은 사건입니다. 말씀은 뭔가를 이루는 행동이지, 입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저는 이 사실을 신학적으로 많이 가르치고 배웠는데, 최근에 와서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탄핵정국이 이제 풀렸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오늘 홍 장로님 기도대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헌법재판소가 탄핵사유가 성립되지 않음을 밝히면서도, 대통령이 선거와 관련해서 한 말은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고 사건이고 역사입니다.

인간 가운데 하나인 대통령의 말도 사건이고 역사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그분의 말씀은 그대로 역사입니다. 세계를 뒤집기도 하고, 벌을 주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역사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서 말씀은 그냥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학적 분석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인간 역사가 총체적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말만 많이 하고 실천하지는 않으니까, 여러분이 잘 아시는 문호 괴테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태초에 행위가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성서의 말씀을 뒤집어본 것입니다. 그 말에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기독교는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적극적으로는 말씀 자체가 본래 행위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위였습니까? 요한복음 1장에 보면, 14절로 내려가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존재하는 신이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제 하나님은의 인간의 육신을 입은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사건이 되신 그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육신이 된 말씀의 권위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들어” 기도를 합니다. 예수 이름이 가진 신뢰성에 우리의 기도를 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인간이 이제는 많이 알고 힘도 있고 그러다 보니 슬그머니 하나님이 되고 싶은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대통령 탄핵 사태가 왜 생겼습니까? 솔직하게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싶은, 신적 권능을 행사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분출된 측면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이 세상에 왜 전쟁이 벌어지고 수많은 압제와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습니까? 총, 권력, 돈, 지식을 가지면 절대적이 되고 싶어 하는, 신이 되고 싶어 하는 속성이 우리한테 있습니다.

성서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선악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생명나무 열매는 마음껏 먹되, 선악과는 절대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인간은 인간의 한계 안에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이 될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한계를 그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홀로 계시기 위해서? 자존만 하시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을 인간이 최대한 즐기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아름답고 재미있습니다. 저는 인간이 만약 신이 된다면 정말 재미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파이프 오르간으로 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피아노로 대신하니깐 예배 분위기도 다르고 아쉽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오르간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습니다. 항상 있을 때는 그냥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없으니까 아이고 귀한 것이었구나 싶습니다. 빨리 고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어쨌든 오르간이 250년 간다고 하는데 그래도 불완전합니다. 전기 나가면 안 되고 뭐가 고장 나면 안 되고. 오르간이 완전하고 신적인 기계라면 고장 날 리가 있겠습니까? 신적인 기계라면 그냥 언제나 그 소리겠지요.

인간이 신이라면 얼마나 재미없겠습니까? 인간의 삶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재미있습니다. 생명의 연한을 얼마를 주셨든 간에 그 생애 동안에, 불완전하지만 웃음도 있고 울음도 있는 인간의 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불완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완전은 좋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완전하다면, 공상과학 영화에서 보는 대로 버튼 하나 가지고 세상만사를 다 해결한다면,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아름답게 지으셨습니다. 인간의 삶 속에는 참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평생 동안 최대한 활용하기를 바라십니다. 신이 주신 은총을 가지고 인간을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선악과 이야기는 인간의 영원한 이정표입니다. 신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려고 하는 사람이 세상의 권력과 돈과 지식을 다 가진다고 해보십시오. 반드시 독선과 독재가 생기고 억압과 착취가 들어섭니다. 타락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주신 모든 능력과 은총은 하나님의 지배 하에 있어야 올바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신이 없이 인간이 신이 되려는 것은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초래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그 사실을 깨닫고 해야 합니다.

예를 한 가지 들겠습니다. 저는 가끔 배가 아플 때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이 먹어서 위장이 소화할 수 있는 분량을 초과했거나, 좋지 않은 음식, 부패한 음식이 들어가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 위장이 어떻겠습니까? 위장이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어라 하겠습니까? 소화시킬 수 있을 만큼만 들여보내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불량식품 말고 입에 단 것만 말고 몸에 좋은 것을 보내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 입은, 제 욕망은 위와 상관없이 미각과 포만의 탐욕을 채웁니다. 그러면 반드시 탈이 납니다. 위장에 탈이 나면 제 몸 전체가 괴롭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기도는 다 들어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러나 소화할 수 없을 만큼 들어주시지는 않습니다. 인간에게 최대 행복은 주지만, 행복이 넘쳐서 썩을 정도로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말로서 기도하지만 우리가 하는 말은 반드시 책임 있는 말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하나님을 향한 모든 말은, 저로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어딘가에 다 녹음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자유롭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인간을 향해서도 말하는 자유는 다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다가 엉뚱한 일을 당하면서 운명의 장난인가, 신의 장난인가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가 말한 대로 거두는 것 같습니다. 어쨌든 말에는 자유가 있습니다만, 그 말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 기도는 진실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한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기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듯이 너희가 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든지 간에 나는 반드시 좋은 것을 주겠다. 나는 성령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배가 고파서 밥 한 그릇 달라고 했더니, 밥 한 그릇이 아니라,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근본을 해결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괴롭습니다.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뭡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괴로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시되 이런 방식으로 주십니다.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 말로 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닙니다. 말씀이 사건이요 삶이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숨쉬고 살아가는 한, 우리는 항상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공생공존하고 싶으면 기도하십시오. 진실하게! 하나님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싶다면, 하나님과 함께 살고 싶다면, 하나님 안에 살고 싶다면, 기도하십시오. 진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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