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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로자 바나바 (행 11: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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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안 환 목사 

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컫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을 보면 우리는 바나바라는 인물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바나바에 대해 그리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세히 안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바나바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선 우리는 바나바를 바울의 옆에 있던 사람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바울의 1차 선교여행에서 바나바와 동행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함께 하기 전에 이미 바나바는 그 공동체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바나바 옆에 바울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1. 위로의 사람

사도행전 4장 36-37절에서 처음으로 바나바는 등장을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좀더 정확한 바나바의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레위자손입니다. 그리고 원래 이름은 요셉입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어떻게 레위 자손이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약에 보면 레위자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포로기 이후에 시대적인 상황에서 레위자손들이 땅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부자였던 바나바는 자기 땅의 일부를 팔아서 예루살렘교회를 유지하는데 사용하라고 돈을 사도들의 발 앞에 놓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어째든 사도들이 그를 바나바라고 부른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나바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나바의 뜻은 권위의 아들입니다. 한글 성경은 권위의 아들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NIV영어성경을 보면 좀 더 그 의미가 명확하게 나옵니다. (son of encouragement)
즉 권위의 아들은 곧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라는 뜻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위로의 아들이라고 사도들이 불러 준 것입니다. 요셉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왜 굳이 바나바라는 위로의 아들이라고 불렀을까? 그것은 사도들이 보니까 바나바는 남을 위로하는데 탁월한 감각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특징을 보고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8절에 보면 위로하는 것은 은사로 말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는 일에 탁월한 은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재산이 많다고 목이 곧은 것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위로하는데 열심을 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어려울 때에 바울을 위로하는 자로 섬겼던 것입니다.

바울의 격려자

물론 바울이 어려울 때 도왔던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빛을 보면서 눈이 멀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친구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들은 바울이 눈이 멀자 그저 다메섹의 한 집에 바울을 데리고 갈 수 있을 뿐 그에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예 쓸모없는 친구가 되어버렸습니다. 자기들과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한 바울을 더 이상 친구로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먼 타지에서 바울은 외톨이로 있었습니다. 누군가 자기의 친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바울의 눈에서 비늘과 같은 것을 벗겨 준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입니다. 이 곳 다메섹에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게 예수를 전하는 자로 변화될 때 힘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아나니아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어려울 때가 바로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의 인정을 받는 일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한 일이 있는데, 즉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는데, 사도들이 바울이 회심했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스파이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경계심을 놓지 않고 있을 그때에 천군만마와 같은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바나바입니다.
사도행전 9장 27절을 보면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신임을 받고 있던 바나바가 바울에 대해 변호를 하자 사도들은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위로의 아들이라는 말에 맞게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만나면 바나바는 최선의 위로를 아낌없이 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은사입니다. 사람을 위로하고 세워주는 것...

안디옥 교회의 격려자

바나바의 격려 두 번째 이야기는 11장에 나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면서 개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10장의 베드로 사건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한다는 확신을 하게된 사도들은 안디옥에서 큰 부흥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 곳에 제자를 파송합니다. 고대문헌에 의하면 그 개종자가 5만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흘러들어와서 믿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해서, 기독교에 대해서 잘아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습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착한 사람이요”(행11:24)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인격적으로 좋은 성품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이방인의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안디옥으로 갔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만약에 엄격한 유대주의자 중의 한 사람이 안디옥으로 갔다면, 안디옥에서 일어나고 있는 지나친 열광적인 종교행위에 대해 간섭하고 유대식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를 했을지도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안디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을 했을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눈에는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가 본 것은 지금 이들이 열광적인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이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였습니다.
지금 안디옥교회는 큰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상태입니다. 교회가 갑자기 부흥을 하면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고, 힘든 부분들이 나타납니다. 더욱이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보다는 이방인들이 거의 전부였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도착했을 때는 다소 어색하고 색다른 예배를 경험했습니다. 비판거리를 찾으려면 충분히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판의 눈보다는 겸손한 모습으로 안디옥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바나바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안디옥교회의 이곳저곳을 격려하기 시작했고, 더욱 튼튼한 믿음의 공동체로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이런 바나바의 위로로 안디옥 교회는 더욱 큰 교회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행11:24).

마가의 격려자

신약성경의 두 번째 책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마가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마가복음의 저자가 바나바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가는 바울과 전도여행을 하다가 중간에 슬그머니 빠졌습니다. 바울은 화를 내면서 다음 번 전도여행에서 마가를 함께 데리고 가기를 거절했습니다. 이 일로 결국 바나바와 바울이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꿈많은 청년 마가는 한번의 실수로 바울의 거절을 당한 것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해있었습니다. 이때 절망 속에 있는 마가를 위로하며 함께 전도여행을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가는 바나바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훌륭한 마가복음이라는 책을 쓰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제일 먼저 쓰여지고 이것을 근거로 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마가복음을 쓰도록 한 장본인은 바로 바나바였던 것입니다.
한마디의 위로는 한 사람을 살립니다. 절망의 사람에게 위로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바나바의 말한마디를 기억하십시오.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보다 그를 위로하는 말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격려의 한마디로 사람이 춤을 추기를 원합니다.


