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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뛰어난 종 오네시모 (빌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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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김 성덕 목사 (내일교회)

오늘 본문말씀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비천한 노예에 불과했던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는 뛰어난 종 오네시모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비천한 사람도
주님의 손에 붙들리면 새사람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확신하는 귀한 말씀이 되시기 바랍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쓴 편지인데
바울이 빌레몬서를 쓰게된 동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고대 로마는 노예의 노동력 위에 지탱되던 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로마 제국 내에만 약 600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건 자유인들보다 노예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시의 인구 밀도를 고려할 때,
그 숫자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 많은 노예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무서운 국법이 아니고서는 안 되었습니다.
따라서 노예들의 인권은 전혀 고려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말을 하는 재산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체벌은 물론이고 고문이나 사형까지도 마음대로 가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친 노예가 있다면,
그들은 전문적인 인간 사냥꾼들에게 추적될 것이고,
그렇게 붙잡혀 온 노예들은
이마에 도망자를 상징하는 Fugitivus(영, Fugitive)의 머리글자인 F자를 인두로 새겨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나마도 우호적인 주인일 경우이고
대게는 십자가에 매달려 천천히 말라죽은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한 비극적 운명을 지닌 노예들 중에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여 노예가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노예들이 부모로부터 신분을 이어받거나,
혹은 가산이 몰락하여 팔려오거나,
혹은 전쟁의 포로가 되어 끌려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오네시모도 그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참으로 비참한 운명을 지고 버겁게 살아가는 비참한 노예,
그 중의 한 사람인 오네시모였습니다. 그의 주인은 골로새 또는 라오디게아에 살던 <빌레몬>이란 사람입니다. 
골로새에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가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목회자는 ‘아킵보(Archippus)’라는 분이었는데,
그에게는 부유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는 넓은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해서
골로새 교회는 그 집에 모이곤 했습니다.
그 돈 많은 아버지, 목회자 아킵보의 아버지의 이름이 바로 빌레몬입니다. 그는 일찍이 에베소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초기 기독교인이 되었던 사람이고,
또 열심이 있어서 자신의 집을 교회 처소로 제공하기도 하였으며,
아들 아킵보를 목회자로 세운 신앙의 사람입니다.
오네시모는 바로 그 빌레몬의 노예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의 곁을 떠나 도망을 치고 맙니다. 그것도 그냥 도망을 친 것이 아니라
어떤 실수를 해서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혔던지,
아니면 주인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 후로 노예 도망자 오네시모, 그것이 오네시모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에서 도망친 노예는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인생이었습니다. 전문적인 인간 사냥꾼들이 그를 추적할 것이고,
어느 사회, 그 누구도 그의 신분을 보장하거나 돌보아 줄 사람은 없습니다. 도망자의 불안한 삶, 그것도 노예의 처지에서 탈출한 그 인생은 그러니 얼마나 불안한 인생이었겠습니까?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던 오네시모가 간신히 로마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는 넓고 사람도 많아서 은신하기에는 아마도 가장 적절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하늘이라고 마음놓고 지낼 곳이 있었겠습니까?
그 누가 있어 도망자 노예를 따뜻하게 맞아줄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토록 불안하게 하루하루를 살던 오네시모가
재판을 앞두고 감옥에 있는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은 이제 얼마 뒤면 네로 황재에게 재판을 받게 될 것인데, 네로에게 재판을 받는 다는 것은 거의 죽음이나 진배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도망친 노예인 자신보다 어쩌면 더욱 불안한 삶을 살고 있을건데 아무리 보아도 그분에게는 불안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을 것이고
오네시모 또한 그 인품에 마음이 끌려 스스로 바울의 시중을 들었을 것이고 마침내 자신의 속사정을 솔직하게 다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건 정말 목숨을 건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이 도망친 노예라는 사실이 누구에게는 발각되는 날이면
자신은 분명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바울은 그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오네시모를 격려하고 위로했던 것입니다.
