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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함받은 자와 택함받은 자(2) (마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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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성진 목사 (부산영락교회)

  미국의 제 7대 대통령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매우 인정이 많은 대통령이었습니다. 그가 재임할 때에 윌슨이라는 강도가 잡혀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윌슨은 우편물을 나르는 열차 속에서 우편물을 훔치다가 책임자를 권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청교도(淸敎徒) 정신에 입각한 도덕적인 나라였습니다. 한 사람을 죽였지마는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사형집행일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잭슨 대통령이 윌슨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받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윌슨은 어렸을 때부터 잭슨 대통령의 친구였습니다. 대통령은 윌슨을 살리려고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했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이름으로 사면장(赦免狀)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윌슨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면서 대통령의 사면장을 거절했습니다. 결국 윌슨은 사형집행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 살려준다는데 왜 소용이 없다고 할까,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이라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주일에 왕이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함께 즐기자하고 초청했는데 왕의 호의(好意)를 거절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왕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윌슨은 대통령의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그것이 죽는 이유였습니다. 윌슨이 죽은 것은 죄를 지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사면장을 거절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 잔치는 단순히 왕이 자기 아들을 장가보내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무엇무엇과 같다고 이야기를 전개해 가시며 이 비유의 성격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천국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단순히 결혼식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거절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천국의 잔치를 거절하는 것, 그것은 바로 천국을 거절하는 것이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전개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양 잡아서, 소 잡아서 잔치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하시므로 인류의 모든 죄를 다 사해 놓으시고 사면장을 나누어 주는 잔치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사면장을 안받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1,900번이나 <오라>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엄청난 대가(代價)를 지불해 놓으시고, 구원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시고 <오라, 오라, 오라>고 계속해서 초청하십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면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이 잔치에 참여하면 참된 행복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오라, 오라,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1. 왕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의 핑계

그런데 이 잔치자리에 오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왕의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진멸함과 불태움 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을 보면 한 마디로 핑계였습니다. 이 사람들이 오지 않고 핑계를 대고 있는데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의 반응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왜 너는 먹지말라고한 이 나무의 실과를 먹었느냐?>,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아담은 핑계를 대었습니다. ‘내가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 여자, 하나님이 여자 안 만들었으면 안 먹었을 것이고, 또 그 여자, 내 아내가 주어서 먹었기 때문에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하와, 너는 왜 먹었느냐?>. ‘뱀이 주어서 먹었습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도 이렇게 다 핑계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역을 맡기실 때에 <너는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인도해 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얼마나 많은 핑계를 대는지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데 바로 앞에 나가겠습니까, 못 갑니다. 내가 가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못 갑니다. 그들은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못 갑니다. 나는 말을 잘 못 합니다. 못 갑니다.’ 네 번이나 핑계를 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하나님은 핑계를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죄짓고 난 다음에, 잘못하고 난 다음에 꼭 핑계를 댑니다. 심지어 사람이 어디까지 가서 핑계하는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장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가서 설 것인데 그때 하나님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느냐?>하고 물으실 때에 ‘하나님, 저는 예수 믿으라는 소리를 못 들어서 못 믿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이런 핑계도 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다 드러나 있다는 것입니다. 백합화 하나만 보아도, 날아가는 새 한 마리를 보아도, 아, 저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저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 이렇게 자상하시고, 이렇게 위대하시고, 이렇게 능력많으신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의 존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이 모든 만물 안에 다 보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복음을 듣지 못 했습니다하는 핑계를 못 한다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말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염(殮)을 하지 않습니까? 염하는 사람이 뭐라고 하면서 염을 하는 지 아십니까? 모든 구멍들을 다 솜으로 막는데 뭐라고 하면서 막는가하면 눈을 가리면서 ‘못 봤다고 해라, 못 봤다고 해라’하면서 눈을 솜으로 가립니다. 귓구멍을 솜으로 막으면서 ‘못 들었다고 해라, 못 들었다고 해라.’하면서 귓구멍을 막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자기도 몰라요. 위에서부터 염하는 사람에게 염을 배워왔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당연히 자기도 그렇게 해야 되는 줄로 알고 그렇게 소리하면서 염을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디에서 풀려진 줄 아십니까? 조금 전에 읽어드렸던 로마서 1장 20절에서 풀려집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것인데 하나님께서 <왜 너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느냐?>하고 묻거든 ‘못 봐서 못 믿었습니다.’하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교회 못 봐서 못 믿었습니다.’그렇게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왜 너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느냐?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시면 ‘예수믿자고 전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못 들어서 못 믿었습니다.’하라고 귓구멍을 막으면서 그렇게 일러주는 거예요. 그렇게 대답하라고 죽은 사람에게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얼마나 묘한지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전도자를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수많은 설교를 통해서, 전파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이웃을 통해서 예수 믿으라고 얼마나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앞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왜 충성하지 않았느냐? 왜 선행하지 않았느냐?>하시면 핑계하지 못 합니다. 얼마나 많은 설교를 통해서 충성하라고, 기도하라고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만물 가운데도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다 나타나는데 하나님 앞에 가서 ‘나는 몰라서 못 믿었습니다, 못 들어서 못 믿었습니다’그런 핑계 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핑계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세요. 아무리 바빠도 순종하세요. 아무리 어려워도 순종하세요. 그것이 사는 길이요, 그것이 복받는 길이요, 그것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우리도 말 잘 듣는 자식이 더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시지 않습니다. 언제나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에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구원의 자리로 오라고. 은혜의 자리에 와서 은혜 받으라고. 봉사하는 자리에 와서 봉사해서 상급받으라고. 전도하는 자리에 와서 전도해서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되라고. 기도하는 자리에 와서 기도해서 더 능력받으라고. 오늘도 하나님께서 갖가지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우리를 부르시고 계신데 그 장소에 우리가 가지 않아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왜 그랬느냐?>고 하실 때 몰라서 그랬습니다, 못 들어서 그랬습니다하는 소리 안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실수하고 잘 못 했을 때 핑계하지 말고 솔직했을 때 내가 잘 못 했습니다하고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시고 용서하십니다.