2. 자리를 비울 줄 아는 사람

안디옥 교회가 더욱 커지자 바나바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인원은 많아지고 여기저기에서 많은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은사들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아직 안디옥에는 교육받은 유대인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가르칠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더욱 굳건하여 지려면 말씀을 알아야 하는데, 혼자 힘으로 교회를 감당하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일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이 마음에 맞는 좋은 동역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람하나를 잘 두면 사업이 번창하지만, 사람 하나를 잘못 두면 사업이 망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을 쓰는 일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나바에게도 동역자를 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부흥의 불길을 끄느냐, 아니면 장작을 넣어 더욱 활활타오르게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리 오래 생각하지 않아서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었습니다.

바울을 불러옴

바울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처음 섰을 때 열심히 변호를 했었습니다. 이때 바나바는 바울 안에 있는 잠재력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놀라운 일을 할 바울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배운 가말리엘 문하의 학문을 하나님이 쓰실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핍박할 때 앞장서서 선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의 강한 카리스마를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어째든 바나바는 자신의 동역자를 찾는데 바울을 금방 떠올리고 다소에 있는 바울을 안디옥으로 불렀습니다.
25절에 보면 바나바가 바울이 있는 다소까지 직접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절로 쉽게 다소로 가서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거리는 만만한 거리가 아닙니다. 거의 280Km(700리)의 거리입니다. 걸어서 꼬박 일주일도 더 걸리는 거리입니다. 거기다가 안디옥과 다소 사이에는 2000m의 거대한 산맥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2000m의 산맥을 넘어서 280Km인 것입니다. 교통수단은 오직 도보 밖에 없는 시대에 2000m의 산을 걸어서 넘어갔다 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기에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지금 바울은 낙향을 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그리 적극적인 환영을 받지 못한 상태고, 또 아직 바울이 어떠한 일을 하기에는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누가 불러 주기만해도 감지덕지할 판이었습니다. 만약에 바나바가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와서 나를 도우라’는 말만 해도 바울은 한걸음에 달려올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많은 제자들 앞에서 나를 변호하던 바나바가 부르는데 어찌 한 걸음에 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나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사람을 생각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높이 들어 사용하시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2000m의 높은 산이라도 직접 가서 바울에게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바나바의 이러한 기대대로 안디옥에서 큰 열매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안디옥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바나바의 위로 속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는 이제 바울의 신학적인 교리 교육을 받으면서 더욱 튼튼한 안디옥 공동체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에게 자리를 내어줌

우리가 또 생각해 볼 것은 만약에 바나바가 그렇게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 오면 그의 카리스마로 인해 지도자의 위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적인 학문은 당대의 최고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한 학문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얻게된 후 구약을 보는 성경적인 통찰력은 오늘날의 학자들도 놀랄 정도로 정확하고 방대합니다.
이런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사역을 하고 교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확고한 지도자의 위치를 얻게 될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내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나바와 함께 사역을 시작한 바울의 사역은 점점 인정을 받고 그 사역 또한 더욱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1차 선교여행에서 잘 나타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는 ‘바나바와 바울’의 순서로 쓰여지던 것이 구브로의 바보에서 떠날 때에 누가는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바뀌어 버립니다.
바나바는 기꺼이 자기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바울보다 먼저 예루살렘 교회의 인정을 받은 자이고, 더 일찍 안디옥 교회를 시작한 자이고, 바울이 어려울 때 바울을 격려하면서 일어설 수 있도록, 어떻게 보면 바울의 영적인 우산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러나 바나바가 보니 바울은 자기의 우산아래 있을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지식과 믿음을 들어 쓰실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러한 통찰력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제자들이 바울을 의심스럽게 볼 때도 자신있게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바울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하면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려운 상황에서 얼마나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고 환난을 어떻게 믿음으로 이겨나가는지를 친히 바나바의 눈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고 계신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누가의 눈에 이제는 바나바의 사역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으로 옮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나바의 위대한 점입니다. 자기의 자리를 비워 줄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통찰력 있게 보는 사람, 이 시대에 이러한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 시대는 이러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기독교를 올바로 세우고, 더욱 많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함께 동행하는 사람

마지막으로 바나바는 함께 동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고 나서 설상가상으로 2차 선교여행에서는 바울과 마가의 동행 문제로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과 갈라서서 바울과 실라는 소아시아로, 바나바와 마가는 구브로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제 바나바와 바울은 끝났다고... 이제 서로 갈라서서 제 갈 길을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잠시 작은 일로 다투기는 했지만, 바울의 능력을 보았던 바나바의 통찰력은 여기서도 변함이 없습니다. 비록 함께 선교여행을 다니지는 않았을 지라도 말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마가를 바나바는 잘 훈련을 시켜서 나중에 바울에게 좋은 동역자로 붙여줍니다.
디모데후서 4장 11절을 보면 바울이 마지막에 마가를 찾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나의 일에 유익이라”. 이러한 바나바를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5, 6절에서 바나바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한 권이 없겠느냐” 즉 나와 바나바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다. 우리가 공궤를 받기 보다 자기 힘으로 충당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가하지만 그러나 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는 것입니다. 나와 바나바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이처럼 바울과 마지막까지 함께 동행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신실한 동역자의 모델인 바나바를 보았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의 마지막 사역까지 동행하며 힘을 주었던 동역자 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바울을 위로하며 힘을 실어 주었던 위로자 였습니다. 자기의 자리를 기쁘게 바울에게 내어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애쓰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사소한 다툼이 있었을지라도 그 중심에 불타는 복음의 열정을 보고 끝까지 동행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동역자 바나바의 모습이 오늘 여러분에게 더욱 넘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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