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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일의 주인 (눅 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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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경향교회)

우리가 어릴 때 자라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마도 ‘안돼’ 혹은 ‘하지 말아’ 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우리의 어린 시절의 일과라는 것은 ‘학교 지각하면 안돼.’로부터 시작되어,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 혹은 ‘떠들지 마라.’는 소리를 하루 종일 듣다가, 저녁에 집에 와서도 ‘밖에 나가 놀면 안돼.’라든지 ‘늦게 자지 말아라.’는 말 듣는 것으로 끝나곤 했었던 것 같습니다.

부모나 선생 중에서도 이처럼 ‘안돼 / 하지 말아’라는 말로만 아이들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듯이, 신앙생활 역시 그 ‘안돼’와 ‘하지 말아’는 말로만 가르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리새인들이 이 ‘안돼 / 하지 말아’의 원리를 제일 많이 써 먹은 분야가 바로 안식일 성수라는 과목이었습니다. 이들이 만들어낸 ‘미쉬나(Mishinah)’, 즉 신약성경에 ‘장로들의 유전’이라고 불리고 있는 구전들 중에서 아예 한 권 전체가 안식일 성수에 관한 자질구레한 규례들로만 가득 채워져 있을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바리새인들은 ‘해서는 아니 될 것’들만 잘 지키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착각이요 심각한 오해였습니다. 세상의 아이들 교육에서도 그렇듯이, ‘안돼’와 ‘하지 말아’로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는 결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깨우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안식일 성수를 전혀 융통성 없이 딱딱한 율법주의의 틀에 고정시켜 버렸던 바리새인들 앞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안식일에 ‘할 수 있는 일’과 꼭 ‘해야 할 일’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기록된, 이 ‘주일에 하는 일’ 두 가지들을 함께 상고함으로써, 주일 성수를 정말 바로 할 수 있는 법을 배우고자 합니다.

1. 자기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일은 주일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첫째 사건이 바로 이 원리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절로 5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음」으로써 발단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사람의 밭에 있는 것을 지나가면서 잘라 먹는 것이 ‘서리’에 해당되는 나쁜 일이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명기 23장 25절에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즉 남의 곡식밭에 있는 것을 대량으로 잘라 가면 도둑질이 되는 것이지만, 배고픈 가난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는 허락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역시 예수님 제자들의 행위를 두고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요지는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판단에 의하면 그 제자들이 한 일은 적어도 네 가지 종류의 ‘일’들에 해당되었습니다. 이삭을 손으로 잘랐으니 이는 추수한 것이고,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이며, 껍질을 입으로 불었을 터이니 이것은 바로 키질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이 모든 일들은 또한 음식을 장만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 네 가지는 바리새인들의 규례에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들로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는 것 중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지나가면서 이삭 잘라 먹은 것을 두고 이처럼 대단한 ‘노동’들을 했다고 정의를 내리는 것 자체도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께서는, ‘내 제자들이 한 것은 일이 아니다.’라고 그들에게 변호하려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에 다윗이 했던 일을 예로 들으셨습니다.

