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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 10: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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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마경훈 목사 (소망교회)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능력으로 힘을 얻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만큼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신34:10). 그는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 소명을 받고 그 이후에 늘 하나님 앞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비스가 산에 올라가 죽을 때 나이가 120세였습니다. 그는 그 때까지 늘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봤기 때문에 얼굴에서 광채가 났고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은총을 받으면 그에게는 영생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얼마나 많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많이 설수록 인생은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인생

  그런데 불행하게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불행인지도 모르고 하나님 없이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영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합니다. 시14:1에 보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고 지적합니다. 육신은 건강하고 물질로는 풍부해도, 세상 지식은 많아도 그 영혼이 죽은 자들은 영적인 일에 무지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부분에는 어리석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실존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롬3:23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인간의 죄로 인하여 막히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늘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설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어졌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에는 에덴동산에 찾아오신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셋째, 길을 모르기 때문입니다(요14:6). 예수를 믿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찾지만 창조주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길은 단 하나의 길인데 그 길 외에 다른 길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14:6에서는 "내가(예수님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꾸만 다른 길을 찾습니다.

  넷째, 하나님 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인 예수를 발견하여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 가운데서도 구원을 위하여 한번 주님 앞에 나아간 것 외에는 전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편의를 따라 필요한 때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경우를 비유로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눅14:15-24).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종을 보냅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핑계를 댑니다. 밭을 사서 못가고, 소 다섯 겨리를 사서 못가고, 장가를 들어서 못 간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잔치가 준비되었으니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신자들에게도 계속해서 주님의 잔치에 참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핑계가 있습니다. 바쁩니다. 피곤합니다. 취미생활도 해야겠습니다. 돈도 벌어야합니다. 그들의 핑계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타당해 보이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주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아르헨티나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르헨티나 축구 대표팀 주전 골키퍼 카를로스 로아가 돌연 은퇴를 선언한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 축구 경기가 주일에 열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없어서 랍니다. 소속 팀 레알 말로르카 구단주인 레이네스는 200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36억을 더 주겠다고 제시했습니다. 그는 "돈이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거절했답니다. 세상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어떤 사람들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드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시며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말씀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새롭고 산길이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전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누어집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와 시은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소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만 지성소에는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휘장입니다. 휘장은 넓이가 5m, 높이가 10m, 두께가 15cm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찢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휘장이 찢어져서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라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의 대제사장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쉽게 설명을 드리면 휘장 가운데로 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갔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께 우리를 소개해 주실 분이 필 요 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역할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엡3:12에서는 "우리가 그(예수) 안에서 그(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설명 드리면, 누군가 대통령을 만나려고 청와대를 찾아갔다고 가정해봅시다. 청와대는 찾아갔는데 대통령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비서실장을 만났습니다. 비서실장이 그 사람의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그를 대통령에게 데리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듯이 우리는 직접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공로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하고 부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 앞에 데리고 나아가서 우리를 아버지 앞에 서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자격도 공로도 없지만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분이시며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구약 시대에 제사장과 제주는 피를 뿌려서 정결함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물두멍의 물로도 정결함을 입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깨끗함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상적인 신앙은 알고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합니다.

  첫째, 하나님께 나아갑시다(22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길이 열렸으나 나아가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답답해하십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십시오. 우리가 "아버지"하고 부를 때 주님은 우리의 손을 붙잡고 아버지 앞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십시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그 시간 우리의 육체는 예배당에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읍시다(23절). 여기서 믿는 도리는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자'라는 말은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말입니다.

  교회에서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해놓고 세상에 나가서는 "돈이 나의 구주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믿는 도리의 소망을 굳게 잡은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기도하면서 응답하심에 대해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기도 응답과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놔버리고 나타난 현상을 고백합니다. 몸이 아파서 기도하던 사람이 기도 중에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나음을 입었다는 응답을 받아서 그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고 일어섰는데 몸에 전에 느꼈던 증상과 동일한 증상이 나타나면 기도할 때 드렸던 신앙고백을 놔버리고 몸에 나타난 증상을 고백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드린 신앙고백을 놓치면 안 됩니다.

  셋째, 서로 돌아봅시다(24절). 서로 돌아보는 이유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캐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좋은 점을 격려하려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각의 변화로 가능합니다. 이것은 율법적인 가치관으로는 안 됩니다. 은혜의 가치관으로 되는 것입니다. 상대를 볼 때 좋은 점을 보고 격려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는 것은 관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은 돌아볼 수 없습니다.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넷째, 모이기를 힘씁니다(25절).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모일 때 힘이 있고 성도는 모일 때 은혜를 받는데 모이기를 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자주 모인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만 안 모이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것은 습관입니다. 여기서 습관이라고 지적합니다. 예배를 빠지는 것은 습관입니다. 지각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습관은 반복하여 몸에 익숙해 진 것입니다. 잘못된 습관은 바꿔야 합니다. 바꾸려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이자고 서로 권해야 합니다. 자신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이도록 권해야 합니다. 셀가족들을 잘 권면하셔서 함께 모이도록 하십시오.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보다 주님의 재림이 더 가까워졌으니 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성전에서 모이고 집에서 모였습니다. 대그룹으로 모이고 소그룹으로 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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