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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 21장(1) 실패를 극복하는 길(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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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이한규목사

< 지난주간의 감동 >

요새 경기가 어려우면서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있고, 새벽에 같이 기도하는 분들 중에도 있고, 인터넷을 통해 말씀을 사모하는 성도 중에서도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메일을 통해 사업을 하면서 겪는 기막힌 사연들을 저에게 보냅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참 안타깝습니다.

지난주 초에 실패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도울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돈을 드릴 수도 없고, 영업에 나설 수도 없고, 사람을 소개시켜 줄 수도 없는 일입니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로 후원해 드리고, 말씀으로 용기를 드리는 일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떤 말씀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어떤 성경 말씀을 전할까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요한복음 21장에서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와 다시 사명을 주시는 본문을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는 하나님께서 감동 중에 엄청난 말씀을 쏟아 부어주셨습니다.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100장이 넘고, 곧 200장이 넘고, 곧 300장이 넘었습니다. 너무 떠오르는 말씀이 많았고, 너무 쓸 말씀이 많았습니다. 보통 원고지 800-900장 정도면 200-250페이지 책 한 권 분량인데, 요한복음 21장을 가지고 설교해도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주간 설교하는데 보통 원고지 35-40장 정도의 분량으로 설교하는데, 아무리 설교 원고를 줄여도 최소한 10번 이상 설교해야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책을 써서 보급하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을 강해한 책을 써서 보급하면 그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저는 이제까지 7권의 책을 썼지만 한번도 자비로 출판한 적이 없었고 모두 출판사로부터 인세를 받고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만 가지고 강해한 책이라면 어느 출판사도 선뜻 출판에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 책의 필요성에 대한 강렬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책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좋은 출판사 만나게 해주시든지, 독지가 한 사람이라도 생기게 해주소서!"

여러분! 이 책의 출판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그리고 저의 웹사이트를 통해서 말씀을 보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씀을 통해 힘과 용기와 희망이 생겨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또한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보여주신 감격적인 영상을 통해서 수많은 실패한 인생들이 주님을 새롭게 만나고 실패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십시오.

< 인생에는 실패도 필요합니다 >

사람이 지은 가장 위대한 노래가 있습니다. 바로 찬송가 405장에 있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그 찬송을 지은 존 뉴톤은 82세 때 두 가지 사실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자기의 죄인 된 삶을 잊을 수 없고, 또 하나는 자기 같은 죄인을 구해주신 예수님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존 뉴톤은 '과거에 실패한 자'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냥해 미국에 파는 노예 사냥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도 주님은 찾아오셨고 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과거의 실패를 문제삼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로 실패할지라도 예수님을 의지하고 실패를 딛고 일어서야 합니다.

훌륭한 삶이란 한번도 실패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꿋꿋이 일어나는 삶입니다. 우리는 실패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누가 실패합니까? 대개 도전하는 사람이 실패합니다. 도전이 없는 사람은 실패도 없습니다. 사실상 도전이 없는 삶은 가장 큰 실패입니다. 우리는 계속 실패해도 계속 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에게 실패를 이길 수 있는 믿음을 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싫어하지만 실패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실패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실패가 성공보다 나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고상한 실패는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낫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성공보다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요새 몸짱이 되겠다고 운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운동하면 팔, 다리, 어깨, 옆구리 등 아프지 않는 곳이 한곳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이 싫지는 않습니다. 전신을 감싸는 고통 속에 짜릿한 상쾌함이 묻어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실패가 하는 일입니다. 실패 속에서 우리는 더 높은 신앙과 인격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패도 허락하십니다.

이 세상에 실패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린아이가 넘어지지 않고 걸음마를 배우는 경우는 없습니다. 우리가 실패를 통해서 자신을 점검하고, 새로운 목표를 정해 다시 도전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축복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 실패 극복의 길 >

오늘 본문이 있는 요한복음 21장에는 예수님께서 실패한 제자들을 일으키시고 다시 사명을 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실패를 극복하는 비결이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절은 짤막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을 통해서 실패를 극복하는 4가지 원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1. 예수님과 만나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이 구절은 제자들을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게 한 뚜렷한 원인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래서 이 1절 말씀은 요한복음 21장의 주제요, 우리의 삶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행복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공도 역시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결혼하면 배우자 잘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과거에는 권력자 한 사람 잘 만나면 출세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지금도 비슷합니다. 문제는 부자나 권력자를 쉽게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나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맥이 없어도 예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은 획기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삶에 절망해서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면도날로 동맥을 자르기 전에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때 무슨 영문인지 자꾸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는 곧 거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대천덕 신부님의 할아버지인 R.A 토레이 박사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기만 하면 그때부터 누구에게나 새로운 인생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연약하고 비참해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실패는 진짜 실패가 아니라 성공을 위해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의 씨앗이 되고 인생의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2. 꿈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곳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였습니다. 어떻게 그곳에서 만나게 되었습니까?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이 있을 때 그들에게 찾아오신 장면이 나옵니다. 처음에는 도마가 없을 때 나타나셨고(요 20:19-23), 일주일 후에는 도마가 있을 때 나타나셨습니다(요 20:24-29). 참으로 감격적이고 환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만나주신 다음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전에는 계속 제자들과 함께 하셨는데, 부활하신 후에는 신비하게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고, 다시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셨습니다. 제자들은 계속 주님과의 신비로운 만남을 가지고 싶었지만 도마와의 만남 이후로는 한 동안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힘이 생기는데 어떻게 하면 다시 주님을 뵐 수 있을까?"

