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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와 아홉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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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철목사 (한일달라스교회)

한 무명의 신앙인이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인간의 약함을 깨닫게 해주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버려진 자로서 급급하게 살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획된 일들이 틀어져 안 된 것도 감사합니다. 저의 교만이 꺽이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아내와 남편이 힘들어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형제가 짐으로 느껴질 때가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어려움의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인간 된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먹고사는 것이 힘겹게 느껴지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눈물로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요, 또한 영원한 삶을 사모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땀과 고생의 잔을 맛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주여 저의 작은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무명의 신앙인은 자신의 마음을 작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 정도의 감사의 수준이면 대단한 마음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아니고서는 드릴 수 없는 감사를 무명의 신앙인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은 이와 같이 수준 높은 감사의 차원이 아닌 너무나 당연한 감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한 감사의 이야기면서도 우리들에게 매우 귀한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감사는 크던 작던 모두다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을 멈추어 서게 한 사람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한 마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고 계시던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병들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부정함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 가까이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멀리 서서 있는 힘을 다해 주님을 붙잡았습니다. 문둥병은 육체를 썩게 만드는 무서운 병입니다. 특히 성대까지도 망가뜨린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소리를 지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의 치료자로 온전히 믿었기에 예수님을 그냥 보내드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오랜 질병의 쇠사슬에서 자유케 해 주셨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변화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분리된 사회와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몸이 썩어 가는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우리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잘 자라가고 있습니까?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들의 삶을 변화 받기 위하여 큰 소리로 외쳐 주님을 붙잡습니까?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가신 던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듯이 우리들도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있습니까?

2. 놀라운 예수님의 마음과 능력

예수님께서는 열명의 문둥병자들의 외침에 아무런 조건 없이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들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선하시고 인자하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동일한 마음으로 그를 찾는 모든 이들에게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는 말씀만으로 불치의 병이라 할 수 있는 문둥병을 깨끗하게 치료해 주셨습니다. 불치의 병이 예수님의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옳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치료해주시는 치료자시요 못하실 일이 없으신 전능자시요 천하 만물의 주관자십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골로새서에서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1:16-1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들은 탁월하신 예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선하시고 자비하신 예수님의 품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들은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필요를 부르짖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 무엇이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우리 주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3. 감사가 없는 세상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가던 중에 그들의 몸이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열 명 중 한 사람만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감사를 표현한 한 문둥병자에게 "일어나 가라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일어나 가라"는 말씀은 "이제 그만하면 됐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감사까지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믿음과 순종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순종과 믿음에만 만족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감사의 마음까지도 바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감사를 받고 싶으셔서가 아닙니다. 감사가 믿음의 행위 가운데 매우 중요한 행위요, 감사가 곧 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는 것만큼 우리는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사이상의 믿음을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사의 수준이 곧 우리의 믿음의 수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만 감사의 믿음이 있었고 아홉은 감사의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와 아홉은 곧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에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무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세상이 거칠고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감사치 않은 아홉을 찾으신 이유는 곧 이세상의 모습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감사의 세상에 감사를 전염시키는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홉에 속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에 속한 감사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한 사람의 감사

이제 한 사람의 감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 감사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삶의 올바른 우선 순위

한 문둥병자의 감사는 삶의 우선 순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였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그는 제사장을 반드시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제사장보다 앞서 만나러 돌아왔습니다. 그 동안 보지 않았던 가족도 그에게 귀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족보다도 그에게는 예수님이 더 귀한 존재였기에 예수님께 먼저 돌아왔습니다. 우리의 삶도 우선 순위가 바로 서야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예수님이 항상 먼저이어야 합니다. 이 순서가 올바르지 않고서는 우리의 삶이 올바를 수 없습니다.

2> 최선의 감사

한 문둥병자의 감사는 최선을 다한 감사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서 감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든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일에는 더욱 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 된 우리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삶을 사셨듯이, 우리들도 주님을 위하여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등수에도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할 수 있게 되고 자유하게 됩니다.

