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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 맺는 성도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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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목양제일교회)


성경에 자주 나오는 과목이 세 가지 있는데,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입니다. 이 세 가지 과목은 팔레스틴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에 해당합니다. 포도나무는 물이 귀한 곳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를 제공해 주는 소중한 과목입니다. 그들이 주로 마시는 포도주는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포도즙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감람나무는 주로 기름을 짜는데, 그 기름은 식용이나 등불을 밝히는 연료로 쓰이거나 머리나 피부에 바르고 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다만 그 열매를 식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무화과는 고대로부터 이집트나 팔레스틴 지역에서 흔히 양식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잘 익은 무화과는 매우 달고 물기가 많아서 더운 지역에서는 매우 유용한 과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무화과를 고급 과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무화과는 길가에도, 야산에도 잘 자랍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위로 곧게 자라지 않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자라고, 나무를 베면 우유 빛깔의 끈적끈적한 수액이 흘러 나와서 목재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오직 열매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심습니다.

무화과나무 비유의 소개

오늘 우리가 살펴볼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고 과원지기를 시켜 잘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까닭인지, 이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므로 주인을 실망시켰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의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낭비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과원지기는 간곡하게 말하기를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소중한 영적 가르침을 줍니다. 그것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버림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은 저마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길가에 피어 있는 풀 한 포기라도 나름대로 존재 목적이 있습니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에게 존재하는 목적이 없을 리 만무합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면,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이사야서 43장 21절에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무엇 때문에 사느냐고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답이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해 산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을 위해 산다고 할 것입니다. 정치권력을 얻기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나 깨나 돈벌이에만 열중하는가 하면, 일에 중독되어 일하는 재미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즐기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치고 목표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는 점입니다.

솔로몬의 탄식

만일 하나님의 영광과는 상관이 없이 그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솔로몬의 말과 같이, 바람을 잡으려는 헛된 인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젠가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고 탄식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전무후무한 지혜와 부귀영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탁월한 지혜와 부귀를 가지고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키는데 사용했습니다. 많은 건축물을 짓고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행한 대부분의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삶이 낭비요 헛수고에 불과함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하게 살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헛된 인생입니다. 솔로몬은 말년에 이르러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전도서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기를 “13)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성도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이 무화과나무는 길가나 야산에서 자라는 여느 무화과나무와는 달리 포도원에 심겨졌습니다. 그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은 곧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과원지기는 예수님을 가리키며, 포도원은 교회를, 그리고 무화과나무는 신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에 소속되어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된 것입니다.

사실인즉, 우리에게는 이 같은 혜택을 받을 만한 아름다움이나 공로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우리를 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는 한량없이 귀한 것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드디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죽음을 당케 하셨습니다. 우주보다도 더 크고 넓은 사랑을 우리 각 사람에게 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몸된 교회에서 지체가 되어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된 사실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상에 60억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가운데, 내가 어쩌다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생각할수록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열매를 원하시는 하나님

비유에 보니, 포도원 주인이 삼년동안 이 무화과나무에게서 열매를 구했다고 했습니다. 이 주인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포도나무를 심고 포도를 따먹지 않겠으며, 사과나무를 심고 사과를 따먹지 않겠습니까? 이 주인에게는 열매를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컸든지 종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포도원에 왔습니다. 이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얼마나 크신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님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희생하셨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위해 이처럼 큰 희생을 감수할 사람이 있겠는가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선한 열매를 보시기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포도원에 왔을 때 이 무화과나무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주인은 이 나무의 이곳저곳을 살피면서 열매를 찾았지만 허사였습니다. 잎도 무성하고 가지도 실하게 잘 자랐는데 있어야 할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요 15:8)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열매를 요구하신다면 내어놓을 열매가 있으십니까?

포도원 주인이 화를 낸 첫 번째 이유

열매를 얻지 못한 포도원 주인은 무화과나무에 대하여 화를 냈습니다. 주인은 지금까지 무화과나무에게 정성을 쏟아 붓고 수고하며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된 데 대하여 분노하였습니다. 무슨 일이건 처음부터 별로 기대한 것이 아니라면 결과가 신통치 못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지고 정성을 다한 일은 나중에 결과가 형편없으면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이 주인은 삼년을 기다렸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정성껏 거름을 주고 가지를 쳐주면서 열매 맺기를 기다렸습니다. 3년이란 열매 맺기에 충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린 자녀가 집안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물건을 깨뜨리기도 하고 방을 어지럽히기도 하고 똥오줌을 사기도 하지만 그 때문에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어리니까 응당 그러려니 하면서 오히려 그런 모습을 즐겁게 보아주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초등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철부지처럼 행동한다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 전도 받아 교회에 나온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교회가 무엇하는 곳인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 초보자는 이따금씩 교회에 나와 주는 것으로도 환영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경우에도, 한 동안은 그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르고 체험이 적기 때문에 의심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그 신자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경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롬 14:1)고 어린 신자들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면 이전과는 다른 기준을 적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믿은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유치한 신앙수준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 교회의 신자들에게 편지하기를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1-3)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5장 12절 이하에는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신앙수준이 어떠한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젖이나 먹는 단계인지, 아니면 이유식을 먹는 단계인지, 아니면 단단한 식물도 먹고 소화하는 단계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결과, 이미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숙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무언가 우리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있음을 알고 그 원인을 찾아서 해결해야 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화를 낸 두 번째 이유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보고 화를 낸 두 번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로 인해 손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말하기를 “왜 이 나무 때문에 땅만 못쓰게 만들겠는가?”고 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가지를 사방으로 뻗기 때문에 땅을 많이 차지합니다. 그러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땅만 낭비할 뿐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원의 기름진 토양에서 자양분을 흡수하는 데만 열심이었지 열매를 맺을 줄 몰랐습니다. 이에 주인은 과원지기에게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지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잔의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면서 오래오래 참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103편 8절로 1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신 분이십니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는 분이시요,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죄를 범하고도 다시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 회개함으로 죄사함의 은총을 입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대로, 우리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주십니다. 그러나 입술로만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크나큰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하나님을 위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고, 또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전도하러 파송하시면서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웠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나누어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됩니다.

