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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존경합니다 (눅 7:3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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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근두 목사 (울산교회)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그리고 복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실천하기 50일 시리즈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 다섯 번째 설교로서 또 다른 사랑의 면모들을 살피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존경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존경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28장이나 레위기 19장에는 연세가 드신 어른들을 존경하라고 말합니다. 또 신약 에베소서 5, 6장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상호 복종하고 존경하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가 묵상하며 암송할 구절은 베드로 전서 2장 17절 상반절이 되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존경하며 신앙의 형제자매를 사랑하십시오.”(벧전 2:17상, NLT)

존경이란 행동으로 상대방의 가치와 명예를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무례하게 대하게 됩니다. 가끔 우리는 “무시해버려”라는 말을 듣기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존경하는 것은 그 분에 대한 가치와 명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면 사람들은 자존감을 회복하고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반대로 존경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서는 원기를 회복하거나 좋은 느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는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존귀히 여기는 면에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읽었던 본문을 살펴보시면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을 존귀히 여기셨는지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존경의 네 가지 표지를 살피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표지는 무엇일까요?


1. 자기 말을 중단하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멈춤 표시판

오늘 이야기를 보면 정말 우리 주님은 놀라운 경청자이십니다. 남의 말을 탁월하게 잘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주님은 이 여인에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시몬에게도 귀를 기울이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생각을 들으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입술의 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귀를 기울이십니다. 입으로 나오는 말만 아니라 마음에 담아둔 말까지도 경청하십니다. 보십시오. 시몬도 그렇고 이 여인도 입술로 말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들으셨습니다.

한 마디의 말도 이 여인은 입 밖에 꺼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에게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눈물로 발을 씻기는 행동은 입술로 나오는 어떤 말보다 더 크게 무엇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것은 결코 입에서 나오는 말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눈빛을 읽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눈으로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에 있는 것을 들을 줄 아는 귀가 필요합니다. 행간을 읽는 기술도 필요합니다. 침묵의 순간에도 사실은 말하지 않는 것도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여인은 지금 눈물을 통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눈물로 발을 씻기는 행동이나 발에 퍼붓는 입맞춤도 무엇을 강렬하게 말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 여인이 가진 많은 말을 듣고 있던 유일한 사람은 그 가운데서 예수님 혼자 밖에 없었습니다. 본래 남자들이란 말을 잘 못 듣는가 봐요. 그래서 어떤 책을 보니까 제목이 “말을 잘 못 듣는 남자, 지도를 못 읽는 여자”이런 책이 있더군요. 남자의 특징이 말을 잘 듣지 못 하는가 봅니다. 여기 남자들이 모여서 식사 교제를 나누고 있었는데 찾아온 여자가 그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는 남자들은 달리는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런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디도는 여러분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를 영접하고 자기에게 순종한 것을 회상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더 여러분에게 기울이고 있습니다.”(고후7:15)

그런데 같은 본문을 현대어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디도는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말을 듣고 간절한 마음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자기를 맞이해 준 일을 회상하고 전보다도 더 여러분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디도는 왜 환영받고 존경받는다고 느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기쁜 마음으로 자기 말을 들어 주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잘 들어 주는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말할 기회조차도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입니까?

저는 지난 주간에 우리 고신 교단 선교부가 주최한 고신선교 내일의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한 포럼에 참석하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근래에 참석한 모임 가운데서 기억에 남을만한 아주 좋은 모임이었습니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질서 있게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고신교단역사에 기억할 만한 성숙한 토의 문화를 만들었던 포럼이었습니다. 역시 우리는 한나라당이나 열린 우리당보다는 한 급 위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서로에게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서로를 존경한다는 것이고 성령의 지배아래 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2. 존경의 두 번째 표지는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유턴 금지 표시판

예수님과 이 여인을 살펴보면 놀라운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서 “네 모든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약속을 주님은 지키셨습니다.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때문에 불쾌했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도 잘 생각해 보면 있을 것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 중요한 약속을 여러분에게 하고도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고 기억을 하면서도 안 지켜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존경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까? 아니면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기분을 가집니까?

