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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호숫가를 건너서(막 6: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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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종 목사 (울산소망교회)

할렐루야!
지난주간 어떤 일로 많은 유혹을 받으셨습니까?
그리고 그 유혹을 어떻게 이기셨습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수많은 유혹과 욕망을 잘 이겨내시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막 6:3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배척이 무엇입니까?
반대하여 물리쳐버린다.
반대하여 내 쫓아 버린다의 의미가 바로 배척입니다.
막 3장에서는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단순히 형님 저 좀 보세요! 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형! 빨리 나와!
응! 거기서 뭐하는 거야!
아! 장남이면 어머니 모시고 살아야지 아! 거기서 귀신들린 사람, 수많은 병자들 아 거기다가 이방 사람들까지 함께 있어! 이거 누구 가문 망신시키고 혈통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거야 뭐야!
아! 빨리 나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더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의 욕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예수는 미쳤어 미쳤어!
아 귀신들렸다니까! 저런 능력을 행하는 것은 파리의 신을 섬기는 바알세불의 힘을 의지해서 저러는 것이라니까?
귀신이야 귀신!
·고향에서도 배척을 당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사회 지도층들로부터도 미쳤다고 합니다.
·심지어 가족들에게 마저 비난을 받고 계신겁니다.

왜?
왜? 그런 비난과 오해를 받으셨을까요?
53절을 보십시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대고"
54절
"배에서 내리니"
"건너가 배에서 내렸다" 바로 호숫가를 건너셨기 때문입니다.
야! 거 신선이 따로 없네
배 타시고 물놀이하시면서 호숫가 바람 스치며 신났겠네! 정말 신나는 물놀이였을까요?
그런데 도착한 곳이 어디라구요?
게네사렛!
유대사람들은 아예 발도 들여놓지 아니하고 짐승취급을 당하면서 살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게네사렛 입니다.
그래서 그곳에 도착하시자 마자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이와 비슷한 장면이 막 5장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호숫가를 건너시니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셨다.
그런데 그 귀신이 얼마나 센지 귀신의 이름이 군대였고 그 귀신의 숫자가 자그마치 6천이나 되었다 하였습니다.

다시 막 6장으로 되돌아 와 봅시다.
56절에는 이렇게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새 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이든 읍내이든 농촌이든 어디든 가시든지 사람들을 병자를 시장에 데려다 놓고 예수님의 옷깃이라도 만질 수 있도록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을 만진 사람들은 모두 병이 나았습니다"

호숫가를 건너시니 군대라는 귀신을 만나게 되셨습니다.
호숫가를 건너시니 그 어디든 병자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하더라.
호숫가를 건너니 휴양지가 기다리던가요?
호숫가를 건너니 화려한 신문 기자들이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제일 큰 문제는 도착하신 그 곳이 유대 땅 이스라엘의 땅이 아닌 이방사람이 사는 지역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원수지간으로 지냈던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곳에 가셨으니
·예수님의 형제들의 입장에서 보면 가문의 수치요. 망신이고
·바리새인들이 보기엔 민족의 반역자였고
·고향사람들에겐 배척을 받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호숫가를 건너면 비난받으실 줄을 모르셔서 그곳으로 건너가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지역에 사는 여인을 보고 "개에게 줄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사회적 상황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비난과 배척을 받아야하고 나 자신의 삶에도 엄청난 손실이 뒤따르기 때문에 그 당시의 사람들은 호숫가를 건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앞길을 가라 막는 호숫가는 어떤 모습일까요? 그래서 우리가 건너기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호숫가는 무엇이 우리를 가라 막고 있는 것입니까?
현대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은 교회가 너무 개인의 시간을 방해하고 가족이 즐기는 시간을 빼앗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독교 잡지의 통계를 보니까 현대 교회가 너무 물질적으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 1위에 기록되어 있더군요.
혹시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전도하자. 기도하자. 헌신하자. 하면서 내 삶을 귀찮게 한다고 생각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믿음의 사람이 건너야 할 호숫가를 건너지는 않으면서 그 주변만을 맴돌고 있다면 우린 예수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예수님! 예수님은 왜 호숫가를 건너셨습니까?
그 비난과 멸시와 박해와 오해를 받으실 그 호숫가를 왜 건녀셨나요?