성막 안에 차려지는 진설병은 원래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명백한 규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시장하여 먹을 것을 찾았을 때에 제사장 아히멜렉은 자기 수중에 있던 그 진설병을 내어 주었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받아먹었습니다. 진설병을 제사장 아닌 사람이 먹는다는 그 자체는 분명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그 때 그 자리에 있던 음식은 그것밖에 없었다는 상황이 그와 같은 행위를 범법이 아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게 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이삭 잘라 먹는 것은 일이 아니다.’라고 대답하는 대신에 ‘그것이 일이라 할지라도 그런 비상시에서는 제4계명을 범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노동하지 않는 것이 주일 성수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기본 사항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명령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일할 수 없다.’라는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초대 교회 신자들은 전부가 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았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들은 주일이 아직 법정 공휴일이 아닐 때부터 주일을 정기 예배일로 정하여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낮에는 일하고 밤에 모여 주일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유대인 출신의 초대 교회 신자들의 경우에는 오늘날의 토요일에는 다른 유대인들과 같이 일을 쉬고, 주일에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 예배드리는 식으로 지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초대 교회 신자들의 주일 성수에 대하여 비난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일날 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때에는, ‘엿새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을 주일에 함으로써 예배 생활에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정을 미리 조절하든지 아니면 주중에 좀더 열심히 함으로써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주일에 하는 것은 분명히 주일 성수를 범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돌보아야 되는 경우라든지 군인이 전투 중에 복무하는 따위의 일들은 분명히 주일에도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우에도 근무 후에 주일 밤예배에 참석한다든지, 전장에서 혼자서라도 예배드림으로써 최선을 다하여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할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을 잘라 먹었지만, 그날 예배드리지 않았을 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주일을 ‘온전히’ 지키면서 직장 생활할 수 있는 길을 찾도록 전심으로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과연 어떤 일들이 주일에도 허용되는, 생계에 꼭 필요한, 예외나 비상사태에 해당되는 일인가?’하는 것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신자들이 각자의 신앙 양심을 따라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정말 중생 받은 양심은 이 문제에 대하여 스스로 올바르고도 진실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일 성수 문제에 대하여 바리새인적인 비판을 할 필요도 없고, 또한 자신의 피치 못할 사정을 두고 불필요한 양심의 가책을 가질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우리 주님께서는 ‘신자가 주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굶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으며, 또한 동시에, 신자가 주일을 지키기 위하여 일을 쉰다고 굶어 죽게 만들지도 않으실 것임은 틀림없습니다. 주일성수를 위해서는 일단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먼저 충실히 지키는 가운데, 생명 유지에 필요한 급한 일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양심의 판단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법에 걸리지 않으려 하는’ 주일성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주일성수를 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선한 일과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주일에 ‘꼭 해야 할 일’입니다.

안식일에 못할 일만 찾아 혈안이 되어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각도로, 아니 원래 제4계명에 가장 뚜렷이 명하고 있던 바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본문 누가복음 8장 6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고 했습니다.

