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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Vision(창 30: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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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기 목사 (진주제일교회)

어제하고 그제, 이틀 동안 “웰빙시대의 변이된 유전자 회복을 위한 전인치유”라는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강사는 김영준박사라고,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 성인병 전문의였고, 지금도 하버드 의과대학 성인병센타, 뉴욕과학원 의학과 학술위원이며, 미국세포 생기학회 정회원이신 분입니다.

강의 내용이 정리가 되면 자세하게 전달할 생각입니다만,
이분의 말씀이 의하면, 암은 발암물질에 의해 생기는 것은 극히 드물다고 합니다. 암의 원인은 전염병도 아니고, 음식 때문도 아니라, 유전자의 변이로 발생한답니다. 내 안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전자의 변이는 세포주기시계를 통제 조절하는 cycline E(담백질)가 활성화 되지 못함으로 해서, 염색체가 불안정해져서 암세포가 시작된답니다(NATURE 04.March.2004).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해서 생기는 유전자 변이는 하루에 200개 이상이 된답니다. 그러니까 하루 200개의 암세포 가능성의 세포가 우리 몸에 생기는 겁니다. 한 개도 아니고, 하루에 200개의 암세포 가능성의 세포가 생기는데, 놀랍게도 사람의 유전자 중에는 Caretaker' genes라고 하는, 말하자면 ‘사랑으로 돌보는 유전자’가 있는데, 이 사랑으로 돌보는 유전자라고하는 자생력 유전자가 변이 된 유전자를 수리 한답니다. 유전자 변이로 해서 하루에 200개의 암세포 가능성의 세포가 생기지만, 그것을 수리하는 기능이 우리 몸에 또 있다는 겁니다.

어쩌다 유전자가 변이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돌보는 유전자(Caretaker' genes)라고 하는 자생력 유전자가 그 변이 된 유전자를 바로 잡아 놓는 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실패하면 119유전자라고 하는 옥소구아닌(oxoguanine)과 토포아이소메라제라는 것이 그 변이된 유전자를 수리 한답니다. 그래도 완전수리가 안 되면, 또 다른 물질(P53유전자와 14-04-3단백질)이 그 세포의 자살을 촉진시키고, 그것도 안 되면, 트롬보스폰딘(Thrombospondin-1)이라는 것이 암세포 혈관형성을 억제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암세포가 시작된 답니다.

이번에 그런 그림을 보았습니다. 유전자가 변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 어디서 허연 물방울 같은 것이 생겨서 올라옵니다. 그리고 그 변이된 유전자에 붙습니다. 그러자 그 변이된 유전자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허연 물방울 같은 것도 없어지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그렇게 하려고 해서 되는 겁니까? 이미 여러분이 만들어 질 때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200개의 유전자 변이가 매일 일어나도, 인간의 몸에는 그것을 제대로 수리하는 기능이 또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은 태초부터 사람의 몸속에서 이미 존재했답니다. 암도 공해니, 발암물질이니 하는 최근에 생긴 게 아닙니다. 5000년 전 이집트의 미이라에서 골수암을 발견했고, 1억3천만 년 전에 살던 공룡의 화석에서 암의 증거를 발견했답니다.

인류의 시작과 함께 암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유전자의 변이가 인류 시작과 함께 있었으며, 그런 유전자의 변이를 막거나 수리하는 기능 또한 인류 시작 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제 찾아낸 것뿐인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도 아니고, 환경에 의해 진화된 존재는 더더구나 아닌 것입니다.
유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꼬이고, 그 꼬인 것을 풀어주지 않으면 끊어진답니다. 그러면 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특히 암은 화학물질이나 발암물질보다는 내 생각이나 내 감정에 의해 더 크게 작용한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제네랄 호스피탈은 심장병 환자를 수술하는데 세계제일이라 할 정도랍니다. 이 병원에서 심장병 환자를 수술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셔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의 모임을 가졌답니다. 매일 10분씩의 모임인데, 당시 사우디의 왕자가 와서 보고, 심장병 수술만 하면 되는데 왜 하나님을 말하느냐고 하더랍니다. 어떻든 병원은 하나님이 계셔서 도와주실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그룹을 만들어 매일 10분씩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야기 했답니다. 그렇게 한 결과 그렇게 모인 그룹과 안 모인 사람들과의 수술 후 합병증에 엄청난 차이를 발견 했답니다. 그래서 그 결과를 병원 입구에 게시했답니다.
그랬습니다. 사람은 그냥 아무렇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닙니다. 이틀 동안의 세미나였지만, 사람의 신비와 그 오묘함에 대해 놀랐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또한 놀랐습니다. 사람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참으로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자신들 속에 넣어진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일들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하루 힘겹게만 살아갑니다. 그냥 하루하루 되는대로 살아갑니다.