이번에 방콕에 도착해서 만나는 분들마다 인사가 “사모님과 같이 오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둘러대는 대답이 “저희 집사람은 회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라고 했더니 선교부장 강 규찬 목사님 사모님 말씀이 “참석시켜 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합니까?”라고 반론을 펴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에게는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고 말씀 하시길래 생각해 보니 주제가 선교라 어쩌면 나보다도 더 관심을 가질 법 했습니다. 왜냐하면 가끔 집사람이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눈빛이 이상해지기만 하면 내가 중간에서 말했거든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교지에 불러내시려면 가장인 나한테 먼저 말해야 된다”라고 제가 막음을 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많은 선교사님들도 “지난 해 봄에 꼭 오신다고 약속해 놓고 왜 함께 오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때에 비로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바쁜 세월 속에 일년이 지나가니까 전혀 기억도 못하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선교사님들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는가하고 말입니다. 정말 올 들어서는 한 번도 이 번 모임에 같이 가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생각해 보니 갈려면 돈도 만만찮게 드는 일이었기에 함께 가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쪽으로 정리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갈 때는 갈거냐 물어보지도 않고 의례 ‘나는 발표하러 가니까’라고 생각하고 혼자 갔다 온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약속을 어김으로 결과적으로 선교사님들을 존경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아내에게도 역시 못 믿을 남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약속을 잘 못 지키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너무 급히 그리고 쉽게 처음에 약속을 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일정이 가능할 것인지, 그때 쯤 되면 형편이 풀려서 돈이 돌아갈 것인지를 따져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잠언서는 약속은 철석같이 해놓고 지키지 못하면 비 없는 구름과 같다고 합니다. 가뭄에 구름이 뜨면 농부들이 비가 내릴 것을 기대하는데 구름은 생겼는데 비 한 방울 오지 않고 지나가 버리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그 모양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 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 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5:37)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상대방을 존경하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급히, 쉽게 약속하는 다혈질의 나쁜 버릇을 고치도록 남다른 노력을 해야 될 필요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번에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앞으로 부탁을 하는데 “못하겠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 양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할 수 있는 일만 “예”하고 못하는 일은 아예 처음부터 “못합니다”하고 말을 해야 그것을 지킬 수가 있지 그렇게 구별한다는 것도 지혜가 필요하고 그렇게 알아도 말 한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되도록 저를 여러분이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건전한 지혜와 분별력을 모두 잘 간직하여 너의 시야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그것이 너의 영혼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너의 목에 우아한 장식물이 될 것이다.”(잠3:21,22)

좋은 계획과 명철한 통찰력은 여러분의 삶을 명예와 존경으로 장식하게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린 아이들과의 약속을 잘 지키지를 못합니다. 도산 안 창호 선생은 한 아이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체포를 당합니다. 우리는 아이들하고 약속하면 잘 못 지킬 때가 많습니다. 물론 어른들이나 존경하는 분과 약속을 했으면 웬만하면 지키려고 하는데 아이들과의 약속은 이행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적을 생각해 보면 부끄러운 기억들도 있습니다. 특히 야외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면, 그것도 몇 가정이 어울려서 가다보면 돌아오는 시간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곤 했습니다. 몇 시에 돌아옵니까? 5시에 나오는 TV 프로 생각하고 그렇게 묻는 것 같아요. 그래서 ‘몇 시에 온다’ 그러면 제대로 지켜지지를 않더군요. 여러 가정이 같이 움직이다 보면 일찍 들어오는 법이란 없더라고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아예 7시에 돌아온다고 해도 “거기다가 4시간을 더해야 해”라고 저희들 스스로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흔 아홉 살의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여든 아홉의 사라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로 통해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 하시니까 하나님이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지난 한 주간 동안은 방콕에서 선교 포럼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열방이 복을 받을 것인지 그것을 우리로 하여금 의논토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그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백생들이 그 후손을 통해서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고 복을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 약속을 인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할례라는 주셨습니다. 노아에게는 약속을 지키려고 무지개를 보증으로 주셨고, 오늘 우리에게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다시 영접하시려는 약속을 지키는 증표로서 성찬 예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예식을 거행할 때 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 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약속을 잘 지킴으로서 그들을 존귀히 여김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3. 존경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를 양보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양보 표시판

다른 사람들이 맨 앞에 서고자 할 때, 모든 관심을 다 끌고 싶어 할 때, 모두가 다 자기를 섬겨주기를 바랄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존귀히 여김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자기의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을 잘 섬길 때 그 사람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본문에 나온 여인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그녀는 주님을 최선을 다해 섬겼습니다. 한 마디 말이 없어도, 그녀의 행동에 대한 한 마디 언급이 없어도 그 값이 얼마나 되는지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발아래 조용히 나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섬겼습니다.