아마도 오네시모는 평생 그런 사랑을 받아본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는 노예에게 사랑을 베풀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를 마치 아버지가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오네시모를 직접 아들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위대한 바울의 사랑 앞에 오네시모의 굳은 마음은 녹아 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몇 통의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와 두기고 편에 골로새 교회에 보내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골로새서’ 입니다.
그런데 골로새는 바로 오네시모가 도망친 곳이었습니다.
사실 오네시모로 하여금 골로새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은
그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도망자 노예가 받을 처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것은 가장 고통스런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울은 따로 한 통의 편지를 오네시모에게 주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찾아가 용서를 빌라고 하였습니다.
그 편지가 바로 오늘의 본문인 ‘빌레몬서’인 것이다.
편지 내용을 다시 간단하게 요약하면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와 화해하고 오네시모를 영접하도록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말에 순종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목숨을 건 일이었지만 바울을 믿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오네시모는 그렇게 자기 발로, 도망쳐 나온 골로새,
그리고 그 곳에 있는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이 오네시모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오네시모는 주인 빌레몬에게 물적인 손해를 입히고 도망친 노예입니다.
도망친 노예는 그 주인에게 되돌려주어야 하며
그 노예는 최고 사형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오네시모를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서 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무척 사랑하며 신뢰했습니다.
얼마나 신뢰했던지 12절에 [ 나의 심복 ] 이라고 말합니다.
심복이란 [ 나의 심장, 나의 마음 ] 이란 뜻입니다.
비록 도망친 노예였지만 바울은
그를 가리켜 10절 [ 옥중에서 낳은 아들 ] 이라고 까지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오네시모는 과거의 오네시모가 아니라 <4>
세상 노예로서의 종 오네시모가 아닌
전도자 바울에게 유익한 하나님의 종 오네시모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얼마나 변한 사람인 것을 언급하면서
어떻게 변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과거의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해를 끼친 아무 쓸모짝없는 도망친 노예이지만
바울을 만난 지금은 과거의 오네시모가 아니라 새 오네시모가 된 것입니다.
11절에 [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
이 표현은 오네시모라는 이름과는 관계가 있는 구절입니다.
오네시모는 희랍어 Onesimos에서 왔는데 그 뜻은 '유익한 사람'입니다.
오네시모(유익한 자)가 그 이름 값을 못하고
전에는 빌레몬 그대에게 쓸모없는 자였지만
지금은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유익된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야 제 이름 값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고 싶었지만
노예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는 게 도리라고 생각하여
돌려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선처를 당부합니다.
12절 [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
나를 대하듯이 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진로가 달라지고, 그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스페인 출신의 유명한 화가 중에 피카소가 있지요.
이 사람은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그가 그린 그림 한 점은
우리 돈으로 300억 원을 호가합니다. 엄청난 금액입니다.
얼마 전 피카소의 미공개 작품 한 점이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경매되었는데, 자그마치 293억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에 1943년에 만든 ‘황소머리’라는 조형물이 있습니다.
그것도 피카소가 만든 작품이니 얼마나 비쌀지,
아마도 족히 300억원은 훨씬 넘는 작품일 겁니다.
하지만, 그토록 비싼 가격에 비해 그 재료는 정말 형편없는 것입니다. 1943년 길을 가던 피카소가 우연히 버려진 자전거 한 대를 발견하고는 그 자전거에서 안장과 핸들을 떼어냈습니다.
그리고 그 안장에다가 핸들을 거꾸로 붙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버려진 자전거 안장에 손잡이.
그리고 그 이름을 황소머리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버려졌던 그 자전거,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자전거가 피카소의 손을 거치는 그 순간 수 백 억이 넘는
초고가 미술품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 것이다.
오네시모.
도망친 노예,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
죽든 말든 신경써주는 사람 하나 없는 버려진 인생....
그러나 그가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되자, 그는 위대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무익했던 자가 유익된 자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도망친 노예에서, 나중 에베소의 감독으로 탈바꿈하게 된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네시모를 두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간곡한 당부를 합니다.
그 간곡한 당부가 무엇입니까?
13절-15절 말씀을 의역한다면
[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하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의 마음입니다.
나는 그를 내 곁에 두어서, 내가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동안에
그대를 대신하여 나에게 시중들게 하고 싶었으나,
그대의 승낙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렇게 잠시 내 곁을 떠나 그대에게 보내는 것은
당신의 용서와 화해를 한 후 내 곁에서 평생 주를 섬기기 위함입니다. ]