그때 제자들에게 갑자기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감람산으로 찬미하면서 가다가 하신 예수님이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부활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마 26:32). 그 말씀을 기억하고 제자들은 부리나케 예루살렘을 떠나 며칠 동안 걸어서 북쪽 갈릴리로 갔을 것입니다.

왜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먼저 가겠다고 하셨을까요? 그 말은 갈릴리에서 너희들을 만나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갈릴리 디베랴 바닷가에서 주님을 만나 다시 사명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 11-12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예루살렘의 감람산에서 승천을 하십니다.

그러면 왜 굳이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예루살렘에서 그들의 사명을 다시 새롭게 하셔도 될텐데 왜 그 먼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고 하십니까?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이 땅에 40일간 계셨습니다. 짧은 시간이기에 너무 소중한 시간인데, 왜 그 먼 갈릴리 지역으로 가게 하시고 거기에서 사명을 새롭게 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하십니까?

저는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가 제자들의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전에 그들의 꿈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조치였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는 그들의 꿈이 잉태되었던 '꿈의 고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제자들은 처음 주님을 만나 꿈을 품었습니다. 갈릴리는 제자들이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꿈과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의 꿈을 새롭게 하시고 나서 사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그 먼 갈릴리 여행을 시키셨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우리가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꿈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꿈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은 비관적으로 생각할 때에만 비관적으로 됩니다. 우리가 어려워도 꿈을 잃지 않고 희망을 가진다면 반드시 희망적인 상황은 펼쳐질 것입니다.

꿈은 행복을 만드는 청사진입니다. 살다 보면 깊은 수렁도 만나지만 그때 꿈과 희망을 잃지 않으면 어둠은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밝은 생각은 밝은 환경을 만들고 어두운 생각이 어둔 환경을 만듭니다. 우리가 집안을 청소하는 것처럼 매일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고 그 마음에 꿈과 비전을 채우고 최선을 다하면 어둠은 곧 물러가고 밝은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어려울수록 더욱 찬란한 꿈을 꾸어야 합니다. 링컨처럼 하원의원 선거에 떨어졌으면 상원의원을 꿈꾸고, 상원의원 선거에 떨어졌으면 부통령을 꿈꾸고, 부통령 선거에 떨어졌으면 대통령을 꿈꾸어야 합니다. 옛 속담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별로 좋은 속담이 아닙니다. 오르지 못할 것 같아도 계속 쳐다보면 꿈이 생기고, 꿈이 생기면 길이 보이고, 길이 보이면 도전하고 싶고, 도전하면 반드시 발전이 있게 될 것입니다.

3.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다시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구절을 보면 성경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또'라는 단어입니다. 저는 '또'라는 말과 '다시'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언제나 다시 기회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실패 앞에서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실패를 딛고 최선을 다하면 축복의 기회는 반드시 다시 옵니다.

요새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많이 자살합니다. 이제까지의 화려한 삶과 비교할 때 앞으로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고, 실추된 명예를 회복할 길이 없을 것 같으니까 자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로 다짐하면 죄인(sinner)이라는 'S'자의 주홍글씨를 성자(saint)로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반드시 올 것입니다.

중국 진나라의 혜제 때, 양흠 지방에 주처라는 괴걸이 있었습니다. 주처의 아버지 주방은 동오와 파양 태수를 지냈지만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주처는 불우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며 타고난 힘으로 동네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상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철이 들면서 주처는 "내가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고 생각하고 새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그의 결심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하루는 주처가 동네 사람들에게 왜 자기만 보면 얼굴을 찡그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용기 있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3가지 해악이 아직 있는데 어떻게 얼굴을 펴겠는가?" "무엇이 3가지 해악입니까?" "남산의 호랑이, 장교 아래의 교룡, 그리고 자네가 3가지 해악이네."

주처는 자기의 진심을 몰라주는 동네 사람들이 너무 야속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진심을 보여주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 세 가지 해악을 없애겠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동네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골칫거리 3가지가 서로 싸우면 최소한 한두 가지는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처를 격려했습니다. "그래! 한번 해봐!"

