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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의 과정 (요 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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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존 캅 목사 (창천교회)

  이 곳을 방문하여 한국 감리교회의 활력을 체험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오늘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구원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신실하고 경건한 기독교인들이 가끔 제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도대체 구원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라고 되묻곤 합니다. 그러면 질문자는 제가 학자연하면서 말꼬리를 잡는 게 아닌가 하여 언짢게 느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질문자들이 보기엔,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의미는 너무도 분명한데 제가 왜 머뭇거리는지 대체로 의아해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의 물음은 매우 진지한 것입니다. 저는 그 질문자들이 어떤 의미로 구원을 언급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기 원합니다.

  성경에 단 하나의 일관된 흐름을 지닌 구원의 의미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이란 말은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쓰여질 뿐, 성서주석이나 신학사전을 통해 면밀히 검토하더라도 깔끔하게 정리된 구원의 개념을 알아내기란 매우 힘듭니다. 세상살이 가운데 구원이란 여러 상황을 일컬을 때 사용됩니다. 예컨대, 물에 빠졌다가 구조되다, 거의 파산 직전에 벗어나다, 군대가 패전을 모면하다 등이지요. 성경에 언급되는 구원은 이 모든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해서 특별히 신성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물론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묻는 이들은 세속적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의미의 구원을 염두에 두고 있겠지요. 저는 이 시간 구원이란 용어가 나타난 요한복음의 몇몇 구절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구원이란 표현은 요한복음보다는 사도 바울의 서신에 훨씬 더 많이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에 따른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다만 의롭다 인정받았고 그리스도와 화해했으며 구원받기를 염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울이 말한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학자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저는 바울의 구원관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가 체험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로마서에 따르면,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영화롭게 될 때 모든 피조물은 구원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고백에 따른다면 저는 모든 세상의 구원을 희망하면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구원은 현재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장차 이루어질, 말하자면 미래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에 동참하고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구원, 즉 완전한 영화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다만 그렇게 되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이에 비해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꽤 다른 그림을 보여줍니다. 요한은 구원받았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 않았지만 오늘의 본문(요한복음 3장 17절)에는 구원이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15, 16절의 영생(영원한 생명)이란 개념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생과 구원은 동일한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 영생이란 개념을 그가 바라고 있었던 놀라운 역사의 종말을 일컫기 위해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바울과 같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우리의 삶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役事)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한가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지금 여기에서”에 대한 강조는 요한복음을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 있는 복음서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만일 제가 요한의 말씀, 즉 우리 안의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습니까”란 질문에 답한다면 “예, 구원받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 의지하면서 사도 바울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하기엔 뭔가 꺼림칙한 게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역사 속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죄의 권세가 남아 있다고 말합니다. 슬픈 일이지만, 교회사를 살펴보면 강력한 죄의 권세는 고위 성직자나 이른바 성인(聖人)들이라고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우리는 의로운 동시에 죄인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그의 고백은 단지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감리교 창설자 존 웨슬리는 이러한 루터의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으며 루터의 언급이 요한복음에도, 사도 바울의 생각에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웨슬리는 그리하여 지속적인 죄의 권세에 대해 더욱 진지하게 고민했고, 결국 의롭다 칭함(의인, 칭의)을 받는 것과 거듭남을 연결시켰습니다. 웨슬리는 회개를 통해 우리가 의롭다 인정받고 새로운 삶에 돌입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죄의 권세가 아니라 성령에 붙잡힌 삶을 위해선 끊임없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 성화 과정의 마지막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는 것, 즉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웨슬리가 말하는 구원은 바울의 그것에 가깝습니다.

  공관복음을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이란 표현을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구원은 궁극적인 것, 즉 미래에 이루어질 것을 의미했습니다. 구원이란 희망하는 것으로, 사도 바울이 이해한 바도 그와 비슷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 가운데 훨씬 더 중요한 용어는 바실레아 데우(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어로 하나님의 왕국(kingdom)이라 옮길 때, 이는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바실레아라는 것이 여성 명사임을 감안한다면 지나치게 남성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저 자신은 그것을 “하나님의 연방 또는 공화국”(commonwealth of God)으로 풀이합니다. 모든 이들이 동참하는 잔치, 평등한 기초 위에 베풀어진 잔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체포당한 뒤 예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는 의미는 우리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과연 “구원받았는가”를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화국 개념에 비춰본다면 그 대답은 “아닙니다”일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관계에서 정의로운 것, 올바른 것에 대한 히브리 예언자들의 전통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다”는 기도를 읊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많은 비유들은 “도적과 같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선 이 세상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하잘 것 없으며 모든 이들이 풍부한 인간 관계와 우애 속에서 인정받을 것이며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선 종교적 장벽이나 경계가 사라질 것입니다. 가족의 유대조차도 더 큰 공동체의 관계 속에 합쳐질 것입니다. 구성원들은 서로 판단(심판)하지 않을 것이며 행동의 규칙, 법규들은 인간의 진정한 필요에 따라서만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 하나님의 나라와 무척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상이지만, 이미 우리는 어느 정도 그 속에 살고 있으며, 그 이상을 구현하려는 공동체 속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이뤄질 완전한 구원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 승리의 세상이 아무리 멀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 속에 살고 있음을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현재의 구원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지속적인 축복이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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