위기에 처한 무화과나무를 위한 중보

열매를 맺지 못한 이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명령에 의해서 그만 찍힐 운명에 처했습니다. 그래도 무화과나무로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입이 열 개인들 무슨 변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찍혀서 아궁이에 던짐 받더라도 동정을 살 입장이 못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위태로운 때에 과원지기가 나서서 이 무화과나무를 위하여 호소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포도원 지기는 부족하고 열매 없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셔서 우리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금년에도 그대로 두옵소서. 잠시 동안만 더 저들에게 여유를 주시고 은혜를 입기까지 기다리소서.” 예수님의 이 간절한 중보기도 덕분에 우리가 지금도 살아남아서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또 한 해를 회개와 개혁을 위한 기회로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간청을 들으시고 또 한 번의 재기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룩하고 엄숙한 시간이며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 될 절박한 기회입니다. 이 기간은 마치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도끼가 준비되어 있으나 단지 내려찍는 것만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 아낌없이 희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마치 자기의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 아파하시면서 또 한해의 수고를 자청하고 계십니다. “한 번 더 힘써 보겠으니, 일 년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아마 실과가 맺힐 것입니다.”

만일 금년에 이 무화과나무가 실과를 맺는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포도원 주인도 기뻐할 것이요, 과원지기도 그 동안의 수고를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히지 않게 될 뿐 아니라 도리어 사랑받는 자랑스러운 나무가 될 것입니다. 원래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흉악한 범인이 되어도 여전히 믿어 주고 싶어 합니다. “친구를 잘못 만나 그렇지, 원래는 착한 아이입니다.” “한 순간 생각을 잘못해서 그렇지 사실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모릅니다. 다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벌을 주시려면 저에게 주십시오.” 이와 같이 부모의 사랑은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로 돌립니다. “주인이여, 이 나무가 원래 열매를 못 맺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다시 일 년을 최선을 다해 가꾸어서 꼭 열매를 맺게 하겠습니다.” 이 과원지기의 호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호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무화과나무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이 일 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는 마지막 기회요, 종말론적인 기회이며, 다시없는 기회입니다. 이 마지막 기회에는 분명히 열매를 맺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과원지기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본을 받읍시다

성경에는 이 마지막 기회에 회개하고 새로워져서 열매 맺은 사람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서 사도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열심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한 때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신앙 고백을 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삼년이 지나서 열매를 내어놓아야 할 시기에 그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금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간구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는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초대 교회의 기둥과 같은 일꾼이 되었으며, 종내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예수님을 위하여 순교의 제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기회에 열매를 맺은 또 다른 한 사람으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불과했습니다. 겉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 자처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기독교인들을 이단으로 여겨서 잡아 죽이는 데 앞장섰던 자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꼬꾸라졌을 때, 비로소 자기가 열매 없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시로부터 바울은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를 선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그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어 소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열매 없던 나무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나무로 변한 것입니다.

마지막 권면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들판에서 포도원으로 옮겨 심기운 무화과나무와 같이, 세상길에서 방황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포도원인 교회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농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살핌 가운데 살아왔습니다. 자,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릴 선한 열매를 맺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이 많은 은혜를 받기만 하고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데는 나태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한량없이 받았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았습니까? 사해는 다른 강줄기들로부터 쉼 없이 물을 공급받지만 다른 강이나 바다에 자기의 물을 줄 줄을 모릅니다. 그 결과 그 이름처럼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또한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삶 속에 열매 맺는 생명의 작용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마지막 일 년이라는 기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기회는 과원지기이신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이신 하나님께 간구하여 허락 받으신 마지막 기회요 종말론적인 기회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이 눈앞에 다가 왔습니다. 장차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심판주로 오실 것이며, 그 때에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 간에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은혜의 기간에 이제까지 못 맺었던 열매를 맺어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립시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오늘이라고 일컫는 지금 주님을 위하여 살아갑시다. 삶 속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히 맺히심으로 재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생명의 면류관을 다 받아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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