날개가 나지 않는 어린 황새 한 마리가 있습니다. 날개가 없기 때문에 걸어 다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때는 뛰어 다니며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황새가 물을 마시다가 어린 황새의 날개가 피부 가죽에 박혀서 돌아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큰 황새는 주둥이로 어린 황새의 어깨 피부를 물어뜯었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어린 황새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어린 황새의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린 황새는 날개가 생기니 더욱 힘들고 죽을 지경입니다. 날개가 짐이 되어서 마음대로 걸을 수도, 마음대로 뛸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큰 황새에게 불평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주둥이로 물어뜯어서 피가 나게 하더니, 이제는 날개 때문에 마음대로 걸을 수도, 뛸 수도 없고 죽을 지경이에요.”
그러자 큰 황새가 말했습니다.
“이보게, 황새는 발로 걸어 다니는 짐승이 아니야. 너는 날개를 이용해서 저 공중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황새야. 그 날개는 멀리 날 수 있는 보물이야. 날개는 짐이 아니야.”
“멀리 멀리 날아라. 날아!”
큰 황새가 작은 황새를 높이 쳐 올리자 작은 황새는 날개를 펴고 높이 날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작은 황새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아! 나는 황새구나! 공중으로 날아다닐 수 있는 황새구나!”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죄 값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미 치르셨고, 따라서 나는 죄 용서 받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는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에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보장을 주셨고, 이 세상에서도 믿음을 통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짐으로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그리고 예수 믿는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예수 믿는다고 말하며, 교회 다니는 사람들조차도, 믿음으로 얻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누릴 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황새이면서도 날지 못하고 사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짐이 아닙니다. 믿음은 날개 입니다. 믿음을 짐으로 생각 한다면 아무런 복을 소유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날개임을 안다면 오히려 더 놀라운 삶과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날개를 꺼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쓰임 받는 사람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 같이 악조건에서 승리를 이끌어 왔다는 것입니다. 좋은 조건에서 성공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 악조건을 뛰어넘고 승리했습니다.
악한 마귀는 늘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네가 뭔데? 네가 뭐 잘났다고?” 그렇게 기죽이지요?
“되었다. 넌 충분히 했다. 다른 사람보다 네가 더 많은 수고를 했다” 이번에 교만하게 만들지요?
“이게 한계다. 이게 장애다. 이것이 끝이다.” 이번엔 절망 속에 빠뜨리지요?
왜냐하면, 어떻게 하든 우리를 망가 뜨려야 하니까, 어떻게 하든 중도에 그만 두게 해야 하니까 그렇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당한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야곱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고향에 살았더라면 어머니의 사랑과 돌봄 가운데 걱정 근심 없이 살았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이삭에게 사기를 쳤습니다. 형 에서를 속였습니다. 그래서 형의 보복이 두려워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사는 20년도 보통 어려운 것 아니었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은 자”란 뜻입니다. 그것은 “사기꾼”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름처럼 아버지랑 형이랑 속였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야곱보다 훨씬 사기를 잘 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약점이나 잘못을 쉽게 스스로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남을 통해서는 자기의 약점을 발견합니다. 야곱은 라반의 사기 치는 술수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기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라반에게서 독립하기 위한 협상을 하는 장면입니다. 32절에 보면 야곱이 독립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재산 달라면 라반이 줄 것 같지 않으니까, 양이나 염소 중 자기의 몫으로는 얼룩지거나 점이 있는 것 모든 겁은 것을 달라고 말합니다.
아마 이런 것들은 쉽게 나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야곱보다 한 수 위인 라반도 쉽게 그러라고 허락한 겁니다.
그리고 라반은, 35-36절에 보면, “바로 그 날로 숫염소 가운데서 줄무늬 있는 것과 짐이 있는 것을 가려내고, 또 모든 암염소 가운데서도 흰 바탕에 얼룩진 것과 점이 있는 것과 모든 것은 세끼 양을 가려내서 자기의 아들들에게 주었다. 그걸 다음에 라반은, 야곱이 있는데서 사흘 길을 더 나가서, 자기와 야곱 사이의 자리를 그 만큼 뜨게 하였다. 야곱은 라반의 나머지 양 때를 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반이 얼마나 용의주도한지, 혹시라도 얼룩얼룩한 것이 나올까봐 모두 치워 버렸습니다. 서로 가까이 할 수 없도록 3일 길이나 떨어져 있게 하였습니다. 라반과 야곱이 함께 치는 양과 염소 떼에는 얼룩얼룩 한 거나 점이 있는 거나 검은 것은 한 마리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야곱은 20년을 고생하고서 양 한 마리, 염소 한 마리도 가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이라는 사람이 너무도 야속할 것입니다. 야곱의 가슴에는 라반에 대한 증오가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형 에서에게 그렇게 했던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야곱을 라반의 집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였던 거라 여겨집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래도 그에게 Vision있었습니다.
사람은 Vision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시대나 쓰임 받은 사람들을 보면 Vision이 있었고, 그 Vision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이상과 목표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시대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황새 임에도 불구하고 날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어 다녀도, 걸어 다녀도, 뛰어 다녀도 먹을 만큼 먹는데 뭐 하러 날려고 애쓰느냐고 코웃음 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렇습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 앞에서 이거 하나는 해야겠다.”는 게 없습니다. 그냥 성경, 찬송가 들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Vision을 주십니다. 소원을 주십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일기 위한 거룩한 Vision이요, 거룩한 소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꿈을 무시합니다. 아니면 그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자기 욕심을 이루려는 기회로 삼습니다.
“하나님 돈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그러면 뭐도 하고 뭐도 하겠습니다.” 이것은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돈 많이 벌기 전에는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자 하면 “난 가난해서” “없어서” 그렇게 핑계 대는 사람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자기의 Vision, 자기의 소원을 둡니다. 이 사람들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최선을 다 하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봅니다.
롯은 현실적인 사람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쫓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미래에 투자한 사람입니다. 롯이 선택한 소알 땅과 요단강 하류는 소돔과 고모라가 들어선 정말 좋은 땅이요, 멋진 땅입니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땅은 브엘세바 황무지였습니다. 그러나 브엘세바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반면에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땅이 되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만 하더라도 예루살렘은 황무지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겠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백성 중 10퍼센트를 차출해서 억지로 살게 했습니다. 단 몇몇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살겠다고 자원하기도 했지만. 그런데 당시 변방이었던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중심지요, 세계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한 Vision, 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룩한 Vision에 투자 하십시오

