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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적이 이끄는 교회(엡 1:23, 요일 4: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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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요셉 목사

[1] 인생의 목적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제목 밑에서 드리는 연속 설교의 세 번째 주일입니다. 그 동안 저는 먼저 "우리 인생의 목적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피조물, 지음 받은 존재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연히 만들어 진 의미없는 존재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라 만들어 진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의 목적은 우리를 이 땅에 존재케 하신 하나님, 하나님 뜻 안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오늘 21세기에도 여전히 믿을 만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가르쳐주는 우리 인생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은 너무 하나님 중심의 일방적인 목적 같지만, 우리 인생이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최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 우리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부름 받았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때 우리 인생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위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이 이끄는 인생의 구체적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배라는 것을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인 영적 존재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와 예배를 통하여 만나시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요3: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니라"(요3:23)고 하셨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인생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으로서 인생의 마땅한 본분입니다. 우리는 성공적 예배자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예배는 주일에 함께 모여서 드리는 공동의 예배뿐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복종, Surrender입니다. 우리는 산제물로 주님께 바쳐지는 하루 하루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두 번째 길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서 교회와의 관께는 필수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성령 공동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엡1:23). 그리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된 자(롬12:5)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목적을 위임받은 예수 공동체요 우리는 그 지체로서 예수님이 하셨던 사역을 예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일, 전도하는 일 그리고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등 그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우리는 교회의 지체로서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에 있어서 교회와의 관계가 필수적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붙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축복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하나님은 세우시고 그 몸을 통하여 지체인 성도를 축복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떨어진 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어떤 분들은 질문을 갖고 계실 지 모릅니다. 교회와의 관계 없이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가능하지 않은가?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을 가리우고 있지 아니한가?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상처를 받기가 쉬운데, 꼭 교회에 나아가야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라고 말하는데 이같은 이야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과 교회를 나누어 생각하는 이면에는 성서적인 생각보다는 오늘의 문화적이고 현실적인 생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만연하는 개인주의는 이 같은 생각의 밑바닥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내 개인적인 결단일 뿐, 이웃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는 신앙의 사유화 혹은 개인화 역시 문제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같은 생각을 만연시키는 것은 교회의 건강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믿음의 본을 보이지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닮은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예수 믿는 삶이라면 내가 왜 교회 생활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가룟 유다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같은 생각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를 찾아 그 기초위에 우리 믿음의 삶을 세워야 합니다.
  비록 오늘의 교회가 부족하고 모자라도,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더 신실한 그리스도의 교회로 끝없이 자라가도록 스스로를 갱신해야 합니다.
  지상교회는 완전한 교회는 절대로 없습니다. 왜냐면 지상교회는 영적 종합병원과도 같습니다. 온갖 죄인과 병자들이 다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빨리 변화되고 고침받은 자들도 있고 아직 치료중인 자도 있고 전혀 변화받지 못한 난치병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온갖 환자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오직 영적 종합병원인 교회에 와서는 우리의 의사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의 말씀만 듣고 처방대로 살아야 합니다. 주변 환자들 모습만 쳐다보고 그 들의 이야기에 신경을 쓰고는 "교회가 왜 그렇냐?"고 비난하며 떠난다면 자기 영혼만 손해요 결국에 자기는 그들 때문에 영원한 비극적 참상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지상교회 공동체를 상징적으로 뜻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가룟 유다같이 변화되지 않고 결국 예수님을 배신하고 판 마귀의 도구된 자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 지상교회 안에도 가룟 유다같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가룟 유다 같은 자들 때문에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난다면 여러분만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됩니다. 당신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비난하면서 그런 사람을 둔 예수님을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예수님을 떠난다면 당신은 천추의 한이 될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상교회 안에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완전한 교회는 우리가 더러운 몸을 벗고 하나님께 가는 천상 교회 밖에 없습니다. 지상교회는 천상교회의 그림자에 불과하지만, 이 부족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어떤 조직체가 아닙니다. 물론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이지만, 교회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인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우리 주님께서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존재이면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오늘도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함께 하시며 이끌어 가십니다.

