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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가족 (엡 2: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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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 김성덕 목사 (내일교회)

21세기는 고도의 기술, 지식, 정보사회로 다변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 21세기는 고도의 정보와 지식 사회입니다.

21세기는 정보와 지식이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는 사회입니다.
21세기는 나라와 기업들이 정보의 우열로 경쟁합니다.
중세의 봉건 영주들이 토지 점령하듯이
Cyber Space를 누가 먼저 점령하느냐가 미래사회의 강자로 나타납니다.
빌 게이츠의 <미래로 가는 길>에 보면
불과 몇 년 사이에 PC수첩이 상품화 되어
달력, 스케쥴, 메모, 사전, 시계, 전화 그리고 네비게이션
심지어 열쇄, 전자화폐까지 다 내장되어 나오면
이 수첩 하나만 가지고 다니면 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는 문명의 이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이버 섹스, 사이버 환각과 같은 감성, 쾌락주의가
20세기의 원자탄만큼이나 이 시대의 정신적 파괴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그로벌 시대가 펼쳐지면서
반대 급부적으로 21세기에는
가정의 몰락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심각한 사회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미국이 90년대 들어 이혼율이 50%에 육박 - 세계각국의 공통된 현상
우리나라도 이미 이혼율이 25%를 넘어서고 있으며
여성의 사회적인 역할이 신장되는 것과 함께 이혼 가정이 급격히 늘고 있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해 주는고 하면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개념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가족개념의 붕괴가 사회적인 심각성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치명적인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의 가장 시급한 회복이 있다면
교회가 성경에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와 같이
성령 공동체 예수 공동체 즉 하나님의 가족 개념의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본래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무할례 자들이었으며
영적으로도 그리스도와 무관한 자들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 나라 밖에 속한 자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무지하고
구원의 언약들에 대하여 아무런 분깃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믿고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를 힘입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올 수 있는 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회복과 하나님 가족이 누리는 축복이 무엇인지 깨닫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1. 본문말씀은 한 마디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
이 말은 앞서 11-18절까지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제는 -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졌습니다.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란 말에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성도들에게 임한
구원의 영광스러운 측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그리고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권속 즉 하나님의 가족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럼 에베소 교인들같이 이방인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었습니까?

본래 우리는 어떤 자였습니까? 11절에
[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
우리의 이전 상태는 어떠했습니까?
11절에 "그러므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받은 은혜를 알려면
우리가 이전 죄와 멸망가운데 있을 때의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은혜가 어떤 줄을 알고 진정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이었습니다.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유대인들은 할례받은 민족이라는 사실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경멸할 때 쓰는 말 중의 하나가
[ 할례받지 못한 자들 ]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던진 말도 그것입니다.
이방인은 어떤 자들입니까?
여기서 바울은 이방인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에
[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

1) 이방인은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는 멸망 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암이 왜 무서운 병입니까? 결국 죽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 삽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의 구원이 있습니다.
평안이 있습니다. 온갖 복된 것이 다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볼 때에 사람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노아 홍수 때에 보면 사람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그가 잘 났든지 못 났든지 중요한 것은
그가 방주 안에 있나, 밖에 있나가 구별합니다.
방주 밖에서 잘나고 똑똑하고, 사업 잘해서 부자되고,
공부 많이 해서 학, 박사가 되었다할지라도
그것이 노아의 홍수같은 마지막 심판 때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합니다.

2) 이방인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아닙니다.

3) 이방인은 약속의 언약에는 외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에는 얼마나 위대한 약속들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발견하면
이 모든 약속들이 다 내게 하신 약속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마다 제대로는 소망이 다 있습니다.
그 꿈을 이루어 가는 재미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상 소망은 뜬구름 같은 소망이라고 합니다.
단테는 말하기를 지옥의 입구에는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고 쓰여져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5) 이방인은 하나님이 없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이 삶 가운데 가장 불행한 것입니다. 부모형제 없이는 살아 갈수는 있지만, <4>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은 창조주를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생명의 근원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맙시다.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이방인이었으면 우리들은 아닙니까?
우리들도 같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성경이 여기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13절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이제는] 앞에 한 단어가 빠졌습니다. [그러나]가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2절의 하나님도 없는 약속과도 상관없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던
[ 그때 ] 와 비교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와 가까워 진 것을 말합니까?
이제 전에 멀리 있던 이방인들도 하나님과 가까워 진 것을 말합니다.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화목제물 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졌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말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 특히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믿고 나면 우리의 신분이 달라집니다.