바울은 이렇게 간절하게 오네시모를 변호하고 또 선처를 부탁하였습니다.
오네시모를 향한 바울의 극진한 사랑이 구구절절이 스며있는 내용이다.
한 사람이 변화되는 되는 훌륭한 멘토의 도움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용서와 화해의 선처만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오네시모를 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고 당부를 하면서
특히 오네시모를 가리켜 굉장한 칭찬 한마디를 합니다.
그것이 뭡니까?

바울을 만난 오네시모는 바울의 가르침과 그의 인격을 통해
전의 오네시모가 아니라 변화된 오네시모가 되었습니다.
그 변화된 모습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16절에 [ 이후로는 종과 같지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
오네시모 이제 과거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종에서 뛰어나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종에서 뛰어나 하는 말은 종들 중에는 특별한 종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의 제목을 <뛰어난 종, 오네시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본래는 이 세상에서 마귀의 종노릇하며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특별한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종이 된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특별한 주님의 종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주인에 신뢰받는 하나님의 집에 상머슴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들이 들어온 후
세브란스 병원이 설립되고, 의과 전문대학이 세워지고
초기 이 대학을 졸업한 후 외과 의사가 되었던 <박서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아버지의 이름은 <박성춘>으로서 직업은 백정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백정들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서러움 때문에
[ 내 아들만은 어떻게 공부시킬 수 없을까? ] 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선교사들이 학교를 세워
학생들에게 밥 먹여주고, 수업료도 받지 않고, 신분에 상관없이 입학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들 서양이를 서양학당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 박성춘이 장티푸스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요즘 장티푸스는 병도 아니지만 그 시대에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하면 그 집을 불태우고, 집에 새끼줄을 치고, 출입을 차단하는, 무서운 전염병이었습니다.
아버지 박성춘이 갈수록 심해지고 "죽었다, 살았다" 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 아들 박 서양이 세브란스 병원의 원장 <어비슨> 선교사를 찾아갔습니다.
[ 선교사님. 제 아버지가 장티푸스에 걸려 열 때문에 정신을 잃고
죽어 가는데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어비슨 선교사가 박성춘의 집에 가서 주사와 약으로 치료했더니 열이 내려가고 후에 아버지는 깨끗이 살아났습니다.
살아난 박성춘은 결심했습니다.
[ 선교사가 나의 은인이다. 이 선교사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으리라 ] 박 성춘은 아들을 통해 선교사를 소개받고,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한 박 성춘은 같은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백정들을 기반으로 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세워진 교회가 현재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바울의 말로 표현한다면 <7>백정에서 뛰어나 한국 초대교회에 장로가 된 박 성춘
백정 박성춘은 그후 은행가로서 재력을 얻었고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어 교회에 충성을 했다고 합니다.
아들 박성양은
1908년 세브란스연합의학대학의 제1회 졸업생 7명과 함께
대한민국 의사면허 3번을 수여 받고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를 하다가
만주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생을 마칩니다.

특히 오네시모에 대해서는 천주교회에서 성자로 추대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천주교 문헌 가운데, <성 예로니모>에 의하면,
그후 오네시모는 교회 말씀의 설교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 감독까지 되었으며,
십 수 년이 흐른 후 네로황제에 의해 골로새 교회가 핍박에 처해져
이미 은퇴한 빌레몬과 아내 압비아와 당시 골로새 교회의 감독이었던 아들 아킵보가 로마의 원형 경기장에서 죽음을 당하게 될 때
이때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던 오네시모는 곧장 모든 것을 버려 두고
로마로 달려가 빌레몬과의 해후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믿음으로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알려지지 않은 묘비에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 오네시모 ! 그는 영원히 주인 빌레몬과 예수님을 따라갔다 ]

이런 오네시모의 변화에는 바울의 남다른 사랑의 수고와 애정이 있었습니다.
오네시모에 대한 애정이 어떻게 표현되고 있습니까?