이 일은 「또 다른 안식일」에 있었습니다. 여느 안식일처럼 예수님께서는 ‘회당’ 예배에 참석하셔서 설교하시면서 그 안식일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 한 명이 자리에 있었습니다. 여기 ‘손이 말랐다’라는 표현은 오늘날로 말하자면 발육 부진 증세가 있어서 손을 못 쓰는 상태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았지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회당 안에 예수님과 그 병자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는 그 상황 하나만 보면서도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하고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엿보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의 사고 속에는 불치의 병자를 고쳐 준다는 것이 얼마나 좋고 기쁜 일인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감정도 없었고, 오로지 안식일 성수라는 명목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걸고 넘어뜨릴 고소거리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안식일이 거룩하고 복된 날이 아니라, 남을 해할 기회로 사용되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속을 이미 다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선수를 치셨습니다. 그 손 마른 병자를 일으켜 한가운데 세우시고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그들에게 기습적인 질문을 던지신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양자의 중간을 선택의 여지에 포함시키지 않고 계시는 것을 유의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것과 행하지 않는 것’ - 이렇게 묻지 않으시고,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곧 악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생명을 구할 일이 있는데도 그것을 행치 않는 것은 바로 생명를 멸하는 것고 꼭 같다.’라고 정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을 하지 않는 것’이 안식일 성수의 전부로 알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는 일, 해서는 아니 되는 일들만 잘 기억하고 그런 일들을 하지 않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 성수에 만점이 되는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은 ‘반드시 해야 할 일 - 선한 일,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하는 날이며, 이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을 때 그것이야말로 ‘악을 행하는 일이며 생명을 멸하는 일’이라고, 그야말로 안식일을 골라서 죄짓는 행위나 다름없다고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물론 그 병자를 고치는 일, 즉 ‘선하고도 생명을 구하는 일’을 즉석에서 행하심으로써, 그야말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역시 안식일에 ‘삼십 팔년 된 병자’를 고쳐 주신 사건이 있습니다. 그 선하고도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끝내신 후에는 지금까지 내내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고 놀고 계시는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하신 구속사를 통하여 끊임없이 선한 사역, 생명을 구원하는 일들을 계속해 오고 계셨습니다. 그러니 성자 하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이 땅에 계실 동안에도 날마다 행하셨던 것이며, 더구나 안식일이야말로 그런 선한 일하기에 가장 적절하고도 마땅한 날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정말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 주일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날이 더 낫겠습니까? 이 주일 하루 동안도 아무 선한 일 하지 않고 넘기면 남은 일주일 중에 과연 어느 날 우리가 마음잡고 선한 일 하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주일에 우리가 일상생활의 일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날은 우리가 꼭 해야 할 선한 일들, 생명을 구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은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 - 우리가 꼭 해야 할 선한 일이며 자신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도와 교제하는 것 - 이것 역시 선한 일이며, 때로는 피차의 생명을 구하는 일도 될 것입니다. 함께 봉사하고 심방하고 전도하는 것 - 두말할 것 없이 주일날 가장 하기 좋은 선한 일이며 남의 생명을 구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못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주일날 죄를 짓고 생명을 죽이는, 그야말로 ‘주일을 불경하고 악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일 성수에도 그 중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성수를 하느냐 아니면 주일날 특별히 죄를 더 짓느냐, 둘 중에 하나를 택하게 될 따름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옳으냐?」 -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때 그 대답을 모를 사람이야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조차 그 대답은 알았습니다. 단지 어떤 것이 옳은지는 알면서도 그렇게 지키기를 거부했으며, 그렇게 지키는 예수님을 향하여 오히려 분기탱천해하며 죽이려고 모의를 꾸몄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이처럼 뻔뻔스럽고 악하기 짝이 없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버젓이 저지르는 행위가 되는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일에 무엇을 하면 안 되는 것일까?’라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주일에 내가 꼭 해야 할 선한 일, 생명을 구하는 일들이 무엇일까?’라고 찾아서 행함으로써, 절로 주일 하루 종일을 거룩한 삶으로 가득 채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라는 생각만으로는 결코 주일을 거룩히 지킬 수가 없습니다. 주일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며 그 무엇보다도 ‘꼭 해야 할 일’들이 있음을 기억해야만 우리는 제대로 주일 성수를 할 수 있습니다. 즉 부정적, 수동적으로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능동적으로 주일성수를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십계명의 제4계명 자체를 부인하거나 수정하신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신 것은 이 계명에 관하여서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능동적으로 ‘거룩히 지켜야’ 하고, 수동적으로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십계명에서 가르치는 두 가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제대로 지키게 하기 위하여, 특별히 그 첫 번째 원리, 바리새인들이 철저히 무시했고 오늘날의 신자들이 자주 간과하기 쉬운, 이 훨씬 더 중요한 ‘능동적인 주일 성수의 원리’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깨우쳐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일은 평상시 엿새 동안에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이 생계에 필수적인 일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주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선한 일을 하려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선언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약의 신자들도 이것을 잊지 말아야 만이 정말 주일을 거룩히 지킬 수 있습니다. 사람이 이 주일의 주인을 제대로 알게 되고 그 분과 만나 교제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그 주님과 만나는 주일이 절로 기다려지고 자연히 그날은 열 일 제쳐 놓고 온종일 그 주님하고만 시간을 보내고 싶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즐거이 지내는 것 -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주신 목적이었습니다. 천지 창조하실 때 사람은 제6일에 제일 마지막으로 만드셨고 바로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바꾸어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주말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점에 사람이 창조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시며 쉬시는 바로 그날부터 ‘사람이 당신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부러 천지창조의 스케줄을 그렇게 짜 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하지만 않았더라면 일주일의 모든 날이 바로 안식일이 되었을 것이지만, 타락 이후 엿새는 일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키는 이 일주일의 하루, 이 주일의 안식은 더욱 소중하고 귀한 날이 아니겠습니까? 이 날은 안식일의 주인 되신 주님을 만나는, 기다려지는 날입니다. 이 날은 그 주인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날입니다. 이 땅의 주일을 이처럼 그 창조주와 함께 즐거이 지키심으로써, 그 안식일의 주인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안식의 나라에 꼭 함께 이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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