달리 말하자면, 꿈을 이루기 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을 들여다보고 이것이 심기어 자라면 30배, 60배, 100배의 밀알을 거두리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믿음의 Vision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이루어지려면 그 밀알을 땅에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조차 외면합니다. 들어도 안 들은 척 합니다. 왜냐하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말을 돈 내는 걸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지, 정, 의를 가진 인격으로 만드셨습니다.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은 이것들을 활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가 Vision만 가졌어요? 그는 용의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리를 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7절 이하에 보면, 그는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껍질을 벗겨 얼룩얼룩하게 만들어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두었습니다. 그래서 양떼들이 그곳 물을 먹으러 와서 그것을 보고 새끼를 뱄습니다. 그것도 아무거나 얼룩지게 만든 것이 아니라, 좋은 양, 실한 양에게만 그것을 보였습니다. 일종의 우성의 법칙을 적용한 것입니다. 그는 굉장히 연구하고 머리를 쓸 줄 알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에서 이 지적 요소를 버렸습니다.
“믿기만 하면 된다.”고 밀어 붙였습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를 “Logic on fire" 즉 ”불붙은 논리“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는 논리입니다. 틀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연구를 많이 합니다. 믿을 사람이 자기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게으릅니다. 연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서 그냥 엎어집니다. 심지어 새벽기도 못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예배시간에 딴 데 가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 이라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뭘 연구해야 합니까?
연구 하라면 엉뚱한 연구만 합니다. 마치 야곱이 그 아버지 속이기 위해 변장하고 음성을 변조하는 그런 연구들만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연구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은, “듣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 아닙니다.” 말씀을 듣거나 말씀을 보면서, 그 말씀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를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삶의 거름이 되게 해야 합니다. 말씀이 삶의 뜀박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목사가 세상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는 안 했으면 좋겠다.” 또는 “예수 믿는 사람은 모이면 신앙 이야기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겁니다. 신앙은 우리의 삶에서 열매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무시 할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사는 현재의 정치, 사회, 문화 속에서 어떻게 신앙생활 하느냐 또는 세상을 변화시키느냐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세상과 별다르게 사는 신앙은 수도원 신앙입니다. 때문에 삶이 주변도 연구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설교자는 한 손에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즉 설교는 세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그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말씀이 열배 맺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앙은 세상 속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삶으로 열매 맺는가 이것이 또한 그리스도인의 고민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는 단순히 뭔가를 요구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고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은 우리로 인내하게 만듭니다. 꿈을 가진 사람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인내합니다.
중국 사람이 좋아하는 고사성어가 있다.
“우공이산”
한 어리석은 노인이 집 앞에 산이 있어 귀찮았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은 산을 파기 시작합니다. 그 산에 있던 신령들이 나타나서 비웃었습니다. “아니, 산을 판다고 없어지나? 어느 세월에?” 그랬더니 우공이 말합니다. “내가 파다 안 되면 내 아들이 파고, 내 아들이 파다가 안 되면 그 아들의 아들이 파면 되지.” 그러자 산신령들이 놀라서 산을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공이산이라는 고사성어가 나왔다는 겁니다.
Vision을 가진 사람은 도중에 포기하지 않습니다.
야곱에게는 그것이 있었습니다. 장자권에 대한 집요함이 있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장자가 된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께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아버지 이삭에게 이어졌고, 바로 그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이어 받는다는 의미가 그 속에 있었던 겁니다. 야곱은 그것을 가슴에 품었던 것입니다.
훗날 그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면서 외친 것이 “나를 축복하고 가라”는 겁니다.