그런데 그런 그 곳에 왜 가셨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 사람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이방사람이요. 귀신이 들렸어도 그 몸이 병에 걸려서 지금 시장 바닥에 널려 있는 사람들이라도 예수에게만 나아오면 누구나 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평등의 메시지를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족관은 이미 혈통이 중심에서 떠난 것이었습니다.
문 밖에서 예수를 향해 나오라는 소리치는 피 섞인 형제들을 보고 주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형제며, 누가 내 가족이냐?"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내 뜻대로 행하면 그 사람이 바로 내 가족이다"
문밖에 있다는 것은 위치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피가 섞였을지라도 고향 사람일지라도 지연, 혈연, 학연이 같아도.
아니 집사, 권사, 장로가 되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기를 꺼려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될 수 없다는 강력한 가족난의 변화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왜? 문밖에서 서성대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까?
문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뭐라고 합니까?
미쳤다. 귀신들렸다. 정신 나갔다. 가문의 망신이나 조국의 배신자다라고 욕설과 비난을 퍼붓지만 예수께 나아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세요.
막 6:56에서는 "옷 가에라도 손을 대기를 간구했다"
우리는 예수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 서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풍기는 저 땀 냄새를 맡아보실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이 입에서 튀어나오는 침방울을 맞아 보신 적이 있나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삭이시는 밀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실 때 펄럭이는 옷자락에 손을 대 보실 수 있었던가요?
시 73:28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라"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8:2에서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하기를 즐겨 하나이다"하였습니다.
또 전도서 5:1에서는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도 호숫가를 건너지 않습니다. 다른 것이 더 재미있고 더 소중하다고 경정했기 때문입니다.

주일 낮에 주시는 꿀 송이 같은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일 저녁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찬양의 제사로 가까이 하시고 새벽의 만나를 받기 위해서 가까이 하다가 새벽엔 만나로 낮에는 구름기둥의 밤에는 불기둥의 은총을 누리며 때를 따라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혈통이 좋아야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학연도, 지연도, 혈연도, 가문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는 사람.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에요.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건너신 이후 어디를 다니셨는가를 보면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막 5:1 거라사인 지방 다른 말로 "가다라"라고도 불리었습니다. 두로, 시돈, 데가볼리.
디베랴, 벳세다, 가버나움, 고라신, 마가다, 뮤리아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도시 이름은 눈에 띄질 않습니다.
모두 소규모의 볼품없는 마을의 이름만이 나옵니다.
오늘 6장에 나오는 게네사렛에서도 새 번역에 보면 마을이든 읍내이든 농촌이든 하면서 정말 알아주지 않는 지역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대접받지 못한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에서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곳에서 귀신을 쫓아 내주셨고
그곳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곳에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하였습니다.
막 7:31절을 보세요!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이런 지역, 이런 사람들도 우글거리는 곳으로 가셔서 만난 것입니다.
지금도 지방은 소외된 지역입니다. 지방자치제가 되었지만 아직도 문화적으로든 소외되어 있고 경제적으로도 제 혜택을 받지 못하고 교육적으로도 뒤떨어져 있어서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현저합니다. 옛날에 지방에서 벌어 서울을 먹여 살린다고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지방은 한마디로 착취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람을 우습게 본거죠!
옛말에 촌놈이라고까지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대접받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찾아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
계시록 22장에서는 "아멘! 주 예수여! 오서 오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모시어 들이세
주님 모셔들인다는 말은 예! 아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입니다. 그렇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거라사에서는 군대 귀신들인 사람을 고쳐 주시는데 신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 당시 이방 지역에서는 돼지를 기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불결한 짐승이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몰래 돼지를 키웠으니 이건 불법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돼지를 몰살시켜도 법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죠.
한마디로 돼지는 더럽습니다. 불결합니다. 그래서 유대 사람, 이방 사람 모두 다 돼지를 증오의 짐승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한국 사람들은 이런 돼지를 왜 그렇게도 좋아하는 걸까요? 삼겹살 말이죠!
중요한 사건은 예수님께서는 소외된 지역, 버림받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257장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나 주께 나오라 어서 와서 주의 말씀 들으라
옛날 찬송가에는
"아무나 오게! 아무나 오게!"라고 하였죠
난! 부모에게 어릴 적 사랑을 받지 못했어
아들 낳을 때까지 낳으니까 내가 세상에 낳지! 아 어릴 적 새 옷 한번 못 입고 제대로 된 여자 옷 한번 못 입고 머리한번 기르지 못하고 컸다니까.
아! 난 사람들에게 왕따 당하고 있어!
난 정말 남편에게도 당신 왜 그렇게 뱃살이 나왔어 아예! 이젠 옷을 넣어서 못 입는구먼 왜 겉옷을 꺼내 입는가 했더니 베둘레 햄이야 베둘레 햄! 정말 난 먹을 때마다 눈치 보이구 이거 봐 삼겹살 집으면서도 손 떨리잖아!
아! 시댁에선 혼수 적게 가지고 왔다 그러지 이젠 애들까지도 날 우습게 본다니까.
난 정말 직장도 불안하고 미군이 12,000명이나 감축된다는데 이러다가 또 6·25나면 어떡하지?

호숫가를 건너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보시지 않으시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로다"
하시는 예수님을 예와 아멘으로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기적이 일어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87세에 소천 하시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최고의 행복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항상 함께 계셔 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역이나 인종이나 국가는 가리지 않고 찾아 가셨습니다.
주님은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의 임마누엘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행해 주신 것입니다.
내일이면 6월이군요.
걱정, 근심, 염려를 끌어안고 6월로 건너가지 마십시다. 예수 없는 호숫가는 풍파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내 염려를 씻어 주시려고 호숫가를 건너고 계신 예수님을 예와 아멘으로 모시고 우리도 문제 해결 받는 6월! 승리의 6월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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