말없이 여러분을 섬겨준 사람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렇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섬겨보셨습니까? 저는 지난 월요일 인천공항에서 우리를 잘 섬겨준 선교사님들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일 통솔이 잘 안되는 그룹의 하나가 목사님들이라고들 합니다. 시키기만 해서 누가 시키면 잘 안 들어요. 여러 사람이 함께 가다보면 비행기 좌석을 단체로 끊으려다 보니 사람하고 맞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자라요.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는데. 뒤에 알고 보니 벌써 빨리 온 사람들이 자기 표 뽑아서 자기 자리 따로 표를 다 끊어놓았더라고요. 그런 일이 일어나도 표정 변하지 않고 자기 섬기는 목사를 잘 섬기는 것 보니까 섬기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회의를 하는 기간 내내 자기의 권리를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이 곳곳에 나타나는 분위기는 성령의 임재를 느낄 수 있던 기간이었습니다. 당연히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양보하는 아름다움은 성령께서 창출하는 아름다움입니다.

바울은 그런 목회자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고후12:15)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드려서 다른 이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성도의 일입니다.

제가 갈대상자라는 책을 읽고 얼마나 감동을 했는지 지난주일 코이노니아 칼럼에 썼습니다마는 우리 구역장님들 모두 한번 읽도록 해야 되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다른 책 대하듯이 그쪽에서 두 권이나 나한테 보내줬으니 안 읽을 수가 없어 무심코 시작을 했는데 5분도 안되어서 눈물이 나기 시작하는데 휴지 없이는 못 읽겠더라고요. 한자리에 앉아서 읽다보니까 편한 자리에 앉고 싶어서 책만 들고 갔더니 또 휴지 가지러 간다고 한번 일어섰지요. 인도에 가지고 가서 마지막 다 떼긴 했는데 인도 호텔에는 티슈조차도 없더라고요. 그런데 콧물은 자꾸 나오지, 눈물은 나오지 감당이 안 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릅니다.

좋은 책이니까 구역장들도 한번씩 읽도록 해야 되겠다 싶어서 한 오십권 구입을 했더니 정가가 12,000원인데 10% DC해서 샀더니 그래도 10,800원씩은 내야 되는데 10,000원씩 팔아라 그러니까 ‘그러면 손해 보는데요?’ 그래서 ‘손해 좀 보자’ 그랬죠. 한권에 800원씩 손해 보면 한 40,000원 됩니까?  손해 봐도 그 정도 가지고는 내가 파산하지는 않을 거니까.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손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특권인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삶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이 우리가 누리는 특권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섬김을 위해서 매 주일 봉사하는 구역장 여러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의 것으로 섬기는 아름다움을 통해서 아직도 믿음의 세계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초신자들을 여러분은 섬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은 없어도 그들은 여러분이 사랑으로 섬기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다 느끼기 때문입니다.

가정마다 이렇게 아름다운 섬김을 묵묵히 감당하는 아내와 엄마가 있기에 세상은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왜 모든 사람은 어머니를 그처럼 소중한 분으로 여기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 분들의 희생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살면서 어머니들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사랑만큼 더 큰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사랑해서 죽고 못살겠다고 해서 만난 부부관계 조차도 상호적이 되지 못하면 사니 못사니 하고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우리는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사랑했던 것은 날 위해서 희생했던 것은, 수첩에 적어놓은 것도 없고 그것을 받아내려고 들지를 않고 그냥 일, 이십만원 생활비 보내드리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받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주님은 기본예의도 결여된 바리새인 시몬의 모습과 상상을 초월한 이 여인의 사랑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집에 올 때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씻기고 너는 감람유조차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향유를 부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한 끼 식사를 대접해도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무슨 일을 섬겨도 사랑하면 차이가 나게 되어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어떤 신앙심이 좋은 청년 하나가 자매와 사귀었습니다. 미국에도 어떤 교단은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우리 고신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교단들도 있습니다. 이 청년이 그런 교단에 속해있던 청년입니다. 겨울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가 차가 퍼졌습니다. 바깥날씨가 추운 날 차 안은 완전히 냉장고 안이 되고 맙니다. 차 안에 있는 자매가 추위에 떨면서 춥다고 하니까 남자가 문을 열고 내려서 뒷 트렁크에서 담요를 하나 꺼내 와서 덮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장 가지고는 별 도움이 안 되어서 또 호소를 하니 다시 내려서 담요한 장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담요로서는 해결이 안 되니까 어디서 읽은 것이 생각나서 자매가 요청을 했습니다. 몸을 데우기 위해서는 사람의 체온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부탁을 했습니다.