2. 핑계의 내용

이제 왕의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태도를 한번 몰까요?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처(商業處)로 갔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도 오늘 본문의 말씀과 비슷한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 보면 ‘나는 밭을 샀으니 불가불(不可不) 가 보아야 되겠다,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해 보러 가야 되겠다, 또 한 사람은 나는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 하겠다’ 한결같이 핑계를 합니다.

밭을 사는데 밭을 안 돌아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소 다섯 겨리를 사는데 이 소가 일을 잘 하는가, 걸음걸이를 시험해 보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장가들었으면 아내하고 같이 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다 한결같이 핑계를 하는데 핑계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핑계와 거절은 그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그대로 나타나서 여러분들 전도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지 모릅니다. 그리고 바빠서, 급해서, 할일 많아서 죽을 시간도 없다며 얼마나 되지도 않은 핑계를 대는지 모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하시든지 핑계하지 말고 그 은혜의 장소에서 빠지지 말고 하나님의 초청을 잘 수용하여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 잔치자리, 기쁨의 자리에 주역이 될 수 있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거절한 이유-자기가 주인이 된 삶

왜 이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관심은 자기 밖에는 없습니다. 돌아보지도 않았다고 했습니다. 왕의 초청은 관심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들이 평안하게 사는 것은 왕이 나라를 잘 다스려 주니까 살아가는 것 아닙니까? 오히려 그들이 왕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어서 ‘임금님, 참 감사합니다. 이렇게 나라를 지혜롭게 잘 다스려 주셔서 우리가 평안하게 살게 된 것 참 감사합니다.’ 하고 왕을 위해서 오히려 잔치를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왕이 잔치를 마련하고 ‘오세요. 함께 즐깁시다’하면 당연히 와야 할 것인데 왕의 초대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에게만 집착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장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누가복음 12장에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부자가 농사를 지었습니다. 너무너무 잘 되었습니다. 심중에 생각합니다.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가 곳간을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하자’.
거기 <내>라는 말이 몇 번 나오던가요? 여섯 번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 어리석은 사람을 보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니에 대하여 부요치 못 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자가 이와같다는 말 아닙니까?
여섯 번이나 <내가, 내가, 내가>하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삶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이런 사람은 아니지요. 이 사람은 아예 하나님이 그의 삶 밖에 있지만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몸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삶의 중심은 <내>가 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이 어떤 삶인 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내> 중심의 삶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조금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바꾸는 작업, 바꾸는 생활, 그게 바로 예수 믿는 생활입니다.
그래야만 행복이 있고 마음의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 참 행복할 것 같았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에 정말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서 내 인생을 지배하게 될 때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이 있는 것입니다.

'조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JOY'. 그 첫 자에 한 번 붙여 보세요. J, Jesus Frist.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고, O, Other's Next, 다른 사람을 두 번 째 생각하고, Y, Yourself Last, 너를 제일 마지막으로 생각하라, 거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거꾸로 되어서 내가 제일 먼저 있고, 다른 사람은 그 다음에 있고, 하나님은 제일 마지막에 있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기쁨과 만족이 없습니다.
이제 내 중심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지 말고, 돈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좌지우지 하지 말고, 어떤 사람이 내 인생을 끌고가지 말고, 하나님이 가장 영향력이 있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있는 그런 삶을 한번 살아 보세요.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고, 그게 진정 행복한 삶이요, 기쁨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삶으로 날마다 전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거절한 이유-현세적인 삶