19절에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천국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합니까?
만약 팀이 없는 축구선수, 소속 부대가 없는 군인,
오케스트라가 없는 콘드라 베이스 연주자, 가 있다면 참 딱한 친구지요. 그런데 교회에 소속하지 못한 교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란 교회의 Merber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본래 영어에 <Member ship> 이란 말 기독교에서 처음 유래된 말인데 
지금은 세상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Member ship 이라면
회비나 내고 회원된 걸로 만족하며
그리고 행사에 참여하고
악수하고 헤어지는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멤버십에 대한 개념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다는 것은 교회의 멤버가 된다는 말이고
교회의 멤버가 된다는 말은
어떤 기관에 사무적으로 속하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살아있는 몸의 한 중요한 기관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을 회복해야 합니다.
롬12:5절「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고전12:27에「너희는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몸에서 분리된 어떤 지체도 원래의 창조된 목적의 기능을 상실할 뿐 아니라 빠른 시간 내로 말라죽게 됩니다.
교회에 소속되지 아니한 교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교회 출석한다고 다 교회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몸을 한번 생각 해 보세요.
각 지체가 몸에 붙어 있어 서로 간에 헌신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손이 음식을 집어 입으로 넣습니다.
맛은 혀가 다 봅니다. 그리고 말은 제일 많이 합니다.
그렇다고 어휴~! 조! 혀, 하면서 손이 멈춥니까? 그렇지 않지요.
만약 혀가 없다고 해보세요.
한번은 우유를 먹다가 남은 것을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가 마시는데
아무생각 없이 마시다가 우악~! 합니다. 왜? 맛이 가버렸어요.
만약 혀가 없다면 맛을 모르니
그냥 꿀꺽 꿀꺽 마셨다 해보세요. 끔직 하지요.
우리 각 지체는 서로서로 헌신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간에 헌신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아니하다면 교회에 출석해도 진정한 교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합니다.
내가 교회 안에 헌신적인 교제관계를 맺고 있지 아니하다면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 아닌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교회에서 여전히 손님 같이 출입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심지어 직분자가 되어도 여전히 손님 또는 구경꾼으로 출입합니다.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란 말을 어떻게 받아 드리는가 입니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권속 곧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 교회가 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에 대해
그렇게 공감을 느끼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는 가족이란 말에 눈이 뜨여지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 가족이란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속에서도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하니
가족 개념보다 문중 개념이 듭니다.
더군다나 가족이란 <오이코스>인데
딤전3:15절에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이 집은 이라고 번역해 놓으니
교인들이 교회라고 하면 자꾸 건물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이코스>란 말을 집으로 번역하지 않고 가족이란 말로 번역했더라면 교회라고 하면
교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다 라고 생각하며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것이 아닙니까?
딤전3:15절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냐?는 것을 밝혀주는 말입니다.
교회가 무엇이 되어야 교회의 사명을 다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교회가 무엇이 되어야 하느냐?
딤전3:15절을 영어성경(센츄리 번역)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읍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다.
그 가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며
진리의 받침이며 기초이다」라고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인이 된다는 것을
교회 체제에 순응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교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몸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우리 서로가 헌신적인 관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가리켜
16절에「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라고 감탄합니다.
여기에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숨기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고 교인이 되었다는데 이렇게 감탄을 해본적이 있습니까?
내게 이런 감탄이 없었다면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질 때에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건 비밀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여기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데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러나 결코 값싼 은혜도 아니요
그렇다고 우리가 멤버십 회비 내듯이 헌금을 드려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데는 거쳐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것에 덧붙여 바울은 교회를 건물로 비유합니다.
20절에 [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
터란 곧 기초의 문제입니다.
터는 겉으로 드러난 부분이 아니라 소홀히 여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건축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가족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위에 세워졌다 합니다.
여기에 사도들과 선지자들이란 말은 바로 성경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 위에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우리끼리 친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기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모퉁이 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의 모퉁이 돌은 약 12m나 되는 거대한 돌이었다고 합니다.
모퉁이 돌은 견고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견고한 반석이십니다
여기에서 모퉁이 돌의 역할은 연결입니다.
모퉁이 돌이신 예수와 그 위에 돌들이라 할 수 있는 성도가 이어져
성전을 세워 가는 것입니다.
하나로 연결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모퉁이 돌이신 예수와 연결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연합을 말합니다.
그러니 계속적으로 내가 확인해야 할 것은
내가 예수께 잘 붙어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이 일에 실패해 버리면 나는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까? <8>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먼저 영광이 따르게 됩니다.
21절 [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
그의 안에서 - 주안에서 - 예수 안에서 란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 안에서 서로 서로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건물마다 하는 말도
<오이코도메> 란 말로 가족이란 말 <오이코스>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가족들이 서로 연결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갑니다.
왜? 바울이 신약에서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성전이라는 말을 사용합니까?
구약에 성전이라면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서
거룩과 영광을 떠올리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가족들이 서로 서로 연결되어져
하나님의 성전같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에베소서의 주제는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질 때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 우리가 교회가 되고 교인이 된다는 것
그 자체가 헌신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 참여를 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
이와 같이 교회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은
그 어떤 헌신도 대가가 없는 헌신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 대가의 가치에 눈이 뜨여질 때 기쁘게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 은혜를 체험한 성도가
찬송가 513장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의 가족이 되면 어떤 혜택이 주어집니까?