달리 도리가 없으니까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좀 가까이 다가와서 껴안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 종교심이 좋은 남자가 쉽게 들으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그러면서 결혼을 하지 않는 관계에서는 그럴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밤만 결혼한 것처럼 해서 추위를 면해보자고 제의를 하니까 마침내 승낙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가와서 껴안아 줄 줄 알았는데 별무 반응이었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다시금 “아이 추워”하고 자매가 말하니까 청년 하는 말 “그러면 이 번에는 네가 내려서 담요를 가져다 덮어.”라고 했답니다. 결혼한 사람처럼 하기로 했잖아? 웃는 사람은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결혼하기 전에는 데이트를 하면 자매가 왜 차문 열줄 모릅니까? 그래도 와서 열어주고, 닫아주고 다 하면서 결혼만 하면 심지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이 자리에서도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는 아내가 차에 앉아있는지 따라 오는지 생각도 안하고 자기혼자 예배당으로 오는 남자들이 아직 더러 있다는 걸 여러분 아십니까?

섬김이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가 아닙니다. 기꺼이 섬기는 것이 사랑이지 마지못해서 춥다고 하니까 갖다 덮어 준게 아니지 않습니까? 불편한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면 여러분 가정에서는 누가 받습니까? 우리에게 소중한 분을 위해서는 마지못해서 섬기지 않습니다. 단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싼 것도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값비싼 기름을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매우 귀하고 값비싼 향유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이것이 예배자의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자는 오늘은 별 특별한 약속이 없으니까 예배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지만 아침에 일 좀 봐놓고 열두시에 가면되지 해서 열두시에 허겁지겁 나오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편이 예배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가 몸을 가지고 여기 나와서 앉아 있는 것을, 여기 나와서 당신의 모습을 바라는 것을 하나님은 가장 원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것이 완벽하리라고 하나님은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불완전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최선을 드리길 원합니다.

말라기 1장 6절을 보십시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이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드리지 못할 수준의 예물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벽 할 수 없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나님께서는 기대하십니다. 이 시간 예배의 자리에 나아오신 여러분의 마음, 그 마음이 표현된 행동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께 최선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예배자세이길 바랍니다.

예배를 마치고 가시는 분들이 그러더라고요. ‘월마트에 차를 대고 와야 되는데 교회오기 너무 바빠서 바로 왔다’는 거예요. 그래요. 여러분이 몇 번씩 광고했는데 월마트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마음은 있지요 그러나 오다보면 열두시에 교회 오는 것도 만만치 않아서 바로 몰고 올 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죠? 게다가 주차장도 넓어졌겠다. 그런 유혹이 더 크겠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것은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조금도 부지런해져서 열한시 예배였는데 열한시에 오지 말고 열한시 반에 온다고만 생각해도 여러분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조금만 신경 쓰시면 가능 해질 것입니다. 헌금을 해도 그렇고 찬양을 해도 그렇고 기도를 해도 마찬가지, 말씀을 들어도 최선의 마음자세 그것이 함께 가야 그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예배는 가증한 것입니다. 위선입니다. 예배시간에는 눈을 자신에게서 옮겨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배의 본질입니다. 사람을 섬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섬김 받아야 할 사람의 필요와 관심에 먼저 눈길이 가는 것입니다. 비이기적인 마음이 섬김의 본질입니다.

이제 존경의 마지막 표지판을 살펴보십시오.