  교회가 심히 타락해서 세상의 비난을 받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해도 우리는 이 교회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위에 세워진 제2의 성육신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셨고, 오늘도 주님께서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오늘도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타락하고 생명을 읽어갈 때는 언제나 한 구석에서 갱신 운동이 일어나서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했습니다. Martin Luther와 John Calvin의 종교개혁운동은 대표적인 것입니다. 영국 성공회에 속했던 John Wesley 사제의 감리교회 운동도 교회갱신 운동이었습니다. 1900년도 초에는 오순절 성령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 갱신운동을  주도케 하여 시들해진 교회 안에 성령의 생기가 들어가게 하여 교회를 새롭게 세우고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비록 못마땅하고, 부족한 구석이 많아도 주님께서 세우시고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교회이기에, 참고 기다리면서 교회가 교회되도록 힘을 모으고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목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해서 교회는 필수적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살아가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세워가는 base, 기지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세상속에 펼쳐가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구체적 목적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려는 뜻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

(1) 거룩한 공동체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 속에서 불러내셔서 거룩한 공동체에서 거룩한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다르다, 구별되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세상 속에서 부르셨습니다. 교회라는 말의 뜻도 Call out, 불러 내었다는 뜻을 갖습니다.

  여러분, 왜 불러 내셨습니까?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 (레19:2)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레위기의 주제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자주 이 말씀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도 아버지의 거룩함을 닮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며, 거룩한 삶을 항해 끝없이 자라가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을 날마다 거룩하게 정비하고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정비소가 교회입니다.
  이 뜻을 깨닫고 응답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거룩함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십시오.

(2)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의 전투적 공동체

  둘째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명의 전투적 공동체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16:16)라고 즉각 고백합니다. 이 신앙고백을 예수님은 기뻐하시면서 "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십니다. 이 신앙고백을 가진 반석 위에 예수 공동체를 세우시고 "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선언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이 신앙고백의 복음을 전파하며 사람과 세상을 변혁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써야" 합니다(엡6:18). 이 때만이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 전쟁에서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를 누르고 포로되게 하여 괴롭히는 악령의 세력을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나 세상에서 배운 것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는 예수 교회에서 받은 성령의 능력으로서만이 대적할 수 있습니다. 그 예수 권능으로 우리는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말할 수 있습니다(엡6:19).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와 선교 공동체에서 얻은 권능으로 마귀와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인 "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며 눈 먼 자를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공동체로서 세워 나가야 합니다.

  교회는 감당해야 하는 이런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해야할 일을 갖고 모인 사명의 전투적 공동체입니다. 그 사명으로 바로 복음의 능력있는 중인이 되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여서 온 세상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응답하게 해야 합니다. 더 넓은 세상속에 하늘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 잃은 양 한 마리가 돌아오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사명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큰 기쁨입니다.

(3) 사랑의 공동체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서로 돕고 붙들어 주는 사랑의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시고 그 백성들이 세상의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 삶은 바로 사랑의 삶입니다.

  험한 인생 길 헤쳐 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서로를 붙들어 주고, 서로 격려해 주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요한1서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사랑의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 안에 사랑이란 단어가 약 43회 나타나는데 4:7-5:3에 이르는 말씀에서만 32번이나 나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사랑함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된 표식임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일찍이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1) 첫째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세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들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실을 일깨우면서 본문 4:11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렇게 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2) 그렇다면 우리의 사랑도 주님처럼 먼저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때에도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우리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먼저 관심을 표해오니까, 그제서야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랑이 아닙니다.
여러분, 기다리시지 말고 먼저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손을 내미시고, 먼저 관심을 보이시고, 먼저 따뜻한 미소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먼저 베푸는 사랑의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3)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사랑 받을 자격의 유무를 따지지 않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안에서 보여 주어야 할 사랑도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물론 성격적으로 혹은 배경이나 사회적인 신분 때문에 더 가까운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합니다. 자격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벽을 넘어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으려면 이 한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때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4) 한가지 더 사랑의 삶을 위하여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랑이전에 적어도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일들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가십, 험담을 통하여 상처받는 일은 사라져야합니다.

  오늘의 한인교회가 사랑이전에 해야할 일은 상처주지 않는 일입니다. 책임없이, 확인없이 하는 말 한마디가 불신과 의혹, 상처와 아픔을 주는 일을 이제는 넘어서야 합니다.