3> 감사할 것을 감사

한 문둥병자의 감사는 당연한 감사였습니다. 깊은 생각과 성숙한 성찰이 아니라도 누구라도 다 감사할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병을 치유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한다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의 감사는 절대적인 감사나 특별한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다 쉽게 깨닫고 누구나 다 쉽게 드릴 수 있는 감사였습니다. 많은 감사의 물질을 준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감사를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홉은 이 정도의 감사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바로 이 아홉과 같습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신앙인의 모습도 이 아홉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감사할 것들은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감사했던 다니엘의 절대적인 감사가 아니어도 됩니다. 감옥에서 드려진 바울의 성숙한 감사가 아니어도 됩니다. 신앙인은 쉽게 깨닫고 쉽게 드릴 수 있는 감사부터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5. 행복의 문을 여는 감사

한 문둥병자의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뜻밖의 복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이 사람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적인 구원까지고 얻게 되었습니다. 한 번 감사를 드렸더니 덤으로 더 귀한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열고 불행의 문을 잠그는 열쇠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흘러오는 도랑과 같습니다. 감사의 도랑을 파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차고 넘치게 흘러옵니다. 시50:23의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하나님은 성도들의 감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감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지속적인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따라서 감사는 또 다른 감사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감사하면 하나님도 감사드리는 자도 함께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건강이 곧 행복은 아닙니다.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때라야 건강은 행복의 요소로 바꾸어지게 됩니다. 물질의 부요함도, 명예로운 삶도 그 자체가 곧 행복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주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할 때라야 비로소 그런 것들은 행복의 요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신질환 환자들을 돌보는 담당자와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 중에 그 담당자는 귀한 간증을 했습니다.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요소가 하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공통적인 요소는 그들 모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란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감사의 조건들을 소유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지 않고 없는 것들만을 보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는 담당자의 말에 저는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줍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에 속합니까 아홉에 속하니까? 지금 우리는 행복합니까? 아니면 불평과 불만으로 인하여 병들어 가고 있습니까?

6. 무엇을 감사할까?

비범한 감사가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감사가 무엇이 있을까요? 감사드림이 마땅한 대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오히려 망각하고 살아가는 감사의 제목들이 무엇이 있을까요? 너무나 많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세 가지만 소개합니다.

1>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우리의 믿음이 자라는 신앙의 보급자리인 교회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셨습니까? 우리들을 기쁨으로 항상 받아 주는 교회, 말씀과 찬양이 살아 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 말씀의 배움과 훈련이 있는 교회, 기도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교회, 성도 간의 섬김과 사랑의 교제가 있는 교회가 있음을 감사해 보았습니까? 특히 다윗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던 성전 건축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사실을 감사해 보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살면서도 교회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2> 살아 있음

힘들고 어려워도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보았습니까? 천국이 이 곳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곳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감사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면, 살아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위해서 그만큼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시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빚진 자들이 그 빚을 갚을 수 있는 기간이 살아 있는 동안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넘치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가족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즉 가족들은 가장 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렇기에 서로를 위해서 가장 헌신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의 마음이 서로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의 조그마한 선행에는 감동의 감사를 하면서도 가족의 헌신에는 아무런 감동도 감사도 없습니다. 서로의 수고가 너무나 귀한 것이지만, 서로는 이것들이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맙니다. 가족들이기에 서로를 위한 사랑의 수고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아내가 있기에 남편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자녀들이 있기에 부모의 자리를 지키게 됨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부부간의 갈등을 통해서 섬김과 사랑의 귀중함을 배우게 되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녀와의 갈등을 통해서 부모는 비로소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그리고 자녀들이 주는 아픔을 통해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부모들에게 진실로 감사하는 철든 자녀가 되는 것이기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맺는 말

성 프란시스코가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 한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느라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들 옆을 장님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성 프란시스코가 그 장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눈을 뜨게 해 준다면 당신은 나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하겠습니까?" 그러자 그 장님은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나의 눈을 뜨게만 해준다면 나는 평생 당신의 종이 되어 날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그러자 프란시스코가 친구에게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 이 장님의 말을 들었는가! 눈만 뜨게 해준다면 나의 종이라도 되겠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네는 하나님께서 자네의 눈을 뜨게 해주었어도 감사의 마음이 조금도 없다는 말인가?" 그제서야 프란시스코의 친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귀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하나에 속한 자입니까? 아홉에 속한 자입니까?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던 주님의 말씀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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