4. 서행을 하십시오. -서행운전표시판

시속 120 킬로로 달리면서 주위를 제대로 감상하기란 어렵습니다. 경치가 좋은 곳을 지날 때는 속도를 늦추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잠간 차를 세워놓고 주변을 살펴보는 것도 좋습니다. 속도를 줄이고 하나님이 나를 보듯이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표면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아침 6시 30분부터 저녁 9시가 넘도록 공식포럼시간을 가졌습니다. 밥 먹는 시간 말고는 발제와 응답과 토의와 발표시간으로 채워진 시간표를 보면서 개중에는 고등학교 시간표냐는 반응이 있을 만큼 바빴습니다.

정말 방콕 가서 사흘 동안 호텔바깥조차 나가보지 못하고 회의장에서 방콕 했습니다. 마지막 돌아오는 금요일 날 방콕을 관광하는 일정이 있어서 그들이 자랑하는 왕궁에 갔더니 건물들을 전체다 장식을 해놓았는데 금인지 은인지 모르지만 보석들로 단장을 해놓았어요. 그런데 정작 건물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우리에게 자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겉만 반짝이는 궁궐을 보면서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저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외적인 치장에 치중을 하면 내적인 아름다움이 결여된 느낌이 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당대의 여성도들에게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람들을 외모로 대하고 평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외모 가꾸기에 시간을 들입니다. “얼짱”이란 소리를 듣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당대의 여성도 들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얼짱 보다는 마음짱이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속사람으로 꾸며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이런 성경을 마치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는 듯이 살아갑니다.

로마서는 말합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서로 한 마음이 되고,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고, 스스로 지혜가 있는 체하지 마십시오.”(롬 12:16,17)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별로 탁월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친구가 되어주라.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어 보라. 그러면 더운 날 전도지 들고 다니지 않아도 교회로 인도할 친구가 생길 것입니다. 사람들은 압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우리의 일을 하는 것인지 정말 그들을 사랑해서 다가서는 것인지 사람들은 느낍니다. 사람들을 영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이야기 속에 시몬의 집에 앉아있는 남자들은 이 여인을 겉으로만 보았습니다. 저 여자, 그 동네에서는 찍힌 여자니까, 그 여자가 그렇게 찍히는 데는 누가 다 공헌을 했을까요? 다 남자들이 그런 것 아닙니까? 그래도 남자들은 무시합니다. 왜 남자들의 공식모임에 이 여자가 나타났냐? 끼어들었느냐는 눈길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여인의 행동만 아니라 이 여인의 행동이 말하는 속내를 읽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한 예배자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하는 사람들은 그런 심정을 가져야만 됩니다. 사람들을 대할 때 겉으로만 대하지 아니하고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속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져야만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침묵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숨쉬고 있는 그 한숨을 통해서도 하고 싶어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가진 자를, 있는 자를 존귀히 여깁니다. 그러나 갖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합니다. 세상이 그런 세상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존경할 때에 사람들은 감동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예배하면서 꿈꾸는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존귀히 여김을 받는 세상입니다. 잘난 사람들끼리 통하는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인생을 비천한 인생을 존귀히 여기시던 그 주님의 눈빛을 가지고 우리의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결단을 하기 위해서 예배의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한나라당, 열린우리당 보다 우리가 자주 모이는 이유는 우리야 말로 우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던 그 눈빛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기 위해서 그들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 나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하러 나온 사람들은 왔던 그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돌아갈 때는 다른 사람으로 돌아가야만 됩니다. 다른 사람으로 결정하고 결심하고 결단하고 이 자리를 떠날 때에 여러분은 참된 예배자의 자리에 오늘 앉은 것입니다.

복습하고 말씀 맺겠습니다. 존경을 위해서 기억해야할 표지판들 네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멈춤 표시판입니다. 자신의 말을 중단하고 상대방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잘난 사람들은 누구를 만나도 말해주기 바쁩니다. 그러나 참으로 사람을 존경하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기다려 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유턴 금지표사판입니다.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 상대방을 존경하는 방법입니다.

셋째는 양보표지판입니다. 자기의 권리주장보다 상대방을 귀히 여기십시오. 마지막으로 서행표지판을 꼭 기억하십시오.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살피면서 겉으로만 인생을 보지 말고 사람의 내면을 볼 때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존경할 만 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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