17-19절에 보면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각별히 대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 내가 이렇게 친필로 당부를 합니다.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하세요
만약 저가 네게 불의하였거나 빚 진 것이 있으면 내가 갚아 주겠습니다. ]

바울의 그 무엇이 뛰어난 종 오네시모로 변화케 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오네시모에 대한 바울의 사랑의 배려 때문인 것입니다.

어느 몹시 추운 저녁에 한 노인이 강을 건너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강은 무릎 정도의 깊이였지만 군데군데 얼어 있어서 함부로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살을 에는 듯한 북풍한설 속에서 노인의 몸은 점점 뻣뻣하게 얼어갔습니다.
그때 노인은 얼어붙은 길 저편을 질주해 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었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말을 탄 사람들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말을 얻어 타면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노인은 초조해 하며
몇 명의 신사들이 말을 타고 모퉁이를 돌아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첫 번째 사람이 앞을 지나가는 데도
노인은 도움을 청하려는 아무런 손짓도 시도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서 세 번째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노인은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눈사람처럼 서 있는 노인 앞으로 말을 타고 다가왔습니다.
이 신사가 가까이 오자 노인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 선생님, 이 늙은이를 강 건너까지 좀 태워다 주시겠습니까? ]
[ 어서 올라타세요 ]
노인의 몸이 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그 신사는 말에서 내려 노인이 말에 올라타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노인을 강 건너로 데려다 주었을 뿐 아니라
조금 떨어진 노인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작고 안락한 노인의 오두막에 도착했을 때
말에 탄 신사가 호기심에 차서 물었습니다.
[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지나 갈 때는 아무런 부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까이 가자 얼른 태워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토록 추운 겨울날 밤에 당신은 계속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에 오는 나에게 말을 태워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만일 내가 거절했다면 당신은 그곳에 그냥 남겨졌을 것 아닙니까?"
왜 그랬습니까? ]
노인은 천천히 말에서 내린 뒤 그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 나는 이 지방에서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람들을 잘 안다고 믿고 있지요
나는 말을 타고 오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내 처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태워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눈을 보았을 때
나는 그곳에 친절과 자비심이 비친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때 나는 알았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마음이 곤경에 처한 나를 도와주리라는 걸 말입니다 ]
그 신사는 노인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노인에게 말했습니다.
[ 당신이 해 주신 얘기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내 자신의 생각에 열중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불행한 처지를 망각하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이 이야기는 미국 제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미국 국민들로부터 존경받았던 비결이라고 합니다.

사랑의 섬김이 뛰어난 종 오네시모를 낳았고
오네시모 역시 섬김의 종으로
우리에게 큰 감명을 주는 신앙적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럼 오네시모를 통해 우리에게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일까요?

바울의 이 부탁을 받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하였는지는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경 빌레몬은 바울의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고,
분명 오네시모를 자유인으로 석방해서 다시 바울에게 돌려보냈을 것입니다.

사실, 빌레몬서는 성서 가운데 가장 짧은 글입니다.
그 내용도 다분히 개인적인 것으로
성서에 편입될만한 교리적 내용이나 교훈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편지가 당당하게 66권 가운데 하나가 된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성서학자들 중에는 사도바울의 서신들이 수집되던 당시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의 한 유명한 감독의 이름을 연관지어 생각합니다.
감독이란 성직자들의 수장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당시 에베소 교회의 성직자 대표인 감독의 이름이 바로 오네시모였습니다. 유추해보자면,
바울의 편지 빌레몬서를 통하여 오네시모는 자유인이 되어
바울에게 돌아갔고, 그리고 바울은 얼마 뒤에 순교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그 뒤로도 열심히 신앙 생활하여
마침내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때마침 바울의 서신이 수집될 즈음이었기에
빌레몬서도 함께 수집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많은 서신을 수집하였던 교회가 바로 에베소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6월은 사역 헌신의 달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다 오네시모와 같이 세상의 종이었습니다.
세상 유행을 좇고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붙들려 있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상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오네시모를 뛰어난 종으로 존귀케 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지시기 바랍니다.
뛰어난 백성 박성춘을 들어 쓰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도 들어 쓰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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