  로스앤젤레스 침례교회를 섬기시는 박성근 목사님께서 작년 7월 크리스챤 투데이라는 신문에 기고하신 “험담은 위험한 게임” 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은 사상을 논하고 평범한 사람은 시사를 논하며 천박한 사람은 사람을 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험담하기를 즐겨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는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이나 덕담을 하면 좋긴 하지만 그것이 고소하고 재미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씹는 일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상대적 우월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누군가의 험담을 하는 동안만은 자신이 상대보다 뛰어난 사람 같이 느낍니다. 물론 착각이지만 말입니다.
셋째로, 다른 사람들이 귀를 쫑긋하며 자신 주변을 둘러쌉니다. 마치 기자 회견장의 유명인사 같이 비밀 보따리를 풀어놓을 때 그는 스스로 중요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험담을 즐기는 이유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험담을 용인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부추기기까지 합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합니다. 첫째는 말하는 당사자입니다. 험담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일에 사용하라고 말을 주셨는데 그것을 사람들을 이간시키고 상처주는데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험담을 계속하면 자기 자신에게도 해가 돌아옵니다. 험담을 늘어놓으면 순간적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 같지만 결국 모든 사람의 눈 밖에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지체에게 상처를 주면 결국 예수님의 몸에 두 번 상처를 준 꼴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눈이 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을 때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했습니다. 결국 성도를 핍박하고 상처를 입히는 것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상처입히는 것이 됩니다. 그런 행위는 반드시 불구가 되는 대가를 치루게 됩니다. 
둘째는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죽습니다. 그 정보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일단 험담의 대상이 된 사람은 회복이 불가능한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 입니다.

  셋째로 험담을 듣는 사람이 죽습니다.
  탈무드는 험담을 하는 것 보다 듣는 것이 더 나쁘다고까지 말합니다. 관련된 세 명의 당사자들 중 듣는 사람만이 그 말을 멈추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이미 악담을 하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상황을 제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친절”입니다. 참 사랑은 함께 먹고 시간을 보내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최선을 말해주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고전 13:5).

  뉴욕에서 목회를 하시는 어느 목사님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능하면 아름다운 주제, 꽃이나 산 혹은 물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은혜롭지 않겠는가 했더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유, 목사님도 그런 말씀 마세요. 사람 이야기하는 맛에 교회 나가는데 어떻게 사람이 사람 이야기 안하고 살 수 있나요. 저는 사람 이야기 안하고는 못 사는 개성을 가졌거든요.” 또 다른 한 분은 “목사님, 여성들만 모이면 어디 그런가요. 얘기를 하다보니 다 그런 거지요. 그런 것도 여성미라고 생각해 두세요.”
그 때 목사님은 속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런 개성은 개 같은 성미, 그런 여성미는 여우 같은 성미인데 돼지같아 잘 살아보라"고. 왜냐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귀한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돼지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데이 라는 사람은 “세 황금문”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하고 있습니다.
  " 말하기 전에 세 황금문을 지나게 하라. 다 좁은 문들이다. 첫째문은 '그것은 참된 말인가?', 둘째문은 '그것은 필요한 말인가?' 네 마음 속으로 참된 대답을 하라. 마지막으로 가장 좁은 문은 '그것은 친절한 말인가?'이다. 이 세 문을 지나왔거든 그 말의 결과가 어찌될 것인지 염려하지 말고 크게 외쳐라. "
바울은 말합니다. "무륵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4:29).

우리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한 가족이 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진실되이 사랑함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특별히 덕스러운 언어생활은 이웃 사랑의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3] 결 론

  교회는 거룩함의 공동체이며 사랑의 공동체 그리고 사명의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사람들과 이 세상을 새롭게 세워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교회가, 곧 부름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진정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위해서는 교회와의 깊은 관계를 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뜻이 있으셔서 세우신 교회를 신실되이 섬기고 세워 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중요한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서로 예수 사랑과 사명감의 열정으로 뜨거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뜨거운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의 길을 갑시다! 이것이 당신이 행복한 성공자의 길을 가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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