다음 이들은 전부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현실(現實)과 현세(現世)는 지극히 제한적(制限的)이고 찰나적(刹那的)입니다. 당장 당면한 문제, 당장 급한 문제를 향해서 쫓아가는 삶의 형태였습니다.
엄마 뱃속에서의 삶이 있습니다. 열달 동안 사는데 그 열달 동안의 삶은 이 땅에서 사는 삶과 비교해 보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공간에 있어서, 또한 시간적인 길이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삽니까? 거기서 사는 것은 이 땅에서 사는 것의 준비과정이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가 좋다고 거기만을 위해서 살아보세요. 그러면 이 땅에 나와서 사람구실 하겠습니까? 엄마 뱃속에 있는 것은 이 땅에 나와서 살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다음 생에 대한 준비과정인데 엄마 뱃속에서의 열달과 이 땅에서의 7,80년이 비교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이 땅에서의 7,80년의 삶은 앞으로 다음 세계에서 영원히 살 삶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의 삶만을 위해서 집착하며 살다가 다음 세계에서 아차!하게되면 가장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이 본문에 나와있는 이 사람들이 전부 이 땅에 있는 급한 일을 위해서만 좇아가다가 정말 보이지 않는 다음 세계, 그것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이 땅에서의 삶은 얼마나 찰나적입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인생의 날들은 눈 깜짝할 사이라고 했습니다. 밤이 한 경점(更點)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베틀의 북처럼 빠르다고 했습니다.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신속히 날아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찰나적인 삶에 온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한 삶에 관심가지지 아니하는 사람이 얼마나 미련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들뿐만 아니고 우리들도 이 세상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인생의 관심과 삶을 100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관심과 거기에 대한 투자를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거기에 대한 삶은 아주 미미(微微)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사를 합니다. 좋은 집 삽니다. 화려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집은 여러분들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우리 집 안에만 치장하려고 애를 쓰지 하나님 나라에서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자를 쓰고, 어떤 치장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한번 상상해 보셨습니까?

며칠 전에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그 목사님이 너무 힘든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천국을 보여주시면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육신을 벗어나서 천국에 가니까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세 천사가 있더랍니다. 이 분이 부산에 사는 분인데 천국에 자기 교회가 있더랍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난 교인이 그 교회 안에서 교회를 치장을 하고 있더랍니다. 천국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다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각각 자기 집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어마어마한 맨션들도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좋은 집이 무디(Moody) 목사님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높은 산 위에 별장같이 화려한 집이 있는데 그 목사님이 자기 집은 어떤 집인가하고 보니까 곽티슈만한 집이더랍니다. 그래서 너무너무 실망해서 “천사님,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했더니 천사가 “돌아가서 큰 집 지어 와!”하더랍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 살게 될 집은 어떤 집이겠습니까? 이런데 관심을 안 가진다고요.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입고 살 옷들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전부 이 땅에서 좋은 옷, 좋은 아파트 살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우리의 관심이 현실만 아니고 다음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엄마 뱃 속에 있는 아기가 태어나서 살 이 세상을 위해서 발도 준비하고, 눈도 준비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준비를 좀 하면서 살자고요. 그 나라에 가서 살 때에 정말 우리가 내가 세상에서 왜 이렇게 살았던가하고 후회하지 않을만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서 살 집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쓸 모자는 면류관이겠습니까?
죽어봐야 알지 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나,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도 안 보이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들, 정신이 어디 있습니까? 해부해 보세요. 정신이 보이는가. 여기 우리 마음이 있는데 마음이 두근두근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벅차기도 하는데 마음 한번 수술해 보세요. 마음이 보이는가. 그래도 있지 않습니까?

어느 무신론 교수가 ‘하나님은 없다’고 논리를 펴다가 마지막에 논리적으로 결론을 ‘왜 하나님이 없느냐, 안 보이기 때문에 없다’고 했습니다. 러시아의 우주비행사 가가린(Gagarin)도 저 우주에 올라가서 ‘내가 온 우주를 다녀보아도 하나님은 없더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우주가 얼마나 큽니까? 이 세상이 우주라고 하면 가가린은 모래모래 사이에 갔다 온 것에 불과합니다. 이 우주가 얼마나 큰데,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보이는 하나님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안 보이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무지한 사람의 말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니까 없다고 교수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니까 믿는 한 학생이 말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 머릿 속에 지혜, 지식이 보입니까?” “안 보이지.” “안 보이면 비어있는 것 아닙니까? 그럼 교수님은 골 빈 교수 아닙니까?” 그렇게 해서 반증(反證)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안 보이니까 없다는 논리에 여러분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천국을 보여주십니다. ‘천국은 확실히 있다’는 책이 얼마나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책 한번 사 보시기 바랍니다. 현세적인 것에 급급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가,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나라가 우리에게 있음을 확실히 믿고 그 나라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이 땅만 바라보지 말고, 오늘 이 현세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준비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거절한 이유-중요한 것을 모름