1)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됨으로 진정한 신자라 불리워 집니다.
근간에 인턴이란 말 많이 사용하지요.
인턴 사원이라면 견습사원을 말합니다.
내일교우 여러분 - 인턴 신자로 너무 오래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행11:26절에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큰 무리를 가르칠 때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전까지는 이들이 무엇하는 사람들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은 안디옥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속해짐으로
주위 사람들 보기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 크리스티아누스 라해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또는 그리스도 편에 선 사람입니다.
그러니 교회만 다닌다고 다 교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속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소속된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칭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2.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됨으로 도움과 격려를 주는 영적 가족을 얻게 됩니다.

지난번 이산가족 찾기에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찾으려고 애를 씁니까?
사람은 가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게 본능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영적 본능은 영적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지 아니하고는
그 신앙이 건강하게 균형있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갈6:2절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서로 짐을 지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사랑으로 짐을 서로 질 때에 온전해 질 수 있습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 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단순히 모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나누고 선행을 격려하는 모임 바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모이는 것을 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3.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됨으로 더 온전하고 성숙한 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교육에 문제가 있는 것은 생각의 훈련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사고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생각에는 3가지 생각이 바로 되어져야 인격적인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논리적 생각, 예지적 생각, 관계적 생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논리적 생각이 발달되어
질서정연하여 말도 잘하고 남을 잘 가르치기는 하는데
어떤 사람은 예지적 생각이 발달되어 앞을 내다보는 힘이 있어
사업에 돈을 잘 벌기는 하는데
관계적 생각이 훈련 안되어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상관이 없는 사람 있지요.
사람은 관계적 생각이 발달되어야만 인간관계가 원만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성경공부 제자훈련 한다고 <10>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의 현장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인 예친모임인 것입니다.

4.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됨으로 사탄의 세력에서 영적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 떼 같이 때로는 광명한 천사 같이
택한 자라도 집어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소속이 못되고 신앙생활 하는 교인 사탄의 공격 제1호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바울의 강조는
21절에 [ 성전이 되어가고 ]
22절에 [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저 가느니라 ] 합니다.
중요한 것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완성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것으로 되었다 라는 존재 인식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되어져 가는 원리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신학적 인간론에서
인간을 Being(存在)이라 하지 않고 Becoming(存在化)라 하는 것은
인간은 현재 완료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목사로 안수 받았기 때문에 목사가 된 것이 아니고,
장로로 임직을 했기 때문에 장로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목사가 되어져 가고 장로가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결혼을 했기 때문에 남편이고 아내가 된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남편이 되어져 가고 아내가 되어져 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교회는 계속 부흥하고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체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아닙니다.
뒤로 퇴보되어서는 더욱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이제부터는 그렇게 사명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나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퇴보하거나 정체되어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함께 지어져 간다 ] 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언제나 '주안에서' '함께' 입니다.
종이 한 장은 새끼손가락 가지고도 찢어지지만
철판이나 나무판을 의지하고 있으면 주먹으로 쳐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우리가
함께하면 세상이 결코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일교회는 행복한 교회입니다.
사실 행복하기 때문에 행복한 교회 라기 보다
계속해서 행복해 지는 교회라는 말인 것입니다.
결코 여기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제부터 하나님 가족으로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영적인 건축물로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되어져가는 존재로서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부지런히 살펴야 합니다. 확인하는 길은
교회 안에 예친이든 혹은 봉사를 위한 그룹이든 참여해야 합니다. 주일예배만으로는 연결을 확인하기 힘듭니다.
만약 깊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자연히 공동체와 멀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함께 지어져 가는 ”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기 함께 라는 개념을 잊어버리면 교회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양한 돌로 건물을 짓는다는 것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기계로 찍어낸 벽돌이 아닌
미성숙의 특징은 생각 나름대로 표현하고
생김새가 다양한 돌들을 서로 끼어 맞추며 쌓았습니다.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성숙하지 않으면 서로 서로가 불편합니다.
자기의 감정 그대로 얼굴에 써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자기의 소리를 절제하는 법을 배웁니다.
함께 라는 말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 바꾸어 나와 맞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어 너와 맞추어 가야 합니다.
상대를 바꾸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주권적인 사역입니다.
문제가 전혀 없는 교인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문제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런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주는
교인들이 많이 있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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