곧 주처는 칼을 차고 남산에 올라가 맹호를 잡아 죽였습니다. 그리고 장교아래 물에 뛰어 들어 교룡과 싸웠는데, 사흘 밤낮이 지나도 주처는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처가 죽은 줄 알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주처는 악전고투 끝에 교룡을 죽이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주처를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처는 양흠을 떠나 동오로 갔습니다. 동오에서 주처는 대학자 육기와 육운 형제를 만나 육운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전에 저는 과거에 나쁜 짓을 너무 많이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은데 너무 늦었나요?" 그 말을 듣고 육운이 격려했습니다. "늦지 않았네. 자네가 지금부터라도 굳은 의지를 지니고 착하게 산다면 앞길은 무한할 거야." 그 말을 듣고 주처는 뜻을 세워 10여 년 동안 덕행과 학문을 닦아 마침내 유명한 대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나온 한자 고사성어가 바로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말입니다.

누구나 과거의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입니다. "이제 늦었어!"라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른 때입니다. 새롭게 각오하고 일어서면 누구에게나 꿈과 같은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청개구리 때문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청개구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면 30번은 실패해서 기어코 오른다는 얘기를 듣고 그는 결심했습니다. "변덕 많은 청개구리 자식도 포기하지 않는데 나는 사람 자식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겠다." 그 결심을 마음에 품고 수없이 다가오는 실패와 고난을 극복해서 결국 현대 그룹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를 만나도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나중에 무엇 때문에 후회합니까? 실패 때문에 후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진짜 후회하는 이유는 "그때 왜 포기했지!" 하고 포기한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실패를 만나도 너무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가 가장 큰 실패이고, 가장 큰 패착입니다. 우리가 실패 속에서 포기하지 않으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실 것입니다.

4. 실패를 성화시켜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왜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제자들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의 실패를 이해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연약한 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실패를 이해하시고 그들의 실패에 너그러우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실패도 주님은 이해하시고 너그럽게 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우리의 실패를 이해하고, 실패에 대해서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를 이해하고 껴안으려고 해야 합니다. 실패에 놀랄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실패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습니까? 실패의 원인은 분석하고 반성하되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실패자로 비하하지 말아야 합니다. 실패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짜 실패가 오고, 실패를 두려워하면 마귀가 내 영혼을 가지고 놀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타인의 실패에 너그러워야 하고, 나의 실패에도 넉넉해야 합니다.

정채봉 님의 글입니다. 어느 날, 몇몇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모였습니다. 그 모임에 왕따 당한 독수리, 배신당한 독수리, 시험에 떨어진 독수리, 사업에 실패한 독수리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기가 제일 불행한 독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곧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났다! 죽자!"고 의견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언덕 밑으로 떨어져 죽으려고 할 때 갑자기 저 멀리에서 영웅 독수리가 날아와 "너희들 뭐해?"하고 소리쳤습니다. 상처 입은 독수리들이 말했습니다. "너무 살기 힘들어 죽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 영웅 독수리가 큰 날개를 펴서 몸 곳곳에 있는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내 몸의 상처를 봐라! 이건 솔가지에 찢겨 생긴 것이고, 이건 다른 독수리에게 할퀴어진 자국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훨씬 많아!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겠느냐? 나자마자 죽은 새들만 상처가 없을 거야. 자, 일어나 날자!"

요새 정치인들을 보면 불쌍하고 처량합니다. 아무나 정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욕을 먹는지 모릅니다.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면 보통 욕을 해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인이 가장 존경하는 링컨도 생전에는 엄청난 욕을 먹었습니다. 그처럼 수많은 상처와 아픔을 견딜 수 있어야 위대한 정치인이 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실패를 잘 이해하고, 잘 요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에는 실패도 필요합니다. 실패를 해보아야 성숙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패에도 관대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실패의 위기가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그 실패를 기회로 삼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실패를 성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는 창조의 기회요, 성숙의 기회입니다.

< 기독교는 사람을 좋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

기독교는 환경을 좋게 만드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람을 좋게 만드는 종교입니다. 사람을 개조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사람으로 만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실패도 하게 하시고, 문제도 있게 하시고, 깊은 절망을 경험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허락한 실패이기에 반드시 그 다음 단계에는 성공이 있습니다.

실패와 성공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실패가 있으면 반드시 성공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살면서 실패했던 것들이 우리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강건한 영혼으로 만들었고, 인격체로 만들었고, 부자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 속에서도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실패를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실패한 모습입니까? 그러면 성공이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림자는 빛이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림자가 있다면 어디선가 빛이 비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와 어둠을 타박하지 말고 몸을 돌려 태양을 보고, 담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마음과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면 성공의 길이 그렇게 멀고 고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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