다음은 이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몰랐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농사하는 것, 사업하는 것, 이게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농사, 사업 열심히 하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정말 성실하게 열심으로 땀흘려 일하여서 복되게 살고, 남에게 나누어주면서, 구제하면서 살아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실함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게 되면 그 성실한 일이 바로 그에게는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보다 더 중대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그보다 더 중대한 목적과 삶의 의미를 망각하고 살아갔다는 말입니다.
당시 왕은 생명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이 있는 왕입니다. 그 생명의 주관자를 외면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이 중요합니다. 사업이 중요합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이고 그 생명을 주관하는, 본문에 나와있는 임금인데 그 임금이 누굽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관계를 끊어버리고 사업하러 간다, 장가갔으니 간다, 농사하러 간다, 그렇게 한 이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물과의 관계가 있어야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땅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땅과의 바른 관계가 있어야만이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을 떠나서는 참된 인생의 행복이 있을 수 없는데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 그게 가장 불행한 인생아닙니까? 
이 사람들은 왕을 떠나서 살려고 했습니다. 거기에 비극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그들은 따라갔습니다. 우리 신앙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이 관계가 신앙생활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데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해하는 사업,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취미, 그것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게으름과 너무 지나친 부지런함, 이것도 우리가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돈이라면 그 돈도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신앙생활 잘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적어도 다섯 가지를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예를 들어 말하면 오늘도 우리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오늘도 등산 갈까, 낚시 갈까 하면서 취미생활을 위해서 우왕좌왕하다가 나오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때 “No!!" 해야 됩니다. 오늘 가까운 친구의 자식이 결혼을 한다는데 축하해 주러 가 봐야 되는데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아이들이 놀러 가자고 하는데 그것도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너무 피곤해서 낮잠을 좀 자야 하는데 그러다가 나온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도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오늘 텔레비전에 너무 좋은 프로그램이 잇는데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교회 오는데도 적어도 다섯 번은 “No!!" 해야 우리가 나오게 되어집니다. 기도할 때도 좀더 잠 좀 자자, 그것도 “No!!" 해야 기도가 되어집니다. 오늘 기도 응답이 안되는데 그만 일어서 버릴까, 그 유혹도 “No!!" 해야 됩니다. 오늘 시간이 없는데 시간이 많을 때 하자, “No!!" 해야 됩니다. 오늘 하지 말고 내일 하자, “No!!" 해야 됩니다. 하여튼 기도 한 시간을 채우는데도 “No!!"를 몇 번 씩 해야만 기도 한 시간을 채울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신앙생활 전체가 다 “No!!" 할 것을 “No!!" 할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해(沮害)하는 어떤 유혹이 올 때에 우리는 손을 들어 “No!!" 하면서 나가야 우리가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줄 알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과의 간계를 끊어지게 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어떤 요소들이 일어날 때마다 과감하게 “No!!" 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하여서 아무리 급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지엽적인 것을 다 끊어버려서 주님과의 아름다운 바른 관계, 주님 앞에 나와서 잔치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종들을 잡아서 능욕하며 죽였다고 했습니다. 오라고 했는데 안 오면 될 것인데 오라고 보낸 종까지 잡아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죽임 당한 종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순교자입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받는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여기에 잔치자리가 마련되었다!>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했습니다. 나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예수님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조금 전에 말씀 한 것처럼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아예 예수님을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달려 돌아가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직접 죽이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실 때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이는 것입니다.
임금이 그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군대를 보내서 살인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사실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한번 비유로 말씀하셨지요. 그렇게라도 회개했다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인데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난 다음 40년 뒤에 주후 70년에 로마의 디도(Titus)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에 쳐 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고 수 백만 명을 학살하고 모든 성을 다 불태워 버렸습니다. 
경고했습니다. 징조가 이루어 졌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사람은 이렇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 준 것인데 장차 앞으로 주님께서 인류를 심판하시게 될 때 그 성을 불태워 버렸던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다 불러서 징벌하는 그 장소가 바로 지옥이라는 장소 아닙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핑계하지 마십시다. 순종하십시다.  내 자신만 우선하지 말고 하나님을 우선할 수 있기 바랍니다. 이 세상만 바라보지 말고 내세를 바라보며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것만 바라보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하여서 준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이 내게 올 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것과 꼭 같습니다.

말씀이 내게 올 때마다 항상 그 말씀에 순종하여서 은혜잔치 자리에 참여하라면 참여하고, 봉사의 자리에, 기도의 자리에, 말씀의 자리에 어느 자리든지 하나님이 초청하는 그 장소는 항상 백일을 제쳐놓고 초청에 응하여서 주님 앞에 나오는, 주님 주시는 이 잔치에 주인공 되어지는 그런 삶을 살다가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우리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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