사실 야곱은 이 때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더 이상 부족한 것 없었습니다. 아마 우리들이 그 경우라면 환도 뼈가 부러지는 어리석은 일은 안 했을 겁니다.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면 기도조차 안하니까요. 그러나 야곱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복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야곱의 꿈이요 Vision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줍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 그 복이 김 아무개 거라면, 싸우든지 돈 주고 사든지 그래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싸워 이길 수 있어요? 그 하나님의 약속과 복을 돈 주고 살 수 있어요?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뿐입니다.

구원. 여러분의 힘으로 얻은 겁니까? 여러분이 낸 헌금으로 얻은 겁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은혜 때문인 것입니다.
그건 이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의 Vision과 생명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Vision을 갖되 허황된 Vision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Vision, 하나님의 소원을 가슴에 품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쁨으로 참여하십시오.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손해라고 생각지 마십시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말씀이 무슨 은혜며 무슨 복입니까 그러나 그 말씀에 아브라함이 순종했을 때 이삭도 살고 아브라함도 살았습니다. 그들은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 일을 기쁨으로 하십시오. 그 안에서 비전과 생명을 품으십시오. 그리고 그 비전과 생명을 위해 생명조차 드리십시오. 그리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들을 날마다 순간마다 삶 가운데 경험하십시오.
우리는 아무렇게나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닙니까?